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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삶 귀농귀촌/귀농귀촌에 꿈을갖자

[스크랩] 봉화 비나리 송성일씨의 귀거래사

그린고추 (http://www.greengochu.com/)

 

[귀농 이야기]

 

아주 어린 시절 저는 강원도 춘천 근교의 오음리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살았답니다. 아버님이 군인이신 이유로 근무지를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강원도를 떠난 6살까지의 기억에는 온통 사방을 둘러쳐진 산과 개울 그리고 밤이면 멀리서 화전민들이 놓았다는 산불의 으스스한 풍경이 남아있습니다.

 

7살이 되던 해 우리가족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수평선 위를 자맥질하는 갈매기가 있는 진해로 이사했습니다. 그 뒤 스무 살 전후의 청년기까지 살게 되었던 진해는 진정한 저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은 결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추억 속의 풍경들을 저의 가슴속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슴속에 남아 있는 바닷빛을 닮았던 동무들의 얼굴은 꿈이 되어, 소나기를 부르는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차갑게 식어 버린 가슴에 한줄기 사랑과 온기를 전해줍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온갖 지고지순한 가치들은 물론 모든 가능한 것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다가왔던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해서 당연히도 서울과 그 주변에서 머물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중심의 주류 사회에 적응할 능력이 부족한 탓일까요. 결혼생활 10년 동안 10번 이상 이사를 다녔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가족이 살았던 많은 곳은 지금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봉천동 ,광명동 ,철산동 구철산아파트, 신림동……. 눈물겨운 도시 서민적 삶의 정감이 면면히 흐르던 그곳들은 짙은 주변적 삶의 향취를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희가 살던 곳은 이상하게도 저희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계발이라는 자본의 무차별한 폭격 속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서울 생활 근 15년 만에 저는 귀농을 결심했습니다.  저는 무척 지쳐있었고,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갈망했습니다. 이제와 뒤돌아 보니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무엇이어도 좋았고, 새로 옮길 삶의 터전이 어느 곳이라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드시 산골로 이사와 농사를 지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서울을 좋아하고, 또한 아파트 단지에서의 생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는 부정적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의미에 빠져있었고 그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무엇이 저를 그토록 지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이 저를 이곳 산골짜기까지 끌어 들였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어린 시절의 산골 정경. 이는 항상 저의 굳어가던 가슴을 다시 녹여주고, 지친 저에게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되살려 주던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이 저를 옭죄어 올 때 현실에 굳건히 맞서기 보다는 한켠으로 비켜나 도망갈 궁리부터 하게 만드는 심리적 도피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제 도피와 자발적 귀농의 경계를 긋고 싶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저는 봉화의 한 산골 마을에 터를 내렸고,그것이 도피든 자발적 선택이던 상관없이 이곳에서 생존하고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저의 귀농 결정을 몇 가지 단서를 달아 받아주었습니다. 97년 9월 광명에 가족을 남겨두고 저는 단독 귀농을 결행했습니다. 젊다는 것 하나 믿고, 그리고 육체적 노동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는 각오만 밑천으로 삼아 차드렁크에 옷가지 몇 벌과 지도책을 싣고 광명을 떠나왔습니다.

 

9월은 이곳 봉화의 주요 작물 중의 하나인 고추의 수확철이었습니다. 폐가에 작은 짐을 풀고 새벽 경운기 소리에 잠을 깨기 시작한 며칠 뒤부터 저는 밭으로 나갔습니다. 하루 품값 이만 천원. 일손이 부족한 고추 수확기에 젊은 남자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인사도 하고, 농사일도 배우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밭일을 시작했습니다. 군대 시절 가을 들녘에 농촌 일손 돕기 몇 일 나가 보았던 것이 전부인 농사 경험으로 무작정 결행된 귀농……. 모든 것이 두렵고 막막했지만 '고추 따기'로 돌파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고추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습니다. 한 보름을 품을 팔고 받은 품값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지만. 그것은 궁핍할 수밖에 없는 시골 생활을 알려주는 전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98년 저의 첫 농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8,000여 평의 땅을 임대하여 참깨와 수박을 가꾸었습니다. 첫 농사를 통해 얻은 경제적 소출은 적었지만, 나도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고 농사를 통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는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 해 초겨울 양지바른 땅에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로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99년 1월 1일 저의 아내와 딸이 이곳 산골로 들어오는 것으로 우리 가족의 귀농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산골살이]

 

산골의 아침은 멀리서 들려오는 경운기 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직은 순도 100%짜리 농부가 못되어서 일까요. 새벽 어스름과 함께 들일을 시작하는 시골 노인네들을 따라가려면 저는 아직 한참은 멀었습니다. 특별히 품을 사서 작업하는 날이 아니면 저의 일과는 딸아이의 등교로부터 시작됩니다. 집에서 교문까지는 3km를 조금 넘는 거리지만 빈 도로를 자동차가 질주하는 안동 태백간 35번 국도를 따라 아이를 걸려서 등교시킬 자신이 없습니다.

 

아이의 등교를 시키고 나면 농업용 1톤 트럭을 몰고 산등성이를 따라 형성된 밭 구비를 따라 일터로 향하면서 저는 그날 할 일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힘들고 지루한 농사일이지만 오늘하루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것을 다짐합니다.

 

산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있을 뿐 인기척이라고는 들을 수 없는 산등성이 밭에서 눈과 귀, 손과 발, 그리고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또한 그를 통해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만끽하면서 하루의 해가 다할 때까지 일을 합니다. 풀을 베기도 하고 순을 치기도 하고 그리고 고추를 따기도 합니다. 벌써 4년 농사. 이제 등줄기를 흐르는 여름 한낮의 땀줄기의 뜻도 알 것 같고, 고추가 왜 그리 매운지, 그리고 자기와의 싸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밭일을 하면서 맞는 저녁 노을의 가슴 미어터지는 서정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세상에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슬픔이 있을까요? 그것도 하루를 힘겨운 노동으로 보내고 맞는 노을이라면 말입니다.

 

한해의 농사는 설을 쇤 직후인 2월 말 고추 파종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농사철은 4월에 접어 들어 고추모종을 옮겨 심을 본밭을 준비하는 때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고추를 심고, 관리하고, 수확하고, 말리고, 그리고 농사가 끝난 밭을 치우고 정리하는 11월 초까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지도 모르게 지냅니다. 눈을 뜨면 밭으로 달려가기 바쁘고, 밭에서 돌아오면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기가 바쁩니다. 그래도 이곳 산골에선 하우스 시설재배 같은 농사가 없어 겨울 한철은 정말 한가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야지대나 도시근교의 농촌에 비해 돈벌이는 턱없이 모자라고 농사조건은 열악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을 하고, 한해의 일을 마친 뒤 겨울 내내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산골에 사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것 조차 없었다면 저는 귀농을 생각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귀농을 결심할 때 산골살이에 거는 두 가지 기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을 거라는 것과 그리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철산동에서 개봉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지옥 같은 일호선에 몸을 싣고 아침저녁으로 부댓기던 시절 저는 겁 없이 출근 없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중뿔난 재주도 돈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마냥 도망만 꿈꾸었던 셈이었습니다.

 

저에게 귀농은 차선도 아니고 단지 차악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저는 이곳 봉화의 한 산골짜기에서 내가 얻고자 했던 두가지를 다 누리며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것이 전부일 수 없습니다. 농촌에서 자꾸만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도시적 삶과 물질문명에 대한 어리석은 동경이나 맹목적인 선망이 이농의 모든 이유를 다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일정한 사회적 성취와 생활기반을 마련한 분들이 갖는 전원생활에 대한 꿈과 건강에 대한 비대해진 욕망은 자본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탐욕일 수도 있습니다. 힘든 노동과 경제적 궁핍이 지배하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전원의 아름다운 삶이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인을 밭을 매는 농부를 보고 평화와 안식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농부는 단지 허리의 통증을 참아가며 해지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산골살이에서 두 가지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골살이가 빼앗아간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돈과 자식을 교육시킬 기회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란 돈잘 버는 기술을 익히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보면 모든 문제는 돈으로 귀결되겠지요. 그렇다고 그 분들께 탐욕을 버리고 전원생활의 기쁨을 만끽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농촌은 수도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상이 만들어 주는 꿈을 꾸기 마련입니다.

 

한 마을에 두 세 명의 초등학교 학생이 전부인 이곳에서는 자연이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이기조차합니다.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자라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아이들 속에서 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 산골살이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한편에 서서 얻는 것만을 절대화하거나 잃는 것만 절대화해서는 농촌 마을을 존속시킬 수 없습니다. 농촌을 바라다보는 시각의 균형감각과 농촌과 도시의 유기적인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아직 꿈을 꿉니다. 꿈은 현실의 결핍을 반영하는 것이라구요? 하지만 어디 결핍이 없는 곳이 세상에 존재하겠습니까. 진정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일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엽니다. 찬란한 아침햇살 사이로 산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밤새 어둠과 함께 마을을 덮고 있던 안개가 앞산을 휘어 돌아 사라져갑니다. 졸리운 얼굴에 따사로운 햇빛이 와 닿고 저는 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합니다. 이 순간, 내가 한 생명으로 살아있다는 것에 크나큰 고마움을 느끼며, 그리고 저의 가슴은 존재의 신비가 주는 환희로 가득찹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도시와 농촌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생존경쟁이 완화된 부드러운 세상을, 여자와 남자, 부자와 빈자, 그리고 피부색과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대우 받고 의료와 거주, 그리고 교육이 사회적으로 보장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말입니다.

 

종교와 종교, 국가와 국가간에 조화를 이루고, 모든 개인은 자신의 취향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자유를 누리고, 개인과 사회가 더 이상 갈등하지 않는 조화로운 세상에서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그리고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고 생명과 존재의 환희가 더욱 더 넘쳐 날 것입니다

출처 : 오두막 마을
글쓴이 : 오두막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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