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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인생 쉬엄쉬엄../그때그시절 우리는..

[스크랩] 사라져가는 옛집 1호 굴피집

제목 없음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60년된 빈지골 굴피집 풍경. 왼쪽에 짚이엉을 덮은 것은 뒷간채이다.

 

지난 10년간 <옛집기행>이란 책을 내기 위해 내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옛집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땅에서 그 수가 가장 적게 남은 옛집이 바로 굴피집(살림집 3채, 굴피 통방아 1채)이었다. 아울러 사라지기 전에 보존대책이 가장 시급한 옛집 또한 굴피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굴피집은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남은 굴피집(중요민속자료 제223호) 한 채와 굴피 통방아(중요민속자료 제222호)가 유일하다. 나머지 두 채의 굴피집은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함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면 집을 양도하거나 재산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지금의 문화재 정책이 집주인을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굴피집, 결국 사라지는가


굴피집은 너와집이나 샛집과 더불어 옛날 산중에서 흔하게 지어진 집이다. 굴피는 한번 지붕을 이어 놓으면 그럭저럭 10년은 버틴다. 10년쯤 되면 다시 위아래를 돌려놓으면 되었으니, 이래저래 20년은 거뜬하다는 얘기다. 지붕에 덮는 굴피는 한 장이 보통 너비 세자(약 1미터), 길이 네자 정도인데, 14평 정도를 덮으려면 무려 지게로 스물다섯 짐(무게로 1.5톤 정도)이나 필요하다. 굴피 채피는 나무에 물이 오르는 처서(處暑) 쯤에 하며, 20년생 정도의 참나무를 벗겨서 쓴다. 처음 벗긴 참나무 껍질은 나무 모양으로 오그라들어서 얼마 동안(두어 달에서 1년) 돌멩이로 눌러서 반듯이 펴지게 한 다음 지붕에 앉혔다.

 


굴피집 추녀에서 낙숫물 떨어진다.

 

굴피를 지붕에 앉힐 때에는 밑에서부터 쌓아올려야 흘러내리지 않는다. 본래 지붕에 덮는 굴피는 눈이 많이 오면 밀려 내려오기 때문에 보통 굴피집(투비집)을 지을 때는 처마를 땅에 가까이 닿게 한다. 또 굴피가 날려가거나 흘러내리지 않게끔 5~7자(2미터 안팎) 정도 되는 지지름대(굴피 위에 질러놓는 통나무)를 질러놓고, 중간중간 20센티미터 안팎의 지지름돌(눌림돌)을 얹어놓는다. 굴피는 껍질 안쪽이 여러 켜의 해면질 코르크로 이루어져 있어, 물이 샐 염려가 전혀 없으며, 바람을 잘 통하지 않으므로 보온과 흡음(吸音), 밀폐에 효과적인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비늘처럼 이어놓은 굴피지붕의 모양새는 아름답기로 치면 집 가운데 으뜸이다.


하지만 요즘은 삼림자원보호와 입산금지 등의 규제로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굴피를 채피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결정적으로 굴피집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굴피를 벗겨낸 나무는 몇 년 후 벗긴 자리에 다시 껍질이 생겨나므로 굴피를 벗겨냈다고 해서 나무가 죽는 법은 없다. 또한 굴피집도 몇 채 없으니, 굴피집 주인에게만이라도 굴피 채피를 허가한다면, 삼림에 피해를 줄 정도는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굴피집이 남아 있는 곳은 삼척의 대이리와 신리, 대평리 사무곡, 양양의 빈지골 등이다. 삼척의 미로면 내미로에도 굴피집이 한 채 있었지만, 몇 년 전 지붕을 개량해 버렸다. 과거 대이리에는 20여 채의 굴피집이 있었지만, 화전민정리사업과 지붕개량사업 등으로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한 채만이 남았을 뿐이다.  


60년 된 굴피집의 원형 그 자체: 빈지골 굴피집


양양군 서면 남대천을 따라가 만나는 내현리 빈지골에 굴피집이 한 채 남아 있다. 이 곳의 굴피집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오늘날 볼 수 있는 굴피집 가운데는 옛 굴피집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집이다. 물론 집안 천장에는 벽지를 바르고, 나무 굴뚝이 플라스틱으로 교체되긴 하였다. 하지만 굴피를 여러 겹 얹고 그 위에 돌멩이와 나무를 눌러놓아 바람에 날려가거나 눈에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솜씨가 한결 정겨운 ‘옛멋’을 풍긴다. 부엌으로부터 삐죽 삐져나온 외양간도 역시 굴피를 해 이었다.

 


빈지골 굴피집 부엌에 걸린 성주 신체(위)와 지붕의 눈이 녹아 낙숫물이 떨어지는 굴피집 풍경(아래).

 

굴피를 채피할 때는 참나무를 생나무 상태에서 빙 둘러 껍질을 벗기며, 이렇게 벗겨낸 껍질은 한동안 돌멩이로 눌러서 펴지게 한 다음 지붕에 물고기 비늘을 잇듯 앉힌다. 이렇게 앉힌 굴피지붕에는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지지름돌과 지지름대로 한번 더 눌러놓는다. 현재 빈지골의 굴피집 부엌에는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도 모셔놓고 있다. 부엌과 안방 사이의 대들보에 걸린 이 성주는 굴피집의 60여 년 역사와 함께 한 탓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다. 굴피집 앞에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뒷간이 차분하게 짚이엉을 얹고 있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초가집으로 보인다. 초가 뒷간과 굴피집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다.


국내 유일의 굴피 문화재: 대이리 굴피집과 통방아


대이리 굴피집(중요민속자료 제223호, 이종순 씨네)은 300여 년 전 현재 이종옥 노인이 사는 너와집에서 분가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집도 처음에는 너와집이었다고 하는데, 1930년경 너와 채취의 어려움 때문에 대신 굴피를 얹게 되었단다. 이 집은 온돌방과 도장방(창고), 외양간, 봉당 등이 한지붕 밑에 있는 전형적인 겹집에 속한다. 부엌에는 불씨를 따로 보관하는 화티와 호롱불을 놓아 불을 밝히던 두둥불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이리 굴피 통방아(위)와 대이리 굴피집 부엌 천장에 걸린 생활도구들(아래).

 

굴피 통방아도 마을 앞 개울가에 자리해 있다. 이 통방아(중요민속자료 222호)는 100여 년 전 이 마을 방앗간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명 물방아, 물통방아, 벼락방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통방아의 주요 시설은 확(곡식을 찧는 돌통)과 공이, 수대로 되어 있는데, 물통에 물이 담기면 그 무게로 공이가 올라가고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떨어져 방아를 찧게 되는 원리를 따랐다. 이 통방아의 공이 위에는 원추형으로 굴피를 덮은 덧집을 만들어 놓아 주변 풍경과 어울리게 했다. 그러나 오래 전 고장이 난 상태여서 전시용이 되어 버렸다.


혼자 굴피집을 지키며 산다: 사무곡 굴피집


신기면 대평리 사무곡(士武谷)에도 문필봉 8부 능선쯤에 굴피집(투비집) 두 채가 들어서 있다. 한 채는 빈집이고, 다른 한 채는 집주인인 정상흥 노인이 오며가며 집을 돌보고 있다. 정씨는 30세 때 산 아랫녘에서 이 곳으로 올라와 손수 목수며 미장이가 되어 집을 짓고, 40여 년 동안 이 굴피집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사실 굴피집을 지켜간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굴피지붕의 수명이 20년은 된다고 하지만, 수시로 덧덮어주지 않으면 빗물이 새기 십상이다. 굴피 채피를 처서 이전인 8월 정도에 하는 까닭은 처서가 지나면 물이 안 올라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굴피를 벗길 때 너무 어린 굴참나무는 껍질이 얇아서 못쓰고, 너무 큰 나무는 억세서 못쓴다고 한다. 적당히 자란 나무라야 껍질도 부드럽고 잘 벗겨지는데, 한번 껍질을 벗긴 나무는 3년쯤 지나야 속껍질이 다시 나온다고 한다. 사무곡 굴피집은 대지 90평 정도에 세칸(두 개의 방과 부엌, 툇마루)으로 지어졌는데, 마디가 가는 산죽으로 지붕속을 하고 그 위에 굴피를 여러겹 덧덮는 방식으로 지붕을 이었다. 이렇게 하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빗물도 새지 않을뿐더러 겨울에도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다.

 


사무곡의 정상흥 노인이 굴피 지붕을 손보고 있다.

 

지붕속에 넣는 산죽으로는 댓자리도 만들어 방바닥에 깔아놓았는데, 이 또한 산중의 굴피집에서 흔히 하는 방식이다. 정씨에 따르면, 처음에는 억새풀처럼 생긴 ‘부들’이란 것으로 ‘부들자리’를 깔았으나, 1년도 안돼 썩는 바람에 10년은 너끈히 버틴다는 산죽으로 댓자리를 만들어 깔았다고 한다. 부엌에는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화티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외양간도 부엌에 맞닿아 있다. 집안 곳곳에는 설피와 씨오쟁이, 창애(덫)를 비롯해 여러 옛 물건들이 걸려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아직도 여기서는 등잔을 쓰고 있으며, 40년이 넘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물처럼 간직해오고 있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삼척 인근에서는 굴참나무 껍질인 굴피를 곡식 공출해가듯 징수해갔다고 한다. 굴피가 코르크 병마개를 만드는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정씨 또한 여러 번 굴피를 공출당했다고 한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김선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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