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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마와숙녀 박인환과 하늘내린 인제

글쓴이  이상국


인제가면 언제 오나
 
이 글을 쓰는 2007년 1월, 인제에서는 빙어축제가 한창이다. 명태를 황태로 둔갑시키는 내륙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내장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빙어를 낚아 올려 초장에 찍어 소주 한잔에 꿀꺽하는 맛이야말로 겨울 정취로는 일품이다. 아무튼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얼음 위에서 차와 사람 수십만이 몰려 겨울을 즐기는 모습이야말로 강원도의 겨울이 선사하는 최고의 낭만이 아닐 수 없다. 그 축제장에서 인제 읍내로 들어오자면 인제대교를 건너 군축령을 넘게 된다. 새 길이 나기 전에는 그 군축령 정상부근에 박인환 시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내린천과 북천이 만나는 합강정 들머리로 옮겨져 오가는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거기서 차로 5분 정도면 인제읍이 나오고 인제를 지나 원통, 그리고 미시령 터널을 통과하면 길은 바로 동해에 이른다.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제대하는 군인들이 인제를 떠나며 던졌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라. 신병훈련을 마친 서울이나 특히 먼 남도지방의 장병들이 더블백을 매고 인제 양구 화천 등 최전방 부대로 들어가며 얼마나 기가 꺾였겠는가. 그러나 제대군인이 되어 첩첩산골을 떠날 때의 해방감을. 그래서 내뱉는 이 말 속에는 분단국가 젊은이들의 고통과 자조 그리고 지명이 갖는 풍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러나 길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산촌의 모더니스트

  박인환이 시를 생산한 기간은 대략 8년이고 약 70여 편의 시가 남아 있다. 문학사에서는 그를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한다. 인제라는 당시 아주 궁벽했을 산골에서 그런 모더니스트가 어떤 집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을까. 시인은 어느 날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니고 보면 누구나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21년 지금의 인제군 산촌민속박물관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외가는 대감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인제에서 공립보통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를 갔으니 강원도 산골의 감자밥과 가난이 그의 정서를 지배하기 전에 그는 인제를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덕수공립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거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해방되던 해 서울에 내려와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낸다. 그때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국제신보에 「거리」 라는 시를 발표하며 한국의 현대문학사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아무튼 지금도 수무 살에 창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멀쩡하게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차린 그 서점이 생계유지나 사업성보다는 오직 시를 쓰고 문인들과의 교류를 위해서였다니 엉뚱하기까지 하다. 어쨌든 그는 머리도 명석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던 게 아닐까.  
 나는 그의 집안 내력을 여기저기 물었으나 인제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타계 50년인 지난 해 나온 몇 권의 연구서나 문집에도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하여서는 전기적 기술 외에는 참고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남자 배우로는 험프리보카드, 헨리폰다, 쟝마레 여자배우는 엘리자베스테일러, 미셀모건, 대니 로반, 인상에 남는 영화로는<제3의사나이> <젊은이의 양지> <정부 마농> <밀회>등 이것은 1954년 신태양에 실린 박인환의 영화취향 앙케트 중의 일부이다. 국내 배우나 영화는 전무한 걸 보면 그의 서구취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산천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게, 말하자면 오세암에서 김시습은 신세모순(身世矛盾)과 세여불합(世與不合)을 한탄했고 만해는 백담 골짜기에서 님을 부둥켜안았는가 하면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를 노래했다. 인제가 쓰는 문학사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후 그곳에서는 한수산 이외수가 더 태어나고 전상국은 그 옆 동네인 홍천이 고향이고 보면 강원도 영서지방의 부드러운 산과 유장한 물 흐름은 그들의 걸출함을 편애하여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는데 주저가 없었던 것 같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사람들은 그가 태 버린 곳이 산 속이든 물가이든 그렇게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고향은 잊었지만

나는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내 고향 자랑을 해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내 고향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강원도라고 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먼저 알고 있는 것은 그 유명한 금강산을 연상하기 때문에 금강산에 비중될 수 있는 다른 자랑거리를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인제에서 태어났다. 1년에 한두 번씩 지방순회 극단이 온다는 것이 내가 자라날 무렵의 마을 최대의 즐거운 일이며 그 다음엔 학교 운동회, 이 정도 밖엔 내 고향에서는 일이 없었다. 장마철 4, 5일간 비기 내리면 춘천에서부터 산길이 무너져 자동차는 근 한 달 가까이 통행치 않아 교통통신은 완전히 차단되고, 이것뿐이랴. 말뿐인 방파제는 힘없이 파손되어 대홍수는 마을을 덮어 나는 예배당 종각 위에 올라가 우리 집은 물론, 소 돼지 사람들이 떠내려가던 것을 본 생생한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소학교 3학년 때 우리 담임선생이 간성으로 전근 되었다. 나는 근 60명에 가까운 학급생을 데리고 읍에서 한 20리나 될 관제리까지 전송을 했다. 돌아오는 길 소양강 한강상류인 마을 앞강은 오대산에 그 원천을 두고 청명히 또는 줄기차게 흐르는 맑은 강물 아래로 수 없이 생선(生鮮)이 약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날 오후 동무들과 강가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밤늦도록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를 우렁차게 부르며 돌아왔다.
 목사님이 애국가를 가르쳐주신 덕택으로 나는 8.15해방 날 그것을 외울 수 있었으나 그 분은 형무소에 잡혀갔다. 그래서 우리들은 손목에 수갑을 차고 경춘버스를 타고 떠나는 목사님을 보고 울었다. 이것은 역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일이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자랑할 수 없으나 확실히 강원도는 순박하고 순수하고 그리고 인간의 정서를 말하는 것 같다. 아니 강원도의 산은 푸르고 강물이 맑고 달은 밝다. 10리도 못 가서 물이 흐르면 울창한 원시림에서는 끊임없이 새소리가 들린다. 겨울이면 구르몽의 ‘시몽’보다도 흰 눈이 내린다. 밤이 새어 창을 내다보면 어젯밤 눈은 오랜 전설과 같이 이어 나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추위도 모르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봄이 온다. 긴 겨울을 보낸 마을 사람들은 봄이 온 것을 무한이 즐기며 산으로 들로 천렵을 나가 집을 비워도 도적을 맞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세월은 잡을 수 없고 인생은 늙었다. 나는 간성에서 기차를 타고 고성을 지나 금강산 구경을 했다. 비로봉.... 그것은 인간의 건실한 존엄성을 상징하며 외금강 고른 물결과 습립한 바위는 수난에 살던 우리들 가난한 민족의 저항하는 정신을 소리 없이 지니고 있다. 이처럼 강원도의 모든 풍물은 고난과 질곡과 박해에 억눌린 우리민족의 슬픈 정을 간직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며 이것은 즉 강원도만이 가질 수 있었던 최후적인 한국의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별로 강원도에서는 출중한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 해방 후 두 명의 장관과 차관급이 강원도 태생이 되었다. 그러나 벼슬과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저 남을 해치기 싫고 그렇다 하여 짧은 인생에 과분한 욕심이 없는 강원인의 근성을 나는 배반할 수가 없다.

민족적인 동란의 화재는 온 강원도가 받았다. 어질고 가난한 내 고향 사람은 오랜 조상이 살던 집을 포화에 살리고 양구, 화천, 금화, 고성, 춘천, 원주, 홍천과 같은 도읍은 인간이 살던 토지인가 하고 반문할 정도로 회진(灰塵)으로 사라졌다.
 얼마 전 나는 강원도를 찾았다. 내가 살던 집, 학교, 군청, 어디서 그 자취를 찾으랴. 그저 산과물은 전과 다름이 없으나 그 외 모든 것은 모진 화염에 휩쓸리고 선량한 아직 떼에 젖지 않은 사람들은 한없이 푸른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다.

 위 글은 1954년 신태양 4호에 실린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은 국토의 자랑」 이라는 제목의 박인환의 고향에 대한 소회이다. 전근 가는 선생님에 대한 석별의 정, 잡혀가는 목사 그리고 폭우. 전쟁의 상처, 이것 들이 그가 간직한 고향이다. 그가 소 돼지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예배당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던 30년대 인제와 지난해 폭우로 2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인제, 사람들 이름은 바뀌었지만 자연과 사람살이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박인환의 자리

 그가 세월은 잡을 수 없고 인생은 늙었다고 한탄한 나이가 고작 스물여덟 살이고 보면 그의 엄살은 대단하다. 혹은 인생을 그만큼 조숙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나의 박인환 문학에 대한 이해는 고작 「목마와 숙녀」「세월이 가면」 등의 도시적 소재의 낭만성이나 삶의 허무를 노래했다는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박인환 문학의 일부일 뿐이다. 그의 얼마 되지 않은 시편들 중 사회참여와 현실인식이 강한 작품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서 보면 그가 모더니즘에 경도된 모니니스트로만 이해되는 일반적인 평가는 상당한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겠다. 그는 8년간 시를 쓰고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문학사를 통틀어 만해나 김소월과 더불어 박인환만큼 국민적 사랑을 받는 시인도 드물거니와 오직 시를 위해 치열하게 쓰고 마시며 생을 경영한 시인도 흔치않다. 낡은 서정성에만 매달리거나 편협한 감상주의자들에게는 온몸으로 새것을 받아들이며 이를 실천하려 했던 그가 요즘말로 하면 튀는 시인으로 보이거나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문단에 비춰 봐도 쉬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박인환 하면 떠오르는 모더니즘 시편들이 갖는 뜻 모를 허무의식이나 진정성의 결여 등이 그에 대한 평가를 한정적이게 하는 요인인 것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가수 이름은 모르겠으나 누군가 촉촉한 음성으로 부르는 「세월이 가면」을 들으면 나는 지금도 누군가 그리워지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나도 인젠가 저런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도 있었고 보면 누군들 한때 박인환 같은 시인을 꿈꾸지 않았을까.

카페 목마와 숙녀

인제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는 산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엔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
엣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인제」(조선일보, 1956.3.11)

 50년 전의 인제나 오늘의 인제나 봄이 되면 진달래가 피고 설악산은 여전히 높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그러나 그 많이 내리는 눈과 추위와 험한 산이 이제는 우리나라의 허파이자 공원이 되었다.
 원통 지나 용대 삼거리에는 매봉이라는 높이가 1백 미터쯤 되는 거대한 봉우리가 있다. 겨울이면 그곳의 인공폭포가 얼어붙어 빙벽등반 장소로도 유명하지만 봉우리 전체에 조명을 넣어 밤에는 봉우리 전체가 기이한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이제 인제는 서울과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다. 그리고 인제에는 국가적 브랜드가 둘이나 있다. 황태와 빙어가 그것이다. 문화적 브랜드로는 만해, 박인환, 한수산 등이 또한 그렇다. 인제군에서는 장차 박인환 문학관을 만들고 그가 즐겨 드나들던 다방이나 그가 경영했던 서점 마리서사 등을 복원할 예정이라 한다. 그리고 일테면 <목마와 숙녀>라는 찻집을 만들어 박인환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쉼터로 제공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머잖아 인제에 들르면 까페 <목마와 숙녀>에서「세월이 가면」을 듣는 날이 올 것 같다.


이상국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 현재 만해마을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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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제 부동산 정보와 투자자 모임
글쓴이 : oldb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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