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오대산 기슭, 해발 400m의 청정지역에서 방목한 닭과 오리에게 직접 개발한 발효사료를 먹이는 농원이 있다. 육질이 다르다고
소문이 자자해 1년에 키우는 7천여 마리의 닭과 오리는 다 크기가 무섭게 팔릴 정도다. 게다가 축사에서 나오는 오물은 발효를 시켜서 고스란히
채소밭의 퇴비로 활용되는데, 이 ‘순환 농장’에서 재배한 무, 고추, 파프리카 등의 채소는 아삭아삭한 맛이 끝내준단다. 시골에 남아 있던
농민들도 모두들 도시로 떠나던 1993년에 귀농했고 인터넷은커녕 TV도 잘 안 나오던 오대산에서 10여 년 전부터 피시통신을 두드렸던 오지의
아줌마는 지금은 유기농산물 인터넷 배송의 선도자가 되었고, 농민들에게 인터넷을 강의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로 모두들 농촌을 떠나던
때 농촌으로 들어가 13년이라는 시간을 땅과 씨름하다 결국 ‘땅의 여자’가 된 사람, 강원도 강릉 오대산 자락의 <청지원(구
송천농원)> 송인숙 씨가 그 주인공이다.
1993년 인천의 용접공이었던 남편과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다섯 살배기 아들과 4개월
된 딸을 안고 강원도 강릉 오대산 자락으로 이사를 왔다. 산자락에 고작 일곱 가구가 살던 깊은 마을, 다 스러져가는 집 한 채와 도저히 물건을
보관할 수 없는 창고 하나가 네 식구를 맞았다. 주변에 도통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골이었지만 도시의 삶이라고 고독이 없으랴.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 정직하게 일해 정직하게 벌고 싶은 마음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택했다. 다행히 아이가 울지 않았다. 산속의 적막이 오히려 포근한 듯
깊은 잠을 잤다. 가족이 이사한 동네는 강릉에서도 40km나 떨어진 삼산리. 옛날 거리로 꼭 백리만큼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전화와 전기는
들어오지만 난시청 지역이라 텔레비전도 시청할 수 없었던 동네.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몰랐다는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1993년은
국내에도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었던 해, 그나마 농사짓던 사람들도 땅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요즘처럼 ‘귀농 담론’이 이야기되지도 않던 시절,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땅을 택했다. 송인숙씨는 일찌감치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열심히 일해 한 달 월급 15만 원 중
13만 원을 동생들 학비와 가족들 생활비로 보내던 전형적인 맏딸이었다. 하지만 그런 희생은 다른 가족들에겐 잊히고 마는 사소한 고생이었다.
오히려 형제 중에 학력이 제일 낮은 천덕꾸러기가 되자 인숙 씨는 가족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더구나 천식을 앓고 있어
가을만 되면 고통스러운 밤이 계속되자 혼탁한 공기로 가득 찬 도시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도시 생활, 성공에 대한 미련을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골 가서 살자는 남편 고광석 씨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송인숙 씨가 두말없이 짐을 꾸린
이유였다.
아내는 곧 까만 고무신에 헌 작업복, 파마기 없는 머리와 화장 안 한 얼굴이 어울리는 영락없는 시골 아낙으로 변신했다.
다섯 살이었던 큰아이 태양이는 이사 오자마자 운동화에 흙이 묻는 게 견딜 수 없이 짜증나는 눈치였지만 며칠 만에 그런 짜증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오로지 마당에서 노는 일에 열중이었다. 달려드는 닭들에 한동안 쫓겨 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닭을 겁주려 날리던 돌팔매질도 늘고 달리기도 제법
빨라졌다. 닭도 더 이상 태양이를 쫓지 않았다. 엄마도 태양이를 보며 흙과 땅에 삶을 적응시키리라 생각했다. 작은아이 태은이는 엄마가 밭일을
하는 동안 함지박 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조용히 놀았다. 햇볕에 함지박이 달궈져 온몸이 벌겋게 데였는데도 조용히 울던 아이였다. 태은이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빨던 우유병을 강아지들에게 나눠주면서 놀곤 했다.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던 태은이는 부화실의 병아리를 돌보고 강아지와 오리, 거위를
곧잘 돌보곤 했는데 새끼 거위가 태은이를 엄마로 알고 따라올 정도였다.
남편과의 관계도 변했다.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을 했는데
직장 생활에 치여 결혼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고, 주말마다 시댁에 들렀던 신혼 초기에는 함께 산다는 의미를 느낄 수 없었던 하루하루였다.
시골로 와 24시간 같이 지내게 되어서야 지긋지긋하게 부대끼는 결혼 생활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께 노동하고 함께 거두는 진짜 동반자의
삶을 그제야 찾은 느낌이었다.
13년 전, 도시 출신 이방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텃세와 편견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지에서의 하루하루는 생존을 위한 끝없는 전투였다. ‘오죽 못나서 시골로 농사나 지으러 낙향했겠냐’는 주위의 시선은 인숙 씨를 무척 힘들게
했다. 더욱이 초기에는 농부가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농사에 관한 정보나 지원이 전혀 없어 더욱 힘들었다. 신문에서 정부 지원으로 농기계를
반값에 공급한다는 공고를 보고 면사무소에 갔는데 해당 대상이 아니라며 공급해주지 않았다. 이방인 취급과 푸대접에 할 수 없이 전액을 다 주고
농기계와 관리기를 구입했다. 스러져가던 집을 고치고 사료 건조장을 짓고 창고를 새로 지으려 하자 국립공원 안에 건물을 짓는 것은 불법
용도변경이라며 면 직원 남자 셋이 협박조로 찾아왔다. 농민들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아왔던 공무원들의 태도는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힘없는 도시
출신 이방인들을 공무원 말 잘 듣는 농민으로 길들이고 싶어 몇몇 공무원들은 사사건건 꼬투리 잡고 시비를 걸어왔다. 정작 모 기관의 기관장이 바로
옆산에 집을 짓고 준공도 받았을 땐 아무 문제도 없었을 뿐더러 되려 인숙 씨가 관리하던 산자락을 침범한 일도 있었는데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