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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귀농귀촌/신지식농군,부농되기

[스크랩] 돈보다 사명감이 있어야 귀농에 성공

돈보다 사명감이 있어야 귀농에 성공 - 김희자님
2007-07-30 | 조회:434

최소한의 귀농지원 정부가 배려해야

그는 정부의 귀농지원이 보다 현실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귀농 농민의 성공사례가 많은 이유는 내려오는 농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겠다는 의지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연구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귀농인이 처음 정착할 때 최소한의 뒷받침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농사에 필요한 농기계 지원 정도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김 대표는 매일 농장으로 출퇴근을 한다. “워낙 한 가지에 몰두하는 성격인지라 일터와 가정을 분리하지 않으면 그나마 가정을 돌보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농장에 집을 짓지 않았다”는 그는 매일 꾸준하게 할 일을 나눠하는 방식으로 일손 부족을 해결하고 있다.

대부분 농가가 그렇듯 명절은 1년 매출의 대부분이 결정되는 시기다. 특히 표고버섯은 명절 선물용 단골상품인지라 김 대표는 지난 추석을 무척 기대했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도 직원이나 거래처 선물용으로 이제 ‘농산품’이 아닌 ‘상품권’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해버린 세태를 섭섭해 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이제 적극적으로 마케팅 전략을 바꿔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농산물 마케팅 전략으로 적극 활용되는 ‘브랜드화’에 대해 김 대표는 쓴소리를 던진다. 지자체마다 내놓은 ‘브랜드’가 너무 많다는 것. 하나의 제품에 지자체 브랜드, 농협마크, 갖가지 인증표, 농가 브랜드까지 붙이니 소비자의 변별력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중요한건 부모의 관심

김 대표는 “딸 둘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으니 만족한다”는 말로 농촌에서 아이들 키우는 것에 대한 의견을 대신했다. 사교육이 힘든 것은 농촌의 현실이다. 그러나 꼭 사교육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 대표가 농촌살이를 시작하며 세운 “꼭 성공하겠다”는 목표 안에는 자식농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보충수업을 해줬고, 5명 아이들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전교생 2개 반이 전부인 학교이지만 이후 ‘우수반’이란 걸 만들어 집중적으로 보충학습을 해줘 이곳 아이들 대학진학률이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 생각이 건전하고 독립심이 강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김 대표는 아이들과의 대화를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주 목요일이면 아무리 바빠도 초등학교 6학년생인 늦둥이 아들을 직접 읍내의 ‘과학교실’에 데려다 준다. 차안에서 잠깐씩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아들은 그만큼 좋아한다. 김 대표는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부모의 관심만 있다면 아이들은 잘 자란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제  목 | ‘실패자’ 낙인 극복하고 표고버섯 재배 시작 -김희자님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요나농산>. 이곳의 주인장 김희자 대표는 무농약 표고버섯 생산, 자연 햇볕 아래서 건조시킨 슬라이스 표고버섯인 해표고, 표고버섯분말 등 ‘표고버섯’ 한 가지 품목으로 지금의 5천 평 농장을 일군 억척 여성 농업인이다.

‘내가 키운 표고버섯은 절대 헐값에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느라 값이 떨어질라치면 도매시장에 내놓았던 버섯을 도로 싣고 오는 오기와 자존심은 그동안 김 대표가 이룬 ‘성공’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버섯강정, 표고버섯 음식 프랜차이즈 개발, 표고버섯 반찬 메뉴 개발 등 새로운 사업구상에 빠져있는 김 대표는 “도전하고 연구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미래’의 성공은 현실이 된다”고 말한다.
마을 구판장 일보며 표고버섯 재배 마음 굳혀
1985년 김 대표는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건강까지 나빠진 서울토박이 남편과 함께 요양차 고향으로 내려왔다. 마침 ‘원예공부’에 빠져있던 남편과 ‘꽃이나 키우며 농촌생활에 적응해보자’ 하는 맘이 전부였다. 마을 이장님이 김 대표에게 “서울에서 공부한 사람이 더 잘할 것”이라며 마을 구판장 운영을 권했다. 구판장에서 일하면 마을 사람들을 다 만나야 하니 위축된 마음에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 일을 맡기로 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김 대표는 시골의 생리를 파악하고,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농사의 ‘알짜정보’를 가장 먼저 접하는 ‘특권’도 누릴 수 있었다.
이때 그는 ‘표고버섯’ 재배를 결심했다. 표고버섯은 상품성도 뛰어나지만 재배하는 데 넓은 땅이 필요하지 않고, 주변에 산이 많아 원료(나무) 확보에 어려움이 없으며,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맑고 깨끗한 이미지의 ‘가평’이 판매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동안 사업계획을 세우면서 이왕이면 ‘무농약’으로 표고버섯을 재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힘든 육체노동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일꾼들 휘어잡아
땅 한 평 가진 것 없이 남의 토지를 빌려 표고버섯 재배를 시작했지만, 그 후 10년간 수익은 없었다. 돈이 생기면 생활비를 제외하고 모두 투자로 들어갔다.남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니 억울하고 힘든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시설투자를 해놓으면 땅주인이 ‘나가라’거나 ‘옮겨 달라’고 말하곤 했다. 지역에서 표고버섯을 키우던 분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겠다며 참나무 2만 본(표고버섯 재배용 나무)을 인수할 것을 제의했는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그 2만 본이 모두 산꼭대기에 있더란다. 일손을 구할 수도 없는 처지라 남편과 둘이 2만 본의 나무를 농장으로 옮겨야 했다.
농사란 게 자본금 없이 처음 자리 잡을 때까지는 남자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김 대표에겐 해당이 안 되는 말이었다. 운동권 출신이었던 남편에 대해 고향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내조자가 아닌 사업 파트너가 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험한 육체노동 앞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표고버섯 재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참나무’를 확보하는 일. 벌채에서부터 드릴로 구멍을 뚫는 종균작업과 자신의 허리보다 굵은 참나무들을 골고루 뒤집어 주는 일도 직접 했다. 지금이야 요령으로 일한다지만 처음엔 몸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하얀 얼굴에 체구도 작은 여성이 척척 일을 해내니 드센 남자 일꾼들도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목 | 농사는 입으로 하는게 아니라 직접 뛰어야 한다
김 대표는 농사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뛰어야만 결과물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수익이 나지 않자 당장 돈이 급한 마음에 ‘누가 뭐하니 잘 된다더라’는 말만 믿고 투자해 잃은 돈도 만만치 않다. 다행스럽게도 표고버섯은 언제나 ‘현금화’가 가능해 아이들 밥 굶기지 않고, 학교도 보낼 수 있었다.
그 당시엔 저온저장 시설도 없어 버섯을 따면 한 두 상자라도 그날 바로 서울에 가야만 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면서 농장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정부보조금을 받을 자격도 생겨 자금난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품질에 쏟은 정성만큼 헐값에는 안 판다.

농업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농산물 가격 등락이 매우 심하다는 점이다. 고가의 농산품인 ‘표고버섯’도 가격이 1관에 20~30만 원일 때도 있지만 2~3천 원까지 떨어질 때도 있다. 파는 것이 아니라 버린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가격이다.

표고나무 한 토막을 뒤집는 데 드는 인건비가 2천 5백~3천 원, 드릴로 구멍 뚫는 인건비가 2천 원 정도이다.
1년에 1만 개의 나무를 관리한다면 인건비만 5천만 원이 넘는다. 그런데 나무 한 개당 수익이 나기까지 1년에서 1년 반이 걸린다. 표고버섯 하나의 가격이 절대 쌀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들쭉날쭉한 시세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김 대표는 12년 전 남편과 함께 일본에 가 ‘표고버섯 가공법’을 배워왔다.

김 대표는 제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무농약 인증’을 비롯해 해외수출을 위해 ISO인증도 받았다. 특히 경기도지사가 품질을 인증하는 ‘G마크’는 도내 표고버섯 농가로는 <요나농산>이 유일하게 획득했다. 거대 도매시장에 기대지 않고 노력한 만큼 적정한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선 다른 유통망이 필요했고, 그는 생산량의 70%를 전자상거래와 직접 판매로 소화한다.

기술 전수해줄 후계자 없어 고민

그의 요즘 고민은 ‘후계자’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의 모 대기업에 다니던 사람이 버섯재배를 배우겠다며 그를 찾아왔다. 1년 넘게 귀농을 준비했다는 그는 각오도 대단했다. 평소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기술을 전수해주고 함께 농장을 경영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김 대표는 그를 농장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지나지 않아 ‘힘들다’며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그 사람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부장까지 지냈지만 농사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며 “정해진 규칙이 없으니 어떻게 적응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더란다.

귀농사이트’를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 공고를 낸 후 20~30대 대졸 출신자들도 여러 명 있었지만 아직 소득은 없다. 그래도 그의 ‘후계자 찾기’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대부분 농가가 그렇듯 가족경영체제로 갈 법도 하지만 김 대표는 “남편과 아이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기를 바란다”며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술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밝혔다.

김희자님 기사 계속됩니다. / 출처 : 농촌정보문화센터
출처 : 귀농귀촌
글쓴이 : 하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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