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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와집 / 김동수

 


너와집   /  김동수

 

                                                                                  

 죄라도 지었을까. 유배라도 떠난 듯 너와집은 두메에 있다. 산촌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박제일 뿐, 그 영혼을 찾으려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주가곡선(株價曲線)에서 뛰어내리고 쿵쾅거리는 세상일랑 하루쯤 버려야 한다. 도시를 벗어나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에 유랑민의 노래 몇 소절 뿌리면 좋다.

 

저만치 누가 온들 돌아오는 사람이겠냐는 듯 너와집은 무덤덤하다.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으니 허름해도 좋고, 빈틈없는 삶을 바라지 않았으니 허술해도 괜찮다며 매무시를 여미지도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이 없으면 어떻고 물 한 그릇 건네는 이 없으면 또 어떤가. 먹어보고 입어보라는 새빨간 장삿속에 넋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얄팍한 지갑 걱정이나 마음의 무장일랑 내려놓고 자적(自適)에 들어본다.

 

새끼 짊어지고 고개를 넘어 닿은 두메, 햇살 맑은 언덕에 터를 다진다. 나무를 잘라 뼈대를 세우고 흙을 이겨 벽을 쌓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을 모아 나지막한 담을 두른다. 가지 닮은 나무 둘 맞대 지게를 만들고 기다란 나무를 낫으로 툭툭 잘라 바지랑대를 세운다. 싸리나무 한 줌 묶어 어지럽게 흩날리는 생각을 쓸어내고, 수수대궁 두엇 꺾어 내면에서 재채기를 일으키는 먼지를 털어낸다. 댕댕이덩굴로 멍석을 짠 다음 그 위에

앉아 말린 옥수수 자루로 삶의 뒷면에서 자분거리는 가려움을 긁어도 본다.

 

화전(火田)을 일구면 땀 흘린 만큼 소출이 돌아온다. 지주의 횡포를 견뎌야 하는 머슴살이에 비하면 산골살이는 마음이라도 덜 고단했을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 쓰는 일도 산골에서는 재미일 터, 투박한 손맛대로 살림이 되고 소박한 마음대로 일상이 되니, 해가 뜨면 밭을 매고 달이 뜨면 길쌈 매며 자연으로 수렴되는 삶은 그런대로 살만하지 않았을까. 불 지른 산비탈에 감자 심고 수수 심던 어미아비는 평생 너와집 한 채만 이루고 밭 한 뿌다귀에 뼈까지 심었으리라.

 

사람은 가도 살림은 남아 산골살이를 말없이 전설한다. 망태·삿갓·따비·삼솔·도롱이가 세월의 더께를 쓴 채 벽에 걸려있고, 지게·써레·쇠스랑·고무래는 고단한 노동을 내려놓고 생각하는 조각인 양 깊은 침묵에 들었다. 삐걱거리는 정지문을 열자 스르릉 가마솥 소리, 토닥토닥 도마 소리,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 소리가 봉인된

부뚜막에는 아궁이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마른 솔가지를 넣고 성냥만 그으면, 모든 것이

화르르 깨어나 무성영화처럼 챠르르 돌아가고 밭 갈러 나간 화전민 내외가 먼지를 툴툴 털며 나타나 밥상을 차려 내게 수저를 건넬 것 같다.

 

너와집에서 압권은 지붕이다. 도톰한 널판을 너스레 위에 얹고 군데군데 지지름돌로 눌러놓았다. 마음이

가벼우면 숨은 그림도 보이는지, 지붕에 마치 용의 비늘 같은 음영이 어른거린다. 그래, 이 땅에 태어난 사내라면 누군들 천하를 호령하는 용이 되고 싶지 않으랴. 권문세가의 자손도 아닌, 돌담 아래 납작한 민들레처럼 낮은 운명을 타고난 사내는 갑옷처럼 무거운 욕망의 비늘을 떼어 너스레 위에 한 장 한 장 이었을 것이다.

얹고 얹힌, 저 묵직함이 위압으로 느껴지지 않음은 지붕에 무욕이 서려있기 때문이리.

 

암녹색 기와지붕이 영화를 전설하고 우람한 기둥이 권세를 떠받치는 고택에 비하면 너와집은 보잘것없다.

본디 내 것이 아니기에 돌 한 덩이 나무 한 쪼가리도 잠시 빌려 쓰다가 자연에게 돌려준 집, 너와집에는 아무개가 산자락에 들어 자적한 흔적들이 풍화에 들었을 뿐, 뼈대를 내세우거나 업적을 자랑할 증거는 어느 곳에도 없다. 만약 액자에서 가훈이 내려다보며 훈계하거나 문패가 주인의 이름을 각인하라고 한다면, 내 생각도 네모난 틀에 갇히고 말 것이다.

 

너와집에 들면 모난 대로 둥근 대로 나 또한 자연이다. 자연의 눈으로 보면 칸칸이 번호가 붙은 콘크리트

육면체는 감옥이다. 반듯하게 재단된 도시에서 규격에 묶이고 위층에 눌려 살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소음과 공해에 시달려 아토피에 걸린 일상은 긁고 긁어도 가렵기만 하다. ‘빨리빨리에 쫓겨 정신없이 뛰다보면 어느새 빌딩 그림자 길게 눕고, 회식이다 뭐다 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계바늘은 한 치 오차 없이 남은 삶에서 하루를 차감한다. 가끔 차 한 잔 들고 베란다에 나가면 영혼마저 적출당하고 박제된 사슴처럼 퀭한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한 스님이 무소유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 바람에 집집마다 무소유라는 책을 소유하고 있으나 세상에는 여전히 욕심이 넘친다. 돈 맛을 본 사람은 돈을 중심으로 돌고, 힘의 원리를 즐기는 사람은 권력 주위를 맴돈다. 가질수록 덩어리는 커지고 또 그것을 지키려 한 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니, 욕망포화의 법칙은 경제학에서 배운 원론일 뿐, 어쩌면 우리는 포화된 욕망에게 영혼까지 구속당한 채 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가볍지만은 않은 삶, 욕심이 지나치면 더욱 무거워지니 무소유는 쓸 만큼만 가지되 영혼까지 소유에 갇히지 말라는 은유가 아니겠는가.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하늘을 찌르는 빌딩, 살면서 마음속으로 집을 몇 채나 지었던가. 하지만 세상 일이 다 내 마음과 같지 않아서 또 얼마나 허물었던가. 그렇다고 인격을 허문 자리에 양심을 팔아 대궐을 짓는다 한들 꿈자리까지 행복하겠는가. 물질을 추구하다가 외려 더 귀한 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만 지향하다가 지명(知命)의 고갯마루에서 돌아보니 알겠다, 고급 차·넓은 집·비단 옷, 누구나 목표로 삼는 그것들은 몸을 편안하게 하는 도구가 될지 모르나 영혼까지 행복하게 하는 삶의 제재(題材)는 아님을.

 

산골에서는 무소유가 나를 이롭게 한다. 가질 수 없기에 다툼이 없고 늘 거기 있기에 고단한 노동이 필요치 않은 것, 곳간에 쌓아둘 수 없지만 아무리 써도 동이 나지 않는 그것들은 삶을 향기롭게 하는 제재다. 새소리, 물소리가 흐르고 순서를 잊지 않고 들꽃향기 불어오는 마음의 본향에 들면, 봄비 토닥이는 삼짇날 밤 도랑물 구르는 소리는 얼마나 간지러울 것이며 칠석날 별들의 동화는 얼마나 순수할 것이며, 시월 저녁 단풍의 탄성은 또 얼마나 붉을 것이냐. 눈 내린 설날 아침 그 눈부심은 눈을 감지 않고서야.

 

한동안 나를 묵직하게 옥죄던 상념을 풀어놓으니 저기 날아가는 새가 내 마음인 양 싶다. 장딴지 살 빼고도 모자라 뼈까지 깎아 하늘을 날 자격을 얻은 새처럼 이제는 물질문명의 중력에서 벗어나 바람 같은 자유를

갈망하나, 스스로 욕망이라는 유배지로 떠난 죄, 아직 형기(刑期)가 남은 자유혼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문짝 삐걱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노루가 줄행랑치다가 문득 멈춰 뒤돌아보고 피식 웃거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바람만 쉬어갈 뿐, 내가 떠나면 너와집에는 새 떠난 둥지처럼 그리고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짓다 만 기와집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너와집 한 채 지어보련다. 타인을 경계하는 담장을 헐면 마음이 열리고, 남을 겨누는 창이며 위압을 주는 감투며, 몸을 무겁게 하는 무장까지 내려놓으면 삶도 가벼워지지 않겠나. 산골에서 태어나 흙··나무와 살을 부대끼며 자랐기에 자연으로 삶을 짓는 법을 서툴게라도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욕심만 버린다면 너와집 하나만으로도 모자람이 없지 않겠나.

 

도시에서는 자족(自足)을 무능이라고 하지만 산골에서는 자적(自適)이다. 스스로 그런 자연으로 회귀를 꿈꾸며 다시 유배지로 돌아갈 때 나도 모르게 아라리 한 소절 읊는다. 집이야 많다만 기왕이면 너와집이로세.

(2014.8)


2014년 목포문학상 수상작



출처 : 小說 隨筆 & 삶의 얘기
글쓴이 : 野草 박정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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