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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귀농귀촌/귀농귀촌 성공사례

[스크랩] 귀농성공사례3/김현숙 제일농장대표

제목 없음

 

“절대로 광부랑 결혼하지도 말고 광산 근처에선 살지도 마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으로 매일 남편을 일 보내는 어머니는 딸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족에게 광산업은 불안한 생활 그 자체였다. 사북과 고한 근처 탄광에서 아버지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광부들이 검게 탄을 뒤집어쓰고 잠드는 밤에 벼락치기로 돈을 번 광산 하청업자들이 탄광 근처의 거대한 요정과 윤락가에서 밤을 밝히는 곳이었다. 값싼 노동력에 이용당한 광부들의 분노에 사북은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석탄 사용이 줄면서 정선의 탄광들도 하나 둘 폐광되었다.

어머니에겐 농사를 짓고 사는 게 큰 꿈이었다. 딸은 농사짓는 사람과 결혼해 땀 흘려 농사짓는 게 장래희망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서 영농기술 교육을 받다 들깨 한 줌이 한 가마니로 수확되는 것을 보고 자연과 인간의 힘에 전율을 느낀 뒤였다.

 

 

남편 전주영 씨도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농사와 관계없는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부부는 초보 농사꾼이 되어 농사를 시작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옆에서 봐 온 것도 아닌데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내의 걱정에 남편은 이렇게 격려했다.
“백지에 그리는 그림이 더 잘 그려지는 법이지요. 남들이 반 쯤 그린 그림에 내 그림이 그려지겠어요?”

두 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그 비용으로 돼지 5마리를 구입했다. 백지 앞에 붓 쥐는 마음으로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 그리는 그림인데 시행착오가 없을 리 없었다. 의욕적으로 돼지 농장을 시작했는데 1979년에 돼지 파동이 터져 새끼돼지 한 마리 값이 5천 원으로 떨어졌다. 실패만 되뇌지 말자고 다짐하며 그 해 마늘 50접을 종자삼아 2천 5백 접으로 생산량을 늘렸는데 또 다시 마늘 파동이 터졌다. 창고에 가득 쌓인 마늘이 썩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있던 어느 날 남편이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어 농협에서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돈으로 한우 2마리와 밭을 구입했고 김현숙 씨도 경운기와 농기계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한 것도 잠깐, 소 농장을 시작했더니 1983년부터 소 파동이 시작됐다. 송아지 딸린 엄마소를 2백 8십만 원에 구입해 3년을 키웠는데 시세가 뚝 떨어져 80만 원을 받지 못했다. 원가를 생각해도, 키운 기간을 생각해도, 사료 값을 생각해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였다.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하늘도 탄복한다던데 열심히 해도 망하는 게 농사구나 싶었다. 게다가 소 값 파동으로 농민들이 잇달아 자살을 하는데도 우루과이 라운드라며 수입 소고기가 들어왔다. 농업의 모순, 유통의 모순을 실감했고 절망했다. 정책적인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개인적인 실패도 잦았다. 고산지대에 방목해서 소를 키우면 소가 건강하게만 자랄 줄 알았는데 관리 부실로 종종 소들이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고삐가 감긴 채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소를 보고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뒤이어 병이 들거나 농장주의 지식 부족으로 7마리의 소를 잃었다. 방목은 농장에서 키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러저러한 실패로 빚만 늘어났다. 1983년부터 시작된 소 파동의 타격은 심각했고 1989년 즈음엔 직격탄을 맞았다. 농사를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고 빚이 9천만 원으로 늘어 있었다. 서울 지역 변두리 전세 값이 3백만 원이던 시절이었으니 죽었다 깨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요, 도둑질을 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그때까지 가진 땅과 농장, 가축을 정리하니 겨우 5백만 원의 수익이 나왔다. 시아버지와 집안의 어른들은 5백만 원이라도 갚고 도시로 가 새 삶을 살라고 당부했다. 도시로 가서 일한다고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다.

부부는 밤을 지새우며 의논하다 ‘농사로 진 빚이니 농사로 갚자’고 의기투합했다. 파동이 일어나지 않을 작목, 남들이 안 하는 방법을 찾아 나섰고 고산지대에 고랭지 농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대가 높아 옥수수와 콩 농사를 실패해 묵히고 있던 땅에 배추와 열무를 심기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랭지 농업은 소규모로 짓고 있었고 수확을 해도 교통이 나빠 유통할 활로가 없었기 때문에 종사하는 농민도 많지 않았다. 부부는 정선군청을 제집 드나들 듯 찾아다니며 도로 공사를 요청했다. 관계자들을 찾아가 “도로가 없어서 농산물 출하가 불가능하다니 말이 되느냐”며 “고랭지 농업으로 정선 농민들의 활로를 모색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 부부의 간청을 계기로 도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부부는 배추 농사에 목숨 걸듯 달려들었다. 잠을 세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밤이 되면 경운기와 오토바이의 불을 밝히고 열무를 뽑았다. 10여 년의 실패와 좌절을 보상해주듯 그 해 깨끗하고 싱싱하고 맛이 단 배추가 트럭 2백 대 분량으로 생산되었다. 도로가 뚫려 유통도 용이했다. 그 해 배추 수익만으로 2억 원을 벌었다. 대성공이었다. 부부는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제갈공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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