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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삶 귀농귀촌/귀농귀촌에 꿈을갖자

[스크랩] 젊은 영농인들의 농삿일 이야기

 

 

[한겨레] 정읍·보은의 20대 농민 5명이 사랑방에서 나눈 개방화 시대의 고민과 희망
틈새·블루오션이 많아 먹고 살만하지만 농업 전체가 죽어가는 현실에 안타까움


쌀 개방 반대 시위에 나섰던 두 농민의 죽음 뒤끝이어서 농촌은 새해를 맞고도 음울한 표정이다. 개방의 파고에 맞서 지혜를 모아야 할 정부와 농업계는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냉랭하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새해엔 ‘밥상용 쌀’까지 우리 식탁에 올라 또 한 번 격변에 휘말릴 참인데…. 한국 농업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한겨레21>은 20대 농민 5명의 사랑방 방담을 통해 한국 농업의 고민과 희망을 들어보았다. 이번 방담에 참석한 5명은 국립 한국농업전문학교(한농전·경기 화성)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로, 전북 정읍, 충북 보은에서 벼농사·축산·양잠에 각각 종사하고 있다. 인근에 모여 살며 꾸준히 교류하고 있는데다 한국벤처농업대학(충남 금산)에서 동문수학하고 있기도 해 ‘독수리 5형제’로 통한다. ‘한국 농업 수비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번 방담은 지난해 12월26일 전북 정읍시 입암면 박형용씨 집에서 이뤄졌다.

오후 2시를 조금 넘어 ‘독수리 5형제’가 모두 도착해 자리를 잡자 박형용(28)씨네 두어 평짜리 쪽방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사랑방을 제공한 박씨는 정읍에서 부모님과 함께 3만 평의 논농사를 짓고 있다. 농약은 전혀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한다. 아버지 박문기씨는 유기농 재배로 농업계에는 꽤 유명한 분이라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독수리 5형제끼리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듯, “반갑다” “오랜만이다”는 인사가 두런두런 오간 뒤 화제는 자연스럽게 폭설 피해로 옮아갔다. 정읍은 지난해 12월 호남 지역에 내린 폭설의 중심지였다. 아직도 지붕에는 눈이 시루떡처럼 두툼하게 남아 있었고, 사방에 쌓인 눈 탓에 논밭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마을 어귀 길바닥은 온통 빙판이었다.

유기농 계약재배로 두 배의 쌀값을 받다

“눈이 징그럽게 많이 와부렀다”고 운을 뗀 이는 막내 격인 김동진(24)씨였다. “첫눈이 40cm가 왔으니….” 새삼 혀를 내두르는 김씨는 정읍에서 1만4천 평의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축사 300평에 한우 8마리를 아울러 키우고 있다. 아버지가 시내에 횟집을 내면서 농사 일을 그에게 몽땅 떠맡겨 이태째 혼자 꾸려왔다.

김씨를 비롯한 독수리 5형제는 다행히 별다른 눈 피해는 입지 않았단다. 정읍에서 4천 두의 돼지를 키우는 ‘초원농장’ 운영자 유명수(29)씨도 “아슬아슬한 순간은 있었는데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유씨는 “집앞의 눈을 치우고 동네 길 청소하느라 내내 갇혀지내다시피 했다”며 웃었다. 정읍 지역에 20일 가까이 내내 내린 눈은 누적으로 2m쯤 된다고 했다..

2005년 한 해 농사는 어땠나요? 쌀값이 떨어져 벼농사는 별 재미를 못 봤겠습니다. 형용씨 얘기부터 좀 듣고 싶네요.

“우린 유기농으로 대부분 계약재배를 하기 때문에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어요. 한 해 생산한 벼 50t 가운데 40t을 (미리 계약한 대로) 남양유업에 넘겼습니다. 쌀값 폭락으로 시세는 40kg에 4만3천~4만4천원 수준이었는데, 우린 9만원 정도 쳐서 받았습니다. 예년에 시중 가격의 150%를 받은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받은 것이죠.” 유기농 계약재배를 한 덕에 그럭저럭 안정적인 소득을 올렸다는 얘기다.

한우 20여 두를 키우며 벽골제 부근 김제평야에서 아버지와 2만 평의 벼농사를 함께 짓고 있는 송화준(26)씨의 사정은 좀 달랐다. 여름 수해 탓에 벼농사는 망쳤다고 한다. “한 필지(1200평)에 80개(40kg짜리 포대)씩 나오는데, 30개밖에 못했어요. 8월에 하천 둑이 무너져 수해를 입는 바람에….” 송씨네는 생산량을 정부 수매나 공판 방식으로 소화시켰다고 하니 그다지 높은 값을 받지도 못했을 터이다.

김동진씨는 어땠나요? 농사를 전적으로 맡은 게 2년째라고 했는데….

“경험 부족으로 힘들었습니다. 물 조절을 잘 못해서 균평작업(트랙터로 논을 평평하게 고르는)을 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때 누군가 옆에서 ‘동진농법’이라고 말하자 폭소가 터졌다. 무슨 뜻이냐고 의아해하자 “‘태평농법’보다 더 태평스러운 동진농법”이라고 말했다. 할 일을 제때 않고 미뤄놓았다가 한꺼번에 해치운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김씨는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동네 어른들한테는 어린 내가 농사를 짓는 것 자체가 그저 좋게만 보이는 것 같더라”며 으쓱해했다. (이튿날 초원농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유명수씨는 “동진이가 겉보기와 달리 사실은 무진장 열심히 일한다”고 귀띔했다. 35마력짜리 뚜껑 없는 트랙터에서 밀짚모자만 쓴 채 일하는데, 여름이면 살이 쏙 빠질 정도라고 했다.)

쌀 농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이들의 사정은 좀 나았을까?

유명수씨는 “양돈의 경우 ‘돼지고기 파동’ 같은 일만 없으면 다른 작물보다 (운영하기가) 순탄한 편”이라고 밝혀 한 해 마무리를 그럭저럭 잘한 듯했다. 유씨는 전남 보성 지역의 유통업자와 연계해 녹차 먹인 ‘녹돈’을 키우고 있어 판로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충북 보은에서 누에를 치고 있는 이준기(25)씨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농사를 꾸려가고 있다. 쌀 개방에 따른 위기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양잠이기 때문일까. 이씨는 봄(춘잠), 가을(추잠) 두 차례 25상자씩 누에를 친다. 1상자에 들어 있는 누에씨가 2만 마리라는 설명에 좀 놀랐다. 뽕밭 규모는 5천 평에 이른다. 이씨의 ‘보은토종누에농장’은 누에가 고치를 짓기 전에 동결시켜 가루나 환(알약) 형태로 만들어 인터넷으로 직접판매를 하는데, 당뇨 특효약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농민대회 참가했다가 손가락 골절상

독수리 5형제의 작목이나 농사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영농 규모나 기술 수준에서 국내 농업의 평균치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대체로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경우여서 처음부터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시작한 덕이다. 전통적인 벼농사에 목을 매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쇠락하고 피폐한 영세농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겐 쌀 개방 반대 시위나 여기서 비롯된 두 농민의 죽음이 좀 다르게 느껴질까?

“기분 나쁜 건… 보통 집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같이 나가시면 강경 진압을 하지 않잖아요? 농민회 회원 중심이면 강경 진압을 해도. 이번(2005년 11월 여의도 시위)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앞두고 농민들의 기를 꺾고, 부시(미 대통령)한테 잘 보이려고 공권력을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많이들 얘기하지 않습니까. ‘5·18’ 이후 단일집회에서 2명 이상이 죽은 건 처음이라고. 대통령이 나와서 한 얘기는 진심어린 사죄가 아니고 형식적인 유감 표명뿐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농업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틀 속에서 이뤄진 강경진압이었습니다.”(박형용)

전국농민회 소속인 박씨는 지난 11월 여의도 시위에 참여했다가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아 홍콩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에는 못 갔다는 박씨 말에 누가 “수영을 못해서가 아니고?”라고 농담을 던지는 바람에 모두 웃고 말았다.

두 농민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개방은 대세라는 시각이 많은 듯합니다.

“(양돈을 하고 있어) 농사의 ‘농’자도 모르지만, (농산물은) 공산품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자연 조건이 다른 미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농작물과 맞서는 건 힘듭니다. 농산물은 먹고사는 문제이니 지켜줘야 합니다.”(유명수)

“농학개론에서 배운 대로 농업이란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 즉 ‘상생’의 원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WTO나 미국 주장은 다른 나라의 농업을 죽여 자신들의 이득을 얻으려는 ‘상극’입니다. 친환경 농업을 틈새나 블루오션, 또는 경제적 대안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보다는 농업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틈새 농업을 해서 몇몇 사람이 살아남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전체가 어우러져 함께 사는 농업이 돼야 합니다.”(박형용)

“강대국이 약소국의 농사를 흐트려놓은 뒤 식량 부족 사태가 생기면 휴대전화나 자동차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농산물은 1~2%만 부족해도 값이 폭등하는 특수성을 띠고 있습니다. 식량 안보는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유명수)

정부나 학계에서 주류를 이룬 개방대세론이 20대의 ‘젊은’ 농민들에게도 아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

식량자급률을 곡물 위주로 보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기와 과일 소비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국내에서 생산된 쌀 한 톨에는 수입쌀과 달리 많은 가치가 내포돼 있습니다. 공기 정화, 홍수 조절, 환경 보존 같은…. 이런 기능을 농산물 가치에 포함해서 봐야 합니다.”(박형용) 수입쌀과 동일한 조건(값)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건 타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켜내는 값에 상응하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씨는 “그러기 위해선 (농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며 “농민들이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폭력적인 시위는 역효과를 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농민회의 특수성이 있다고 봅니다. 정책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부에 대해 몸부림을 친 것이지요. 다만 후속타(시위에 따른 역작용) 같은 것을 생각 못한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은 듭니다.”

돼지새끼가 이뻐 농사를 시작하다

독수리 5형제는 다루는 작목만큼이나 농사에 뛰어든 계기 또한 다양하다. 맏형 격인 유명수씨는 “군 제대 뒤 아버지 일을 돕다가 새끼(돼지)가 너무 이뻐 보여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튿날 만난 유씨의 어머니 김영숙(55)씨는 “너무 힘든 일이라 말렸는데, 저렇게 주저앉았다”며 지금도 마뜩잖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송화준씨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가며 농사일에 나선 경우다. 그는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똑같은 생활은 못하겠더라”고 했다. “한국농전 2학년 때(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1년 해외 연수를 갔는데, 건초 더미를 옮기다가 허리와 목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 갔다간 중도에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질까 싶어 다리를 절면서도 넉 달 동안 이 악물고 버텼습니다.”

김동진씨는 거꾸로 부모의 권유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됐다. “부모님 말씀 들어서 손해볼 것 없다고 생각했지요, 뭐.” 동진씨의 어머니 정인숙(49)씨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10년 앞을 보고 농사를 지어보라고 했다”며 “지금도 (농사를 권유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당한 기반을 갖추고 있는 농가에서도 이렇게 부모의 반대와 권유가 교차하고 있는 데서 농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낮은 인식을 엿보는 듯했다.

한국 농업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봅니까?

“저야 먹고살 만합니다. 농업 분야에 돈을 벌 수 있는 틈새, 블루오션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틈새 농업으로 견디고 유지하는 게 농업 전체가 살아남는 것과는 다릅니다. 농업 전체로 봤을 땐 죽어간다고 생각합니다.”(박형용) 송화준씨도 박씨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 농업 기반과 기술을 어느 정도 갖춘 자신들은 버텨낼 수 있지만, 개방의 파상 공세에 국내 농업 전반적으로는 시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설명이다. 개별로 ‘희망’하고 전체로 ‘절망’하는 형국이랄까.

독수리 5형제 같은 농촌 젊은이들한테 당장 닥친 가장 현실적이고 절실한 고민은 결혼 문제다. 이미 결혼해 10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는 유명수씨와, 지난해 12월에 결혼한 송화준씨 외 나머지 셋은 아직 미혼 상태다. 농촌에선 배우자감을 만나는 일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다. 고등학교 동창과 어렵사리 결혼에 이르렀다는 송화준씨도 “결혼하기까지 애로가 많았다”고 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일은 개인적 고민인 동시에 국가 농정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농촌에 지속적으로 정착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독수리 5형제처럼 한농전 출신인 경우 더욱 그렇다. 3년제인 한농전의 학비는 전액 국비로 지원되는 대신 6년 동안 의무적으로 영농에 종사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을 농촌에 묶어두는 끈인 의무기한이 끝나면, 이들처럼 영농 기반과 생활 형편이 비교적 좋은 경우에도 결혼 문제로 농촌을 등지는 일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쌀 개방, 결혼 문제 같은 고민 속에서도 독수리 5형제의 2006년 영농 계획은 야무지게 준비되고 있다.

누에 농사꾼 이준기씨는 “판매 유통 경로를 다양화하는 것”을 최대 과제로 든다. 지금은 100%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직거래여서 중간 유통비가 없는 대신 불확실성이 높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백화점과 중·소형 할인점 진출을 준비 중입니다.” 이씨는 여기서 한발 나아가 뽕잎과 오디(뽕나무 열매)를 이용한 차나 술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의욕을 내비쳤다. 2004년 폭설 피해로 화훼 농사를 망쳤던 아픈 기억은 이미 다 잊은 듯하다. 등록 수수료도 없던 1999년에 이미 인터넷 홈페이지(silkworm.co.kr)를 개설했던 안목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2006년, 야무진 영농계획을 세우다

새 신랑 송화준씨의 새해 최대 과제는 ‘자식 농사’다. 송씨는 “적어도 셋은 돼야 한다”며 “아들이 태어나 대를 이어 농사짓기를 바란다”고 말해 모두 웃었다. 2005년 1월 경희사이버대학에 편입한 그는 새해엔 경영 마인드를 키우는 자기계발에 힘을 쏟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형용씨는 “계약재배 위주에서 학교 급식 등으로 유통 경로를 다원화하고, 임의조직인 작목반(특정 작물의 공동 생산·유통조직)을 체계적인 영농조합 법인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했다. 유명수씨는 양돈 과정에서 항생제를 덜 쓰는 방법을 모색하는 걸 숙제로 꼽았다. 유씨는 또 양돈에 머물지 않고 쌀 농사도 짓겠다는 목표 아래 논 1필지(1200평)를 평당 2만5천원에 이미 구입해둔 터다.

독수리 5형제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후배 격인 한농전 졸업생들의 농촌 현장 정착률이 90%를 웃도는 점이다. 정읍 지역에만 20~30명에 이르는 한농전 출신들이 중심을 이뤄 농촌을 젊고 건강하게 이끌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들 세대 또한 대를 이어 농사에 나서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 큰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희망 때문일지 모른다.

“아버지 말씀인데, ‘종자’할 때 종(種)이 ‘벼 화(禾)’에 ‘무거울 중(重)’자를 합친 것인 데서 보듯 종자는 충실한 알곡에서 고릅니다.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정말 ‘똑똑하고 야무진 놈’으로 농사일을 시킬 겁니다. 배우자감도 맞벌이로 직장을 다니기보다는 시골에서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하하.”(박형용)


“반대를 뚫고 오빠를 믿었어요”

간호사 생활하다가 ‘독수리5형제’ 송화준씨와 결혼하고 고향 온 박선영씨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다가…. 오빠 믿고 (시집)왔죠.”

결혼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쑥스러운지 박선영(25)씨는 ‘독수리 5형제’의 일원인 남편 송화준(26)씨를 줄곧 ‘오빠’라고 불렀다. 고등학교(김제 덕암고) 동창인 두 사람은 2005년 봄에 우연찮게 다시 연락을 하고 지내면서 정을 쌓아오다 지난 12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김제에서 태어난 박씨는 고교 졸업 뒤 인천으로 이사한 부모를 따라 고향을 떠나 간호사로 일하다가 결혼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둘이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만만치 않은 난관을 겪어야 했다. 농촌 총각과 결혼하려는 딸을 걱정하는 친정 부모의 반대 때문이었다. “직업 때문에 반대하신 거였죠. (친정 부모님이) 오빠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고. 듬직하고 (장인, 장모께) 잘한다고 지금은 좋아하세요.”

김제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는 부부는 같이 농사를 짓기보다는 각자의 길을 걷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새해에 아이를 낳은 뒤 박씨는 본래 하던 대로 간호사 일에 나설 작정이다. 이는 남편 송씨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박씨는 “농사일은 제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와서 보니 도울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더라”며 웃었다. 경제적인 이유와 영농의 기계화 추세를 감안할 때 농촌에서도 이런 맞벌이 부부가 점점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김선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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