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한 옛이야기 가득한 풍경
끝이 없을 것 같던 무더위도 어느새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못다 한 여름의 추억을 만들고 싶거나 숲 속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고 싶다면 산과 바다와 계곡이 있는 강릉으로 떠나보자. 경포대나 정동진 같은 유명한 관광지도 좋지만 질박한 옛날이야기가 숨 쉬는 해살이마을로 가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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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해살이마을’. 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이름만큼이나 정겹다. 동해고속도로에서 주문진 방향으로 올라가다 북강릉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10여 분만 달리면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가 나온다. ‘해살이마을’이라고 쓰인 나무 표지판을 따라가면 길가에 줄지어 선 연보라색 도라지 꽃들이 작은 얼굴을 내민다. 또 길 한쪽엔 코스모스가 반가운 듯 가녀린 몸을 흔들고, 키 큰 해바라기는 머쓱한지 고개를 숙인다. 그 뒤에서 머리를 쭉 빼고 내다보기라도 하듯 비죽비죽 서 있는 한 무리의 새 떼들. 기러기인지 원앙인지 오리인지 구별하기 힘든 이 새들의 이름은 ‘진또배기’라 불리는 솟대다. 금세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40여 마리의 새들은 높은 나무 위에 앉아 마을을 지키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솟대가 있는 입구를 지나 도착한 해살이마을. ‘해살이’는 창포를 뜻하는 말로, 마을 곳곳에 창포가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창포는 햇살만 있어도 쑥쑥 잘 자란다 하여 ‘해살이풀’이라고 하는데 창포의 생명력과 해처럼 밝게 산다는 의미를 담기 위해 마을 이름으로 정했다.
200년 전 막사발을 만들던 움막이 많아 ‘사그막’ 또는 ‘사기막’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가마터와 사기 그릇 잔흔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는 막사발처럼 질박한 옛 풍경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바다와 계곡, 산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남아 있는 전통문화를 토대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했지요. 2005년 농촌진흥청의 농촌전통 테마마을에 선정되고 올해는 농협중앙회의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되면서 올해만 벌써 1만 명 이상 다녀갔어요. 35농가가 체험 별로 담당자를 정해 운영하고 수익금의 10%를 운영비로 내서 마을을 가꾸는 데 사용합니다. 수세식 화장실이나 욕실이 갖춰진 농가에만 민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시설 관리도 철저하게 하고 있지요.” 권오완 해살이마을 추진위원장(44)은 이렇게 마을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 추억이 되살아나는 숲 속
백두대간의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싼 이 마을에는 안시골·움벵이골·쟁골 등 이름도 재미있는 골짜기들이 깊숙이 숨어 있고, 마을 가운데에는 ‘해살이마당’이라 불리는 소나무 숲이 있다. 마을에서 조성한 3000평 규모의 이 숲에는 울창하게 뻗은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군데군데 짚으로 지붕을 엮은 원두막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소나무 사이를 걸어다니며 산책을 하거나 원두막에 앉아 솔솔 부는 바람을 맞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또 이 숲 속을 걷고 있으면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무들 사이에 지게·투호·그네·널뛰기 등 옛 물건들이 놓여 있어 이 나무 뒤엔 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옛사람들을 생각하며 지게를 직접 져보기도 하고 그네나 널뛰기, 투호도 해볼 수 있다. 지하수를 퍼올리는 펌프도 있어 직접 펌프질을 해보면 어린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난여름 물놀이를 제대로 못 했다면 소나무 숲 옆으로 흐르는 개울에 손이나 발을 담가보는 것도 좋다. 대관령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맑고 깨끗한 데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놓여 있어 이름난 계곡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또 산 쪽으로 2㎞ 올라가면 유원지처럼 꾸며진 용연계곡도 볼 수 있다.
솟대·탈·부채 만들며 솜씨 겨루기
이번에는 옛사람들의 솜씨에 도전해보자.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솟대를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다. 마을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곽대진 씨(55)의 솟대 작업실 앞마당에는 체험에 참여한 가족들이 솟대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솟대는 행운과 다산,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마을에서는 솟대를 곳곳에 세우고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솟대 만들기 체험에서는 입구에 세워진 긴 솟대 대신 손가락만 한 솟대를 만든다. 곽씨는 크기를 줄이고 모양을 낸 ‘실내 장식용 솟대’를 개발해 특허를 냈다. 장식용 솟대는 둥글게 자른 쪽동박나무에 오죽(烏竹)으로 대를 세우고 그 위에 새를 얹어 만든다. 새의 몸통을 사포로 문지르고 조각칼로 무늬를 새긴 뒤 오죽에 붙이면 솟대가 완성된다.
솟대를 만들고 나면 부채와 탈이 대기하고 있다. 숲 속 원두막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색 탈과 부채, 물감이 놓여 있다.“만드는 방법이나 원칙 같은 건 없어요.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세요.” 마을 총무인 곽기탁 씨(37)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붓을 들고 저마다 예술 세계에 빠져든다. 부채에 난을 치는 아빠, ‘코피 났다’며 탈 코를 빨갛게 칠하는 아이, 무얼 그릴까 고민만 하고 있는 엄마. 가족들은 오랜만에 숨겨뒀던 예술 혼을 불태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작품이 완성된다. 직접 만든 탈을 쓰고, 추상화로 장식한 부채를 부치며 즐거워하는 가족들. ‘찰칵’ 사진 한 장 찍고서야 체험은 끝이 난다.
잊을 수 없는 창포 향과 개두릅 맛
“머리 안 감고 가면 후회합니다. 꼭 감아보세요.”
창포잎을 끓여 우려낸 노란 물이 담긴 대야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곽기탁 씨는 이렇게 말한다.
멀건 대낮에 밖에서 머리를 감으라니, 그것도 여행 와서 재미로 하는 체험치곤 좀 민망한 일이다 싶다. 망설이던 어른들이 마지못해 머리를 감겨주겠다며 아이들을 떠민다. 아이들이 머리를 감는 동안 곽씨는 창포물의 효능에 대해 설명해준다.
“창포에는 린스처럼 머리를 부드럽게 해주는 성분이 들어 있으며 비듬이나 부스럼도 없애주고 아토피에도 좋습니다. 그래서 단오에 창포물로 머리를 감으면 일 년 내내 가렵지 않다고 전해지지요.”
곽씨의 말이 이어지고, 머리를 감은 아이들이 개운하다고 얘기하자 어른들도 슬슬 “나도 감아볼까”하며 머리를 물에 담근다. 결국 가족들 모두 머리를 감은 뒤, 페트병에 담긴 창포물까지 한 통씩 챙긴다. 솟대와 부채, 탈에다 창포물까지 이 마을에선 가져갈 게 참 많기도 하다.
마을에는 4000평에 창포가 자라고 있어 머리를 감는 것 외에 창포비누 만들기, 창포 염색 등의 체험도 할 수 있다.
창포와 함께 개두릅도 이 마을의 특산물이다. 마을에는 10만 그루의 엄나무가 재배되는데, 엄나무의 새순인 개두릅은 참두릅보다도 쌉쌀한 맛이 진하고 영양도 높아 약용으로도 쓰인다. 봄에는 개두릅 축제도 열리며, 개두릅으로 만든 나물과 개두릅밥·개두릅전을 맛볼 수 있다. 또 고기의 냄새를 없애주는 엄나무를 넣은 백숙과 수육, 엄나무동동주도 별미다. 막걸리로 발효시켜 독특한 향이 나는 기정떡(증편)도 먹어볼 만하다.
강릉까지 왔는데 바다를 보지 않는다면 왠지 섭섭할 것 같다. 마을에서 차로 10분만 가면 사천해수욕장이 나오고 경포대와 정동진·주문진·오죽헌 등 명소들도 30분 거리에 있다.
사계절 내내 놀거리·배울거리·먹을거리에다 볼거리까지 풍부한 해살이마을. 어느 때 가더라도 몸과 마음이 넉넉해지는 이 마을에서 가을을 엮어보는 건 어떨까. 문의 033 - 648 - 8123, haesari.go2vil.org
글·김봉아 기자 | 사진·김현주(사진가)
출처 : 예인의마을
글쓴이 : 청산머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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