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앞바다를 황토 염색으로 물들이다
땅도 물도 사람마저 낯선 태안 바닷가에 귀촌한 이한규·양희숙 씨 부부는 요즘 소박한 꿈이 하나 생겼다. 태안에 가면 된장국이 맛있는 민박집에서 하룻밤 푸근한 인정을 맛봤다고 사람들이 만족해하는 것. 태안군 농촌관광의 별로 떠오른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귀촌일기를 들여다본다.
글 김윤석 기자 사진 임승수(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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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도 물도 사람마저 낯선 충남 태안 바닷가에 귀촌한 지 5년을 맞은 이한규(56)·양희숙(55) 씨 부부. 태안 사람들이 군청직원 얼굴은 몰라도 양씨는 알아볼 만큼 유명인사로 통한다. 태안군청 민원실 도우미로 나선 지 어느덧 4년째를 맞기 때문이란다. 양씨가 군청 민원실 자원봉사자로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제2의 고향으로 받아준 곳이기에 뭔가 남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고, 이 고장에 대해 알고 빨리 적응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성싶어서란다. 아울러 봉사의 보람도 맛보고 싶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군청에 오면 어디에서 일을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 마련인데, 제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가 친절히 안내하면 다들 딸같이, 며느리같이 좋아하세요. 군청에 오면 저부터 찾는 분들도 있는걸요.”
음식 솜씨 좋고 음식을 만들면 나누어 먹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포댁 양씨에게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 손이 많이 가는 특별한 음식은 내놓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재주도 시간도 없단다. 날마다 먹는 된장국 한 그릇에도 다들 맛있어 하고, 된장국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온단다.
“우리 집 음식은 김치, 나물에 된장국이 전부예요.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심고 가꿔 거둬들인 콩과 푸성귀로 요리하는데, 그게 비법이라면 비법이지요. 화학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 다들 맛있어 해요.”
이씨 부부는 손님들을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텃밭에서 뜯은 푸성귀 한 움큼이라도 차에 실어줘 외가나 친정에 다녀간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사돈의 팔촌도 없는 곳에서 입에서 입으로 알게 돼 사촌보다 더 친해진 지인들이 자꾸 늘어났다. 황토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간 사람들은 어김없이 또 찾아오기 마련이다.
첫눈에 필이 ‘팍’ 꽂히다
귀촌하기 전 이씨 부부는 인천시 부평에서 12년간 헬스클럽을 운영했다. 1990년대 들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흥하면 쇠할 때가 있다는 법칙은 이들 부부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동사무소는 물론 새마을금고에서도 동네 주민들을 위해 헬스 기구들을 들여놓고 거의 무료로 운영하는 바람에 회원들이 뚝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오래전 숙제를 마침내 해치울 태세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감춰둔 속내를 털어 놓았다. 시골로 가자는 것이었다.
솔직히 양씨는 귀촌이 끔찍이도 싫었다. 남편 이씨는 신혼 초부터 아이들이 장성하면 농촌에 들어가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웬걸 남편은 나이 쉰 줄에 들어서자 땅을 보러 다니는 것 아닌가. 왠지 모를 불안과 걱정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위병이 생겨 병원에 치료하러 다닐 만큼 스트레스가 심각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잠 못 이루고 우는 날이 많아졌어요. 친구들도 이 나이에 미쳤다고 시골 가서 살려고 하느냐고 만류하는 분위기였어요.”
결국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자 하릴없이 남편을 따라 나섰다. 충남 공주, 대전, 충북 영동, 강원 홍천 등 땅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영화 ‘집으로’의 무대가 된 곳에서도 훨씬 더 들어가는 오지까지 보러 다녔다. 오죽했으면 두 아들이 가까워야 자주 찾아뵐 수 있으니 너무 멀고 외진 곳으로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까.
그러다 마당에서 태안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이 마음에 쏙 들었다. 첫눈에 필이 ‘팍’ 꽂힌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검푸른 바다조차 붉게 물든 노을을 본 순간이었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남들은 선뜻 사지 않을 집을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양식장을 운영하는 마을 사람이 임대료도 내지 않고 살고 있던 허름한 집과 밭을 포함해 1200평을 헐값에 구입하고는 집수리를 시작했다.
물고기 물을 만나다
2003년 이맘때 태안에 들어왔다. 태안읍을 오가는 시내버스가 하루 다섯 차례뿐인 데다 골짜기에 겨우 서너 집이 마을을 이룬 외진 곳이다. 그나마 들어와 살 집은 몇 채 안 되는 인가와도 뚝 떨어져 있다.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흠 잡힐 만한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름한 집을 헐고 조립식으로라도 새로 지으려 했지만, 부엌과 몇 군데만 손을 보기로 했다. 남편 이씨가 혼자 내려와 두 달 동안 집수리를 도맡았다. 제법 사람 살 만한 티를 갖추자 양씨가 세간을 끌고 내려왔다.
이들 부부가 이사와 먼저 한 일은 4평짜리 황토방을 지은 것이다. 남편 혼자 지었고, 지붕은 주말에 아이들이 내려와서 거들었다. 온 가족이 매달린 5개월 대공사였지만 양씨는 거든 게 하나 없다.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 어느 날, 뒷산에서 내려오다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리가 복합골절이 됐다. 일하는 데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먼발치서 깁스한 채 그저 바라만 봤다. 황토방은 주변에 널린 소나무와 황토로 거푸집 씌우듯 지었고, 구들은 포천에서 화강암 한 트럭을 사다가 깔아놓았다. 윗목까지 고루 따뜻하도록 완만하게 골을 파고 깐 구들은 효과가 대단해, 남편 이씨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구들 자랑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새 없다.
비록 전문가의 도움 없이 엉성하게 지었지만 황토방은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도 남는다. 아랫목에는 늘 청국장을 띄우는 구수한 냄새가 가실 새 없지만 주말마다 서로 잠을 자겠다고 예약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귀촌생활에 더없이 행복한 사람은 남편보다 아내 양씨이다. 전화통이 쉴 새 없이 양씨를 찾는다. 청국장 가루, 밑반찬을 주문하거나 주말에 황토방에 묵으러 온다는 예약 손님들이다.
김포댁 태안의 별이 되다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염색하기에 딱 어울리는 곳이에요.”
봄볕이 따사로워지자 이들 부부는 염색체험장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양씨는 그동안 농업기술센터에서 염색을 배워 스카프, 손수건 등 소품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양씨의 재주를 살려 소득도 올리면서 학생 및 주부들에게 염색을 체험할 수 있도록 태안군에서 적극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바람도 막고 30여 명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를 텃밭 모퉁이에 지을 계획이다. 그동안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이 살았는데, 체험학습을 위해 컴퓨터를 들여놓고 인터넷도 설치했다. 지난달에는 남편 이씨가 3일간 홈페이지 관리 교육을 받고 왔다.
“제가 민박을 하면서 청국장 가루를 판매하고, 염색체험장을 운영하는 것이 우리 태안 농촌관광에 밑거름이 됐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지난해 양씨는 유럽 선진농가를 방문했다. 충남도농업기술원 농촌여성리더반 과정을 마치면서 졸업생 스무 명과 함께 독일 민박농가, 프랑스 가공식품 농가에서 농촌관광의 노하우를 배우고 왔다. 이씨 부부에게 아주 소박한 꿈이 생겼다. 태안에 가면 된장국이 맛있는 민박집에서 하룻밤 푸근한 인정을 맛봤다고 사람들이 만족해하는 것.
출처 : 예인의마을
글쓴이 : 청산머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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