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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농촌 희망찿기/농촌 마을발전 자료

[스크랩] 공동체마을 개념만들기 첫번째 : 공동체의 표층개념과 심층개념 분석

수세식 화장실이 없던 예전, 집집마다 갖추고 있는 것이 요강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밤, 소변이 마려운데 바깥에 있는 뒷간으로 가기는 정말 싫을 때 방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요강은 뇨의를 해결하기에 안성맞춤이었죠.
외국관광객이 인사동에 들렀다가 놋쇠로 만든 요강을 발견하고 원더풀! 하면서 이 요강을 사서 제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이는 요강에 사탕을 잔뜩 담아놓고 제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한국에서 산 귀한 골동품이라며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사탕을 대접하곤 했지요.
요강은 소변을 담는 동그란 그릇이었습니다만 만든 이의 의중과는 달리 사탕단지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책상 만드는 이는 그것을 공부하는 목적으로 만듭니다만, 책상을 산 이가 그것을 식탁으로 쓴다고 해서 뭐, 엄청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밥을 먹어보면 압니다. 수저를 쥐고 밥그릇, 숟가락을 오가는 자세가 좀 어색하죠. 만든 이가 생각한 용도와 쓰는 이의 행위가 다르면 자세가 좀 어색해집니다. 그렇다고 뭐, 세상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든 만든 이의 의중과 사용하는 이의 행위가 같으란 법칙, 없습니다만, 그래도 딱 맞는 건 아무래도 만든 이의 의중에 맞게 사용할 때겠지요. 그래서 모든 생산물엔 사용법이란 게 있는 거겠지요.

저는 도시의 귀농자들을 위한 귀농자마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름을 교육생태마을이라고 붙였습니다.
처음 교육생태마을을 구상하고 수많은 데이터를 취합, 분석해서 그 결과물을 가지고 이런 저런 장치와 컨셉을 완성한 후 마을을 만들었고, 만드는 중입니다만 입주한 주민들이 반드시 그 의도에 맞게 삶을 꾸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민들이 살기 편하게 쓰면 되지요. 하지만 처음 컨셉과 목적에 맞게 활용할 때 그 효과는 최대로 발현되는 법입니다.

지난 주말여행 때 입주할 주민들로부터 공동체 개념, 그에 따른 마을사업들, 주민센터의 활용문제 등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그 중 일부 의견은 마을을 기획한 이로서 염려가 되는 부분도 있고, 개념을 달리 해석하는 부분도 있어 처음의 연구 자료와 기획의 과정, 결과를 알려드리는 것이 주민들의 여러 모색에도 도움이 되고 귀농을 꿈꾸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글을 씁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귀농자를 위한 공동체마을 사용설명서입니다.
설명서대로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마을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용설명서대로 사용하시면 꽤 훌륭한 결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현재의 여건에 맞게, 그리고 상세한 배경설명까지 곁들이다보니 뜻과는 달리 또 글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여러편에 걸쳐 연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 연재 첫 번째 글입니다.



1. 교육생태마을의 개념 만들기 첫 번째 : 공동체의 표층개념과 심층개념 분석

영주교육생태마을은 공동체마을이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생각과 행동이 향하는 지점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는 맞고, 공동체라는 용어의 정확한 해석으로 보면 아니다. 왜냐하면 영주교육생태마을의 원형은 서구에서 온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가 가뭇없이 잃어버렸던 예전의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공동체’라는 용어에 기대야 한다면 영주교육생태마을의 공동체성은 [생각 혹은 개념의 공동체]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낫겠다. 간단히 풀어서,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과 생태를 보는 시각과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공동체’는 서구에서 만든 용어이다. 언어는 본질을 규정하는 기호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는 서구의 역사, 사회, 문화 등 그들의 모든 인문 요소를 배경에 깔고 있는 용어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마을을 ‘공동체 마을’이라고 칭하고 싶다면 서구에서 공동체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부터 세심히 짚어야 한다. 그래야 이 개념이 여기에 이식 가능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드라망공동체, 가비오따스같이 서구가 아닌 곳에서 자라난 공동체도 있다. 하지만 이 땅의 공동체가 바라보는 바가 그 곳의 공동체를 만든 배경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이들 공동체까지 포함해서 해석을 광역화하다보면 무책임한 일반론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이글의 목적은 공동체의 해석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동안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가 극히 드문 이유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강하고 실현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서의 생산과 분배 시스템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사유재산, 자유직업의 인정과 불인정같은 파생개념도 있지만 공동체의 핵심은 생산과 분배의 시스템 정립이다. 생산과 분배는 누가 왜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모여사는가의 개념보다는 표층에 있는 개념인데 이 표층개념이 왜라는 심층개념을 덮어버린 이유는 뭘까?. 
생산과 분배는 근대를 추동했던 서구사회에서 핵심개념이었다. 이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본주의를 완성시켰고 서구사회의 골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든 공동체에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 생산과 분배의 ‘공동체’다운 방식의 도입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이 개념의 도입 없이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조차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생산과 분배의 공동체다운 방식’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 지점이 서구의 공동체를 그대로 이식한 이 땅의 공동체 마을이 실패한 원인이다. 왜 그럴까? 그 원인 분석을 하기 위해 서구의 역사 인식 속으로 들어가 보자. 무언가 막혔을 때는 역사책을 들추면 된다. 답은 역사 안에 다 있다.

모든 현상은 그 반대편의 ‘반’현상이 있어야만 현상으로 나타난다. 우주가 이런 ‘정’과 ‘반’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동서양 할 것 없이 공통된 인식론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음양이라고 지칭한다. 음이 있으면 양도 반드시 있다는 것. 그들이 공동체를 만든 이유는, 이 관점에서 보면 그들 삶에 반공동체성이 그림자로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결국 공동체는 반공동체의 기초 위에서 성립한다. 반공동체성이 없었다면 공동체성이 나타날 이유는 없다.
이 대목에서 의아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사회안전망을 훌륭하게 갖추고 똘레랑스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니 하며 나눔과 관용을 실천하는 그들에게 웬 반공동체성? 이 의아함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되기 위한 자격이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를 보면 금방 풀리게 된다. 이 ‘인간자격’이 반공동체성을 형성했고, 반공동체성 속에서 인간이 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으므로 반공동체성을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반공동체성이 극복되었기에 비로소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인 공동체가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서구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 역사에 있어서는 필연이다. 
그들에게 ‘인간’이란 백인(로마인, 고트족, 앵글로색슨족, 아리안족 등 시간을 거치면서 이 개념에 편입되는 민족이 늘어난다)에다가 기득권자(귀족, 영주, 기사, 성직자, 도시상공인, 부르쥬아, 기업가, 자산가로 확장된다)이면서 남자(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는 19세기에 겨우 만들어졌고 가족개념도 그 때쯤 확립되었다. 심지어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때는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 전에는 아내, 애인은 재산이었다)이고 기독교인(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선포된 밀라노칙령은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공식화되었지만 사실 내용은 기독교에 의한 정치기반의 확보, 계급성의 유지에 있었다. 이것이 천주교로 이어져 중세의 유럽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이다.
백인남성 기득권자로 기독교인이라야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 외는 모두 타자, 이방인이다. 인간의 형태이지만 인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무리들. 노예제도는 이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공통양심의 저해가 되지 못하고 일반화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후 아동노동착취, 부녀자노동착취가 당연시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서양미술에 늘 나타나는 여성의 적나라한 누드화도 이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누드화는 재산목록 카탈로그였으니까. 그들이 여성과 결혼하는 행위는 재산의 취득과정이었다.
서구(당시의 유럽)는 이렇게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마그나카르타로부터 비롯되는 영국의, 일련의 권력이양 작업은 인간인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피지배계층의 권리획득의 과정은 아니었다.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왕의 목을 친 프랑스가 왜 나폴레옹에 의해 왕정복고로 회귀했는지는 프랑스대혁명의 주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의 주체는 산업혁명에 의해 재산과 기득권을 획득한 신흥부자들이었으니까.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신장시켜줄 이유가 없다. 이 역사 유산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서 정점을 찍는다. 아리안족을 1등민족으로 만들면서 유대인을 열등민족으로 만들고 수백만을 살해한 배경은 사실, 히틀러라는 살인마의 단독행위가 아니고 서구의 역사가 면면히 쌓아올린 기득권 지키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세계화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지향점이 명백해진다. 우리가 어영부영 멍청하게 세계화의 깃발을 높이 쳐들 게 아니란 거다)
 
미국의 개척은 바로 이 사람이 아닌 것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이들은 프로테스탄트, 천주교도가 아닌 기독교인들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촉발된 다양한 유럽전쟁들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면서 이단자, 타자가 되어갔다. 유럽에서 타자란 존재는 비주류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 존재를 뜻한다. 그들은 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유럽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미국을 개척한 방식이 공동생산방식이었다. 당연한 현상이다. 물설고 낯 선 땅에 가서, 살인을 일삼는(다고 규정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이 유럽인임은 확실하다) 야만인 인디언들의 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똘똘 뭉쳐서 함께 대응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들은 새로 개척(사실은 강탈)한 정착지에서 함께 경작을 했고 함께 수확을 했으며 함께 예배를 보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한편 외부의 적에게는 철저히 공동으로 대응했다.
이 생존방식은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살아남은 생존방식과 같다. 그들이 떠난 땅, 유럽에서 철저히 학습 받은 대로. 생존은 키부츠라는 공동농장 안에서 보장받았고 이 공동농장을 떠나거나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공동체성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자유는 공동체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수용되었다.
미국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이런 과정으로 자신의 나라를 개척(사실은 강탈과 약탈)했었다. 오늘의 미국은 유럽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반공동체성에 대립각을 세우고 철저히 공동체성을 확립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이 대외문제에 있어서는 팍스아메리카나의 깃발 아래 똘똘 뭉치는 불가사의한 이유는 이런 그들의 역사를 깊숙이 들여다봐야 파악이 가능하다.
그들의 바탕이 그러하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역사인식의 한계 또한 분명하다. 그들 서로는 같은 종류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지만 그 외의 타자들(아프리카 노예들과 그들이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다른 종류, 곧 인간이 아닌 존재였을 뿐이다. 지금도 그들 사회에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는 인종차별은 사실 이런 역사의 산물이다.
그들이 만든 공동체에는 그것이 크건(국가) 작건(마을) 이런 반공동체성이 은밀히 감춰져있다. 의도로 감춘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 존재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이제 ‘공동체’라는 거대담론이 아닌, ‘공동체마을’이라는 작은 단위를 들여다보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동체마을’이 근대를 대체할 대안행동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이런 거대한 역사 배경 외에 그들이 자신의 좌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공동체성을 희석시킨 노력도 한 몫을 한다. 사실 반공동체성이 불러 온 피해는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로부터 시작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이후의 양차세계대전까지 갖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복지정책을 수립하면서 서서히 반공동체성을 극복해나갔다. 그 결과,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고, 그들은 내부로부터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을 시작한지 실로 200년만의 일대사건이었다. 이후 그들은 삶의 질을 높이면서 물질로 인한 인간소외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이 노력의 결실이 공동체마을로 나타났다.
공동체 정신은 이런 축적된 시간 속에서 서서히 완성된 것이지 하루아침에 뚝딱 사는 방식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공동체마을을 만들 수 있던 바탕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만든 사회안전망 덕분에 생존의 공포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공동체마을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느리고 길다. (이타카마을은 공동체마을을 모색하는 단계로부터 첫 삽을 뜰 때까지 10년을 보냈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모색을 하고 계획을 점검해도 될 정도로 그들의 삶이 안정되어 있다는 점은 이 땅에서 마을을 만드는 것과 기본조건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공동체를 하기 위한 기본이 이미 있다. 반공동체성을 극복한 역사경험이 있고 공동체로 나라를 일군 경험도 있고 공동체를 만들고 참여하면서 겪게 될 생존의 공포에서도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심층개념의 기본조건이 이미 충족된 상태에서 생산방식, 분배방식이라는 표층개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역사를 통해 쌓은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 반공동체성을 극복한 그들의 경험이 없었다면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들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혹 그것을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사회안전망이 없이 생존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생산과 분배의 방식을 도출하고 다듬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거다.

결국, 우리가 어떤 마을을 서구 방식의 공동체라 부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반공동체성을 극복한 역사경험과 공동체를 준비할 동안,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동안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의 확보. 이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심층개념이다. 이 심층개념 없이 생산과 분배의 방식이라는 표층개념에만 매달리면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동안 수많은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지만 제대로 지속해오는 공동체마을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심층개념의 역사경험도 없으면서 이것을 소홀히 취급했고, 그 상태에서 생산과 분배의 시스템이란 표층개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동체 마을’을 만들 수가 없는 걸까? 서구식의 공동체 마을이라면 아마 만들기 힘들 것이다. 설혹 만든다 해도 그 지속가능성은 자신할 수가 없다. 반공동체성의 극복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지난 1세기의 근대화 이식 결과, 우리에게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찾은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짙은 반공동체성이 내면화되었고, 지금은 이것을 극복하기는커녕 확대재생산하기에 바쁘다.
용산사건은 이미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그것을 만든 탐욕과 광기는 여전히 온 땅을 횡횡하고 있다. 환율이 안정되는 듯하고 다시 주가가 오르는 듯 보이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시 주식과 펀드 카지노판을 기웃대고 있다. 떨어지는 집값을 부여잡고 망연자실하던 사람들은 강남의 부동산 시세가 반등으로 돌아서는 듯하자 희망에 들뜨면서 또다시 집을 도박판으로 들고 나갈 꿈에 부풀어 있다. 88만원 세대의 절망은 이미 구조화되어버렸고, 비정규직의 한숨은 일상사로 변했다. 사회안전망은 정치꾼들의 이미지조작 재료로 쓰이고 있고 (서울의 지하철을 가 보라. 여자가 행복한 도시니 뭐니 해 가면서 온갖 이미지 조작에 광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학교는 이미 자본에 깊이 물들어 치유할 길 없는 불치병환자로 변한지 오래다. 이제는 아무도 학교서열화, 일제고사의 독소에 놀라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문제로 변했다. 시민사회가 살수차에 꺼져버린 촛불처럼 공중분해된 지금, 권력의 육욕에 비참하게 스러진 한 여배우의 죽음이 가십거리로 변한 지금, 사람들에게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지독한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남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자신과 이웃을 아우르고 연대를 맺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가고, 바야흐로 모든 부분의 모든 현상은 밀림의 생존법칙을 따르고 있다. 반공동체성은 날로날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특정한 누구의 의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진참여로 더 강고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 마을이 생산과 분배의 방식에만 집중하면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게 된다. 그것은 반공동체성의 극복을 위해 가장 우선해야 할 양보와 타협, 그리고 그보다 더 심층에 있는 사랑, 마지막으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탐욕과 인정욕구의 제어 작업이다. 내가 많이 가지면 네가 덜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생산과 분배의 표준화가 가능한데, 그러자면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고 그러자면 인간의 본질에 해당하는 탐욕과 인정욕구를 제어하거나 억제해야 한다. 결국 자신 속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노력이 있어야 그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껍질을 이루는 생산과 분배 시스템의 정립에 이를 수가 있는 거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반듯하게 세우는 것, 이웃에게 참견이 아니라 관심을 지속하는 것, 내가 세운 기준을 다른 이의 기준과 견주어 경쟁하지 않는 것, 행복을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의 자리에 두는 것, 이런 노력이 긍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후에야 비로소 탐욕과 인정욕구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경험을 우리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해 봤을까? 말이 쉬워 다름을 인정하라는 거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는가. 그게 쉬운 거였다면 학교 안에서, 사회 속에서 왕따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것이며 남들이 하니까 뒤떨어지기 싫어서 한다는 부화뇌동이 우리 삶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공동체마을’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 가장 첫 단계, 다름을 인정하고 비교하지 않는 행복의 기준을 스스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섣불리 서구공동체의 표층개념인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들먹일 일이 아니란 거다. 정신의 정립 없이 물질에만 집중한 우리 근대사 1세기의 오류를 마을을 만들면서까지도 되풀이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우리가 새롭게 살 마을까지 서구에서 수입하는 건 정말 아니지 않는가.

 

 

출처  에듀코빌리지 홈페이지 http://educovillage.com/ 

출처 : 오두막 마을
글쓴이 : 에듀코빌리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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