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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귀농귀촌/귀농귀촌 성공사례

농촌관광마을 사무장으로 귀촌한 화천 김명웅씨(1)

 

 

 









 

 

 

 

나는 잘 나가는 호텔 소믈리에(포도주를 관리하고 추천하는 직업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였다. 국내 20여 명밖에 없는 와인캡틴(winecaptain)을 속내로 자부하며 살았다. 내 이름은 김명웅, 인생의 열정이 가장 많이 뿜어 나오는 ‘서른여덟’ 남자다.

7년 동안 소믈리에로 활동했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조끼와 바지, 넥타이와 앞치마를 자랑스럽게 입었다. 와인을 시음할 때 사용하는 잔인 타스트뱅(Tastevin)을 목에 걸고 전문성과 화려함이라는 치장을 덧입혀 주목을 받곤 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인적이 드물고 고요한 산촌호수마을의 마을 사무장이다.

마을 사무장은 내겐 벅찬 직업이며, 내게 다가온 또 하나의 운명이다. 제주 신라호텔과 서울 신라호텔, 부산 롯데호텔 내의 프랑스풍 레스토랑 메트로폴리탄 클럽, 번잡스럽고 화려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내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반은 도시에서 경험했고, 인생의 나머지 반은 농촌에서 살고 싶었다. 대도시 부산이 고향인 나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할 만한 변변한 추억 하나 없다는 게 늘 아쉬웠다.

 

도시 총각인 내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건 단순한 계기였다. 내게 있어 1호 보물인 딸 혜미(8), 아들 범진(6), 그리고 서른다섯 살 아내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다. 도시에서 학교에 끌려 다니고, 성적 제일주의라는 교육풍토 속에서 내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의‘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의‘삶의 시계’는 멈췄고, 농촌에서의 삶의 시계는 다시 1초, 2초 작동했다. 내 소망과 내 삶이 정확히 일치하는 곳, 바로 농촌의 삶이 시작되었다. 내 아이들의 성장판도 도시에 찌든 교육현장에 멈추지 않고, 더 넓은 가치와 더 나은 삶이 존재하는 농촌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소믈리에가 되기 위해서 꼼꼼한 준비를 했듯 이, 귀촌 역시 차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3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전국의 유명하다는 농촌을 알아보러 다녀야 했다. 낯선 지명이던 전남 해남, 진도와 충북 영동 등을 두루 거치며 현지 실사작업을 진행했다. 다행히 농림부 홈페이지에는 많은 정책 내용과 정보들이 상세히 들어 있어 좌표설정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내 가족들을 위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는 일이기에 최선의 노력을 했고, 그만큼 신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연고도 없던 강원도 화천군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농촌 정착을 위한 탐색과정에 마침표를 찍게 된 곳, 화천군엔 동촌리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오지, 동촌리는 깨끗함과 맑음이 존재하는 공간이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내 개척자 정신을 자극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올해 3월 말 이곳에 정착하여 중풍으로 10년째 투병 중인 어머니(66세)와 함께 다섯 식구가 소박하게 새 삶의 둥지를 틀었다. 귀촌 직후인 지난 5월, 젊다는 이유로 마을 사무장에 추대되었다. 올 12월로 겨우 8개월째 되는 귀촌생활이지만, 나는 동촌리 호수마을의 최장수 마을 사무장이 됐다. 전임 마을 사무장들이 3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사퇴했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데 오지마을의 고된 업무, 지역토착민들이 외지인들에게 보내는 불신 등이 이유가 되었으리라. 농촌에서 일을 할 젊은이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