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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내린터의 정신세계/하늘내린터 이야기

[스크랩] 하늘내린터 회원님들 추석 명절 잘쇠십시요.

친구님들 한가위 추석명절 잘 쇠고 계시지요?

저도 지금은 신도시가 된
고향 경기 광명 본가에 명절쇠러 왔습니다.

차례준비하며 잠시 짬을 내어
어렸을때 뒷마당삼아 오르내렸던
마을뒷산 구름산에 올라 잠시 어린시절 추억을 반추해보았습니다.

오늘도 그때그시절처럼 구름에 휘감겨있는 저의 고향 앞산 구름산..
산봉우리에 올라 사방으로 휘돌아보니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여기입니다.
아련한 추억에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이능선 계곡아래 고고히 잠들어 있는 그님의 무덤은 잘있을까?

병자호란때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조선시대 대표적 한심이 찌질이왕 인조의 맏며느리 소현세자빈의 무덤 애기능으로 발길이 저절로 향합니다.

영회원 표지석을 뒤로 펜스 울타리에 둘러쌓인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무덤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던 젊은 청상의 한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만.
400년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의 무덤이 애처롭게 보입니다.

영회원은 조선 인조의 맏며느리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무덤입니다.

임금의 음식에 독을 탄 죄인의 신분으로 사약을 받았으니, 장례조차 변변히 치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 소현세자가 잠들어있는 서삼능에 함께 묻히지도 못하고 친정의 선산인 광명에 묻혔을 터.
친정집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 강빈을 '애기씨'라 불렀고, 그이가 묻힌 무덤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애기능'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강빈이 죄가 없음은 그이가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난 뒤인 숙종때 밝혀집니다.
혐의가 벗겨진 강빈을 소현세자와 합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만
끝내 강빈은 남편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광명시 지금 이자리에 남았습니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기능앞 저수지에 저녁노을이 집니다.
고향의 저녁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님들 명절 잘쇠십시요.


조선 인조8년 비운의 소현세자빈의 기록을
카친이신 별이빛나는밤에 님의 글을 통하여 한많은 우리역사를 전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8)

조선 시대 왕실에 발을 들인 여인은
궁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왕실 여인 중 유일하게 외국에 다녀온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인조의 맏며느리인 소현세자빈 강씨(1611~1646)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다.

세자빈이기 전에 '엄마' 였던 강씨는
결혼 9년 만에 낳은 아기를 품에 얼마 안아 보지도 모한 채 타국으로 끌려가 몇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에만 신경 쓸 수 없었다.
청나라에 위치한 심양관(조선대사관)에 머물며 노예시장에서 울부짖는 조선인 포로들을 본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은 45냥만 있으면 조선인 한 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강씨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물품 부족에 시달리는 청나라 사람들을 눈여겨 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청나라 왕이 돈을 건네며 조선의 물품 교환을 요구하자 강씨는 조선에서 들여온 질 좋은 종이, 약재, 인삼 등을 청나라 사람들에게 팔아 돈을 마련했다.

4년 뒤 그녀는 아예 청나라의 척박한 땅을 얻어 농경 민족의 우수한 농법으로 많은 수확물을 거두어들인 뒤 만주족 귀족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해 농사일을 제공할 뿐 아니라, 약 2백 명이나 되는 심양관 식구의 식량을 마련했다.
강씨 덕에 심양관 거리는 포로가 아닌 조선 문물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강씨가 청나라와 짜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올리려 한다는 소물이 나돌았다.
인조는 청나라에서 자신을 대신해 갖은 외교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해 나가는 소현세자와 영리한 맏며느리를 믿을 수 없었다.
결국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소현세자는 독살 당했다는 의혹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세자빈 강씨도 역모라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이는 왕위에 집착한 인조의 불신이 낳은 비극이였다.
만일 인조가 강씨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강씨는 인조를 도와 국제 무역으로 조선을 부흥시키지 않았을까. 가부장 문화 탓에 여성으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강씨의 죽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소현세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의 궁녀들 몇을 지목하여 죽였고, 강빈의 오라비들을 유배 보냈다가 불러 곤장을 쳐 죽였으며, 급기야 강빈을 폐서인하여 사약을 내려 사사시켰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로 유배보냈고,
첫째와 둘째 아들은 현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잔혹한 아비이자 시아비이자 할애비 인조입니다.

소현세자와 부인 강씨 !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서양의 과학 문물을 보급하고 장려하여 조선을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꾸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주 어쩌면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개화를 하고 중흥을 해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지 27년만인 1649년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무너진 지 30여년 만에, 이번에는 여진족 수장에게 삼배구고두의 모욕을 당했고,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주었으며, 장자를 죽였다는 의혹을 받는 임금!
참으로 오욕으로 얼룩진 재위기간이었다 하겠습니다.

출처 : 하늘내린터 귀농귀촌 힐링캠프
글쓴이 : 하늘내린터(김황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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