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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순백속으로" 사계의 막바지 얼룩졌던 영혼 표백하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순백속으로', 사계의 막바지 얼룩졌던 영혼 표백하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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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하얀 수피가 빛을 반사하는 자작나무는 여리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그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룰 때, 수직의 강렬함은 물크러지고 순백의 경계 없는 평화가 나타난다. 자작나무숲에선 누구나 순례자가 된다.
  • 올해 첫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14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고 설해를 입었다. 명륜동 대학로CGV 지하 3층 제1상영관 K13 좌석에 앉아 눈사태를 만났다. "그는 나의 연인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워하고 있는 그는 제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나카야마 미호는 여전히 예뻤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스크린 너머 덮쳐오는 홋카이도의 눈에 비할 것이 못 됐다. 순백. 가없이 내려 쌓이는 겨울의 무구함을 표현하는 말이 겨우 그것인 것은 내 모국어가 지닌 안타까운 형편일 것이다. 이튿날, 하루가 지나도 눈앞의 새하얀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순백의 세상을 찾아가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인공 수림이다.
  • 30년 전엔 온갖 나무들이 섞여 있는 잡목림이었다. 그 이전 한국전쟁 때는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진 격전지였고, 그보다 더 전엔 수탈을 피해 숨어든 화전민들이 밭을 갈던 시간도 존재했다. 산림청은 1974년부터 이곳에 자작나무를 심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온통 민둥산이던 전국의 산에선 아카시아와 오리나무 따위로 급하게 조림사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문제점이 불거지자 조경적 가치가 높은 자작나무가 대안으로 선택됐다. 모르긴 해도 그 시절, 유럽의 자작나무숲이 지닌 우아함을 흉내 내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자작나무숲 조림은 20여년 계속됐다. 하지만 자작나무는 성장이 더디고 알락하늘소 같은 해충에 약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제 더는 나랏돈으로 자작나무를 심지 않는다.

원대리에서는 자작나무숲 조림의 마지막 시기인 1990년대 초 집중적으로 식재가 진행됐다. 직전 원대리는 큰 병충해 피해를 입었는데, 산림청은 벌레 먹은 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69만 그루에 이르는 자작나무를 심었다. 본래 자작나무는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주로 심는 나무였다. 겨울이 추운 강원도의 외진 산길을 가다 마주치는 자작나무숲은, 그래서 멀찍이서 바라본 가느다란 백색 선들의 밀생(密生)이 수십 겹의 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 원대리는 원대봉(684m)의 표면이 부드럽게 수평으로 이어지는 자리에 숲이 조성돼 있다. 자작나무숲의 새하얀 품속으로,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걸어 들어가 볼 수 있다.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 경험인지는 직접 가봐야만 알 수 있다.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개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아니, 닫아 걸어뒀던 적이 없으니 개장이라는 말엔 사실 어폐가 있다. 약초꾼들만 알던 이 숲은 사진장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은은한 단풍과 백색의 수피가 대비를 이루는 가을 풍경이 대표적인 이미지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나라에서 진입로를 정비하고 탐방로를 개설했다. 숲 속에 생태수업을 진행하는 교실을 짓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고, 전망대도 세웠다. 그러고 나서 숲을 '개장'한 것이 지난해 10월. 입장료는 없다. 하지만 입구에서 인적사항을 기록해야 한다. 새하얀 숲은 입구에서 3.2㎞ 야트막한 임도를 올라가면 나타난다.

세 개로 나뉜 숲 속 탐방로는 각각 자작나무코스(0.9㎞), 치유코스(1.5㎞), 탐험코스(1.1㎞)의 이름이 붙어 있다. 별 의미는 없다. 각 코스는 서로 겹치면서 이어져 있어 꼭 정해진 길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만큼 걷다가 숲을 벗어날 수 있다. 폐목을 잘라 길을 표시해 뒀지만 눈이 쌓이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겨울엔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흔히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는 조형물이 서 있는 곳에서 탐방을 시작한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평일이었고 오전이어서 인적이 뜸했다. 눈은 복사뼈가 잠길 정도로 쌓여 있었다. 내 다리 아래에서 나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가 없었다. 그건 고요라기보다, 수직으로 솟구친 자작나무들이 내뱉는 침묵의 덩어리로 다가왔다.

새하얀 침묵 속으로 난 길. 눈 내린 자작나무숲의 풍경이 고급 인화지에 프린트한 흑백사진 같았다. 하늘 바로 아래에서 떨고 있는 우듬지부터 신발 밑창에 눌려서 다져지며 결정의 구조를 바꾸는 얼음까지 모두가 하?R다. 천지간이 한 가지 색으로 통일돼 있는 건 아마도 황량하고 두렵다고 해야 할 일일 텐데, 그렇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순백의 색깔에 대해 갖고 있는 인간의 선험적 직관 때문일 것이다. 순백은 정결이고 지순이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 이치를 따지자면 두꺼운 미학책을 꺼내야 하겠지만, 겨울 자작나무숲에선 누구나 어렵지 않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시구처럼.

"자작나무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고은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이제 눈 내리고 나면 세상의 탁한 모습도 한철 가려지게 것이다. 밀도 높은 겨울을 만나고 싶다면 자작나무숲으로 가볼 일이다. 눈 덮인 자작나무숲 속에선 마음의 무거운 짐을 부려놔도 남에게 들키지 않는다. 거기 태초부터 타락을 모르는, 순백의 위안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행수첩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IC에서 나와 44번 국도로 갈아탄다. 38선휴게소 지나 1㎞ 정도 더 가면 원대리 자작나무숲 쪽으로 우회전하는 이정표를 만난다. 원대산림감시초소 부근에 차를 대고 40분 가량 걸어야 한다. 북부지방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36 ●자작나무숲에서 임도를 따라 1.5㎞ 정도 더 들어가면 회동마을 터가 나온다.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이다. 1963년 개교해 1993년 폐교될 때까지 단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는 원대초등학교 회동분교가 옛 정취 그대로 남아 있다. 인제관광정보센터 (033)460-2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