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고향에 보랏빛 옷을 입히다
한국화가를 꿈꾸던 해남 총각과 그림을 좋아하는 새침한 나주 처녀가 만났다.
무심코 적어둔 휴대폰 번호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세 아이와
황금빛 벼이삭으로, 보랏빛 구절초로 해를 더해가며 깊이를 더하고 있다.
글 류수연(농민신문 기자) 사진 최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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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하면 으레 땅끝과 고구마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학창 시절 기억을 더듬어보면 시조 하나가 문득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누구나 한 번쯤 외었을, ‘오우가’로 기억되는 한국 시조문학의 최고봉을 완성한 고산 윤선도의 고향이 바로 이곳 아닌가.
윤선도의 생가이자 해남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이 있는 해남읍 연동에서 윤씨 집안의 젊은 부부가 꽃농사를 짓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해에 듣고는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사적 167호로 지정된 종가를 비롯해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접어들면 고산 유적지를 알리는 표지석 뒤로 멋스러운 붓글씨로 쓰인 ‘들꽃마을’이라는 간판이 달린 조립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철에는 보랏빛 구절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해남지역의 30∼40대 농가주부 5명이 구절초를 심고, 수확해 꽃차와 베개, 비누 등을 만들고 체험실습을 하는 체험장으로 쓰이는 이곳을 찾은 날에는 때마침 설 선물용으로 주문받은 구절초 비누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대표를 맡은 정진영 씨(38)는 초록색이 감도는 비누를 틀에서 떼어내느라 분주했고, 세 살배기 아들 시현이도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 듯 작디작은 손으로 비누를 옮겨주며 놀고 있다.
잠시 후, 남편 윤병옥 씨(44)가 트럭을 몰고 도착했다. 집에 있는 화목보일러에 불을 지피고 와서인지 목초액 냄새가 폴폴 묻어난다. 14년 내내 쉬지 않고 겨울철 꽃농사를 지어온 하우스 두 동(3960㎡)을 올해까지 2년 동안 놀리면서 호밀 등을 심어 땅심을 되살리고, 명감나무 등 꽃꽂이용 소재를 채집해 부수입도 올리면서 모처럼 맞은 ‘겨울방학’을 만끽하고 있다.
“고교 시절부터 광주에서 공부해 아는 사람들이 적었어요. 덕택에 여기저기서 고향 사람들을 사귀고 있죠.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족끼리 2박 3일 휴가도 다녀왔어요.”
한때는 화가 지망생의 길을 걷다 300마지기(1마지기는 660㎡) 벼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변신한 그는 인생 역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화가 지망생, 방황 접고 귀향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던 윤씨는 15년 전인 1994년에 귀향했다. 대학 4학년 시절, 학생운동을 접고 학교를 떠나 2년간의 방황을 마치고였다.
“학교를 떠나자마자 외항선을 타러 필리핀으로 날아갔어요. 영영 돌아오지 않고 싶었어요. 보통 1년 계약을 맺으면 열 달을 만기 하선으로 치는데, 멀리멀리 갈 줄만 알았던 배가 무슨 조화였는지 11개월 후에 여수로 돌아오더군요.”
두어달 방황하다 정선 탄광으로 갔다. 지하 550m 갱도에서 석탄을 캐면서 돈독이 올랐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만 했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갱도가 붕괴되는 사고를 당하자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다시피 한 작은형과, 형을 간호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 짐을 꾸렸다.
달랑 70만 원을 쥐고 귀향했다. 논 7600㎡와 밭, 집터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위탁영농으로 남의 집 논일을 해주면서 논농사를 늘려갔다. 2년째부터는 겨울철에 노는 것이 싫어 하우스 농사도 시작했다. 4∼5월 고추모종을 심고, 6월 모내기를 마친 후 고구마와 고추를 수확하고, 벼 수확을 마치면 고구마 종순을 심고, 다시 겨울 방울토마토 재배에 들어갔다. 그러다 꽃으로 작목을 전환했다. 얼마나 일에 심취했는지 처음에는 로터리작업을 두세 번씩 되풀이했을 정도로 전력을 다했다.
그림 뒤 휴대폰 번호가 맺어준 인연
그런데 어느 날, 벼락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인연을 맺어준 것이 휴대폰이라는 점. 1998년 당시에는 140만 원이나 하는 값비싼 물건이었지만, 누워 지내는 형의 자세를 서너 시간마다 바꿔주느라 바깥출입은 엄두도 못 내던 어머니와 그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비상구였다.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끔 광주에 들르던 윤씨는 어느 날 한 친구의 작업실에 들렀다 수채화 한 점을 발견했다. 수강생 중 한 명이 그린 것이었다. 친구와 함께 윤씨의 집에 놀러온 적도 있었다는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꽤 미인이었어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림 뒷면에 휴대폰 번호를 적어뒀죠. 그런데 연락이 오더군요.”
내친김에 급드라이브를 걸고 매주 월요일을 ‘데이트의 날’로 못박았다. 모내기를 해도, 추수를 해도 월요일에는 무조건 나주에 사는 정씨를 만나러 갔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붓으로 쓴 연애편지를 매일매일 부쳤다. 붓을 놓은 지 오래라고 멋쩍어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15년간 붓글씨를 써온 실력을 자랑하는 그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조병화의 수필 ‘미련없는 죽음의 연습’을 한달음에 옮겨 쓴 여덟 폭 병풍에선 서화로 명성을 떨친 해남 윤씨 집안의 내력이 대물림됐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물량 공세도 펼쳤다. 때마침 백합 농사를 시작했던 때여서 꽃다발을 항상 들고 나갔다. 하우스에 꽃이 없으면 사서라도 선사했다. 이런 정성과 성실함에 정씨도 감동해 만난 지 아홉달 째인 11월 14일에 마침내 웨딩마치를 울렸다.
구절초 심어 새로운 희망 꿈꾸다
“고향이 나주여도, 광주 인근이어서 농사를 거의 몰랐어요. 2년 정도는 결혼생활이 너무 힘겨웠어요. 농사일도 남편이 거의 다 하겠다, 시어머니께서 시아주버님을 간병하셨어도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으니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이제는 어머니와 작은형님께서 별세해 다섯 식구만 살고 있지만, 결혼 초기만 해도 식구들 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결혼 이듬해인 1999년, 태풍 ‘올가’로 벌어둔 돈을 날리고 5000만 원의 빚더미에 올랐다. 이후 카네이션과 스타티스의 일종인 시넨시스 재배로 재미를 보면서 기반을 잡았다. 지난해부터는 20㏊의 논 가운데 3㏊에 저농약 인증을 받아 친환경농업도 시작했다. 얼마나 일 욕심이 많은지 트랙터, 콤바인은 물론이고 트럭만 세 대일 정도다. 정씨도 농업기술센터의 교육을 받으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그림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게 좋아 퀼트, 압화, 요리 교실에 열심히 다녔어요. 이제는 해남서 태어난 남편보다 읍내 사람을 더 많이 알 정도죠.”
화훼농가답게 화훼장식기능사(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고, 꽃농사를 짓는 친한 언니 동생들과 구절초 재배에 팔을 걷어붙이고 들꽃마을 영농조합을 세웠다.
“결혼 초 농사일을 않겠다고 남편과 약속했어요. 지금도 수확철 정도만 일손을 돕고 있어요. 그런데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꽃을 따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라요.”
남편도 외조를 아끼지 않는다. 영농조합의 구절초차 포장재 디자인에 필요한 붓글씨와 그림을 직접 도안하고, 새로 구입한 논에 있는 집 한 채까지 작업장으로 제공했다. 체험장에 있는 참죽나무로 만든 탁상과 생나무의 결이 살아 있는 나무바닥에까지도 그의 손길이 배어 있다.
해남 윤씨 종손의 5촌 조카인 병옥씨의 집은 고산 유적지 매표소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푸근한 덕음산 자락에 자리잡은 집은 결혼 직전에 지은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린 단층집과, 농기계로 가득한 창고로 단출하다. 하지만 집 앞에는 후배들이 만들고 간 도자기 작품과 나무 조각, 옛 농기구 등이 다채롭게 놓여 있다. 옛 집터 뒤편에는 다실로 쓰려 손수 지은 초가집까지 있다. ‘토방’으로 이름 붙인 이곳은 초가지붕 천장에 비가 새 쓰지는 못하지만, 흙으로 빚은 토우들이 정겨움을 더한다.
부부가 함께 붓 다시 잡을 날 꿈꾸며…
정씨가 졸리운 시현이를 업어 재운 뒤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3학년 큰딸 민서와 2학년인 둘째 은서가 만든 가족신문이다. “마당이 넓어 뛰어놀 수 있어 좋지만 동네 친구들이 없으니 집만 똑 떼어 읍내에 옮겨놓을 수 없느냐”는 두 딸은 가족끼리 바다를 구경하고 눈썰매를 탔던 즐거운 추억, 피아니스트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천진난만한 꿈을 알록달록하게 채워놓았다.
힘닿는 데까지 농사를 짓겠다는 윤씨지만 항상 산에 들어가 살고픈 마음이 있다.
“지금은 평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나중에는 토종작물을 심고 산에 들어가서 붓도 다시 잡아볼까 봐.” (윤씨)
“당신은 어떨 때는 꼭 산사람 같아요. 그럼 집도 짓고, 더덕도 심고, 산나물도 캐볼까나? 그러고 보니 지금 구절초도 심고, 초록쌀(녹미)도 기르고 있네.” (정씨)
아직은 아이들 키우느라 어렵겠지만,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며 태평하게 농사지을 이들 부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출처 : 예인의마을
글쓴이 : 청산머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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