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의 시골
마장터 샛집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환경보전지역 무단출입불가> 표지판 앞에서 샛집의 식구인 개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
길은 음미하는 것이다. 더더욱 바퀴가 다닐 수 없는 조붓한 길에서는 게으른 길의 미식가가 되어야 한다. 마장터 가는 길은 바퀴가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을 잡아당기는 길. 산 사람들은 이 길을 샛령길이라 부른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은 드물어서 같은 동네 용대리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절반 이상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옛날 인제나 원통의 지게꾼들은 감자나 잡곡을 지고 이 샛령길을 넘었고, 고성이나 속초의 마부들은 소금을 싣고 반대쪽을 넘어와 마장터에 이르렀다. 그 옛날 마장터는 난장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산중장터였던 셈이다. 마장터라는 이름도 바로 이 곳에 마방과 장터가 있었다는데서 비롯하였다.
마장터로 넘어가는 작은샛령길. 바퀴가 갈 수 없는 발자국의 길이다.
길은 계곡을 따라 실낱처럼 이어지다가 이내 은밀한 숲으로 꼬리를 감춘다. 숲은 원시림처럼 울창하고, 이끼에 덮인 계곡이 이따금 관능적인 자태를 드러낸다. 곰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무섭도록 적막한 숲길. 신비가 드리운 계곡의 그늘. 숲의 영혼, 나무의 정령들에게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다.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이 숲에 때묻은 발을 들여놓아도 되겠느냐고. 다행히 숲의 정령이 가볍게 물푸레나무 잎들을 흔들어주었다. 이 곳에서 사람을 만날 확률은 멧돼지를 만날 확률보다 훨씬 낮다. 내 옆에는 낮게 깔린 적막과 적막을 적시는 계곡과 하늘에 잠긴 나무들, 숨찬 언덕과 평화, 거친 숨소리뿐이다.
마장터 한칸짜리 오두막 샛집.
과거 강원도 사람들은 숲으로 나무하러 갈 때 강원도 나무타령을 잘도 불렀다. 동네마다 노랫말도 다르고 음정도 다르지만 대개는 이런 식이다. 엎어졌다 엄나무, 잘 참는다 참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 자장자장 자작나무, 늙었구나 느티나무, 방구 뽕뽕 뽕나무. 아무래도 이런 숲길에서 불러야 제격인 노래가 나무타령이고, 음정 박자 무시하고 불러야 더 제격인 노래가 나무타령이다. 봄나무 그늘에는 피나물과 얼레지같은 노골적으로 벌레를 유혹하는 봄꽃이 천연하고, 산길을 벗어난 비탈에는 흙을 밟고 지나간 알 수 없는 존재의 발자국이 가득하다.
설악산 깊은 산중에 자리한 마장터에는 두 채의 샛집이 있다.
내내 계곡을 따라가던 길이 작은샛령을 넘어가면 이제 마장터가 지척이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의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이쪽은 활엽수가 많고, 저쪽은 침엽수가 많아서 이쪽은 녹음이 짙고, 저쪽은 숲이 훤하다. 꽤나 넓은 이 곳의 낙엽송 지대는 30여 년 전 부대기꾼(화전민)을 내쫓고 그들의 터전이었던 불밭과 집터에 새로 가꿔논 것이다. 한때 마장터에는 3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오래 전에는 장사치들이, 난장이 파한 뒤에는 산판을 따라나선 벌목꾼과 부대기꾼과 약초꾼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러다 70년대 화전민정리사업으로 마을은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다행히 쑥대밭 신세를 면한 곳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 채의 샛집뿐이다.
마장터 샛집 주인 정준기 씨가 나물을 다듬고 있다.
미시령 ‘창바우’에서 1시간 남짓 걸어서 당도한 마장터. 설악산 북쪽 한복판에 이런 숨겨진 마을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분명 이 곳의 풍경은 70년대의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마장터에 있는 두 채의 샛집에는 백승혁 씨(53)와 정준기 씨(62)가 각각 살고 있다. 정준기 씨는 약초꾼이자 나물꾼이다. 봄에는 나물, 여름에는 약초, 가을에는 버섯을 따서 생계를 꾸려간다. 그가 마장터로 들어온 것은 30여 년 전이다.
정준기 씨가 나물을 캐러 샛집을 나서고 있다.
“여가 샛령(소간령)이요. 저 인제에설라무네 사람들이 무곡(옥수수)을 싣고서 넘어오면, 저기 고성에서는 그 때 소금 굽는데서 그 소금을 당나귀에 싣고 넘어와 여서 물물교환을 해. 여기에 그 전에는 주막도 있었고, 마방도 있었어. 저기 오다 보면 낙엽송 있잖아. 거기가 그 전에는 다 밭이었어. 박통시절에 한 집에 30만원씩 주고는 다 내쫓았지.” 이런 마장터의 역사는 어디에도 기록된 것이 없다. 오로지 마장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마장터에서 30년을 살아온 오두막 샛집 주인 정준기 씨.
현재 정씨가 머물고 있는 샛집은 한 칸짜리 오두막집이다. 방안은 두 사람이 발을 뻗으면 장작 한 개비 들어갈 틈도 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오막살이다. 바깥 벽은 통나무를 쌓아올린 귀틀로 되어 있고, 나무 틈새에는 꼼꼼하게 흙고물을 발라놓았다. 이에 비해 윗집인 백씨네 샛집은 세 칸쯤으로 좀더 크다. 본채 뒤에는 뒷간과 헛간채도 따로 두었는데, 모두 억새 지붕에 귀틀집이다. 이래저래 두 명이 사는 마장터에는 사람보다 샛집이 훨씬 많다.
한국전쟁 때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녹슬고 구멍난 철모.
워낙에 깊은 산중인지라 마장터에는 아직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방에서는 아직도 등잔불을 켜고, 아궁이에서 꺼낸 불씨를 화덕에 담아 거기에 라면을 끓이고 밥을 한다. 당연히 냉장고도 없다. 개울 옆 우물이 차고 시원한 냉장고여서 김치며 찬거리는 다 거기에 둔다. 하지만 정씨는 이제껏 불편을 모르고 살았다고 말한다. 내가 불편하다고 다른 사람도 불편할 거란 생각은 최소한 마장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분명 이 문명화된 세상에 마장터는 비문명의 방식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지층연대 위에 마장터는 존재한다.
오염이 없는 마장터에는 장지뱀이 지천이다.
마장터에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전혀 다른 시간을 만났다. 1시간쯤 타임머신을 타고 와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마장터는 현실 밖의 지층연대 속에 있었다. 한동안 나는 등잔불 밑에서 연필에 침 묻혀가며 숙제를 하던 유년시절로 돌아갔다. 만일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라’는 정씨의 말이 없었다면, 나는 영영 현실로 복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작은샛령에서 만난 마장터 계곡(위)과 계곡에 잔뜩 피어 있는 피나물(아래).
샛집을 걸어나오면 갈림길에서 길은 다시 세 갈래로 흩어진다. 북쪽으로 나가면 고성군 흘리가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도원리, 서쪽으로 가면 용대리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삼거리에서 나는 천천히 내가 떠나온 현실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선가 왁자한 장사치들의 흥정소리와 비루먹은 나귀의 워낭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대체 지금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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