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속가능한 귀농귀촌/귀농귀촌 성공사례

[스크랩] 귀농성공사례4/정해운 한국양봉협회 명예회장

제목 없음



정회장은 이동양봉으로 전환하였다. 2월에서 4월 말까지 유채꽃 피는 제주도를 일주했고 아카시아 꽃 피는 5월부터는 남쪽에서 시작하여 휴전선 최전방인 경기도와 강원도 철책부근까지 이동했다.

한 달 내내 천막을 폈다 접었다 반복하며 찬 이슬을 맞아야 했다. 6월과 7월 밤나무와 싸리 꽃, 메밀꽃이 필 때 다시 전국을 돌 때 가족과의 생이별을 참아야했다. 일 년에 7곳을 옮겨다니니 건강도 건강이지만 가족을 보지 못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은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열성을 다하다 보니 8톤 트럭 2대를 가득 채우기도 해 도시의 직장인들 부럽지 않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정해운 한국양봉협회 명예회장은 매일 아침 출근 때마다 늘 자신의 서재에 있는 지게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집을 나선다. 지게를 지던 어린 시절 고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흐트러지는 자신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늘 처음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정 회장은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평림동의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났다. 지게로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양봉업에 종사한 아버지는 늘 꿀벌 2통이 논 한마지기 수입과 비슷하시다 하시며 꿀을 팔아 학비를 대어 주셨다. 정 회장은 고교를 졸업하고 2년간 양봉기술을 전수 받고 군을 제대한 뒤 본격적으로 양봉을 시작했다.

 

 

결혼 전 서울에서 한국전력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정 회장의 아내 이순희 씨(57)는 일찍부터 남편이 생산한 벌꿀을 전량 소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내의 조언대로 정 회장은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78년 경기도 성남의 모 백화점에 작은 꿀 가게를 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판매성적이 좋지 않아 곧 부인 이순희 씨의 희망대로 의류 매장으로 업종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벌꿀 매장의 실패가 전화위복의 계기를 가져온다.

부인 이순희 씨가 도매상에서 옷을 들여올 때 현금 대신 해당가격의 꿀을 제공하는 것을 제안해 물물 거래가 성사된 것이었다. 의외로 현금보다 꿀을 선호한 의류 도매상인들이 많았다. 의류상인 역시 제 값 받고 의류를 넘기지 못하는 불만이 있어 같은 값의 꿀을 받을 때 오히려 정당하다 느꼈던 것이다. 동대문·남대문의 수많은 의류 상인들과의 물물거래는 획기적인 수익을 낳았다. 중간상인을 거치는 다른 양봉업자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고 아이디어 하나로 유통의 열악함을 극복한 것이었다. 8년 여 물물교환은 정 회장 부부에게 안정된 기반을 선물하였다.

가족의 경제적 조건이 안정되자 아내 이순희 씨는 양봉협회 감사를 거쳐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남편에게 의미 있는 사회 활동을 하라고 권유 하였다.
"내가 가정과 사업을 뒷받침 해 줄테니 양봉일과 양봉산업 시장을 키우는 데 앞장서면 좋지 않겠어요?"
남편이 양봉협회 일을 하도록 제안한 것은 바로 부인 이순희 씨였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제갈공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