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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귀농귀촌/신지식농군,부농되기

농업성공스토리 (채소1)

 

 

 

안 씨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서 어렵사리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주경야독, 형설지공이 따로 없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안 씨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어린 안 씨를 사랑으로 이끈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학교가 있는 서울로 유학을 떠났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에 서울에서의 유학생활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그 어려웠던 서울의 신학생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신앙심이었다. 신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군대에 입대한 안 씨는 가족과 자신의 앞으로의 인생 설계를 다시 계획했다. 꿈꾸던 목회자의 길보다도 당장 가족의 생계와 앞날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에 대한 현실적 과제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향으로 가리라, 흙에 살리라. 비록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흙은 정직하게 답해준다. 흙속에서 진리를 찾고 싶다."

62년 제대한 안 씨는 군대에서 모은 돈과 전역비, 전별금 등을 모아 그동안 틈틈이 고향에 보아둔 밭 680평을 사들였다. 영농지도자로 나서는 첫걸음이었다. 적은 면적으로 양파와 생강, 감자를 심어 내다 팔았고, 한우와 양돈도 함께 했다.

 
 
   

안상현 씨의 근면과 성실성은 금방 드러났다. 제대 후 까까머리로 영농을 시작한 지 4년 째였던 66년, 안 씨는 농촌지도소로부터 영농지도를 받고 국내 최초로 고추 육모이식법과 멀칭(바닥덮기) 재배법을 도입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병해충 피해가 줄어들었고 비교적 깨끗한 고추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우량 품종의 고추를 선별해 낼 수 있었고 괴산 지역 기후에 맞는 특유의 고추 품종을 개발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당시 괴산의 대부분 농가가 재배하던 주품종을 담배에서 고추로 바꾸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67년부터 안 씨는 농산물 가격동향 자료를 수집 보관하면서 농산물 가격을 미리 관찰하는 등 스스로 과학 영농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갔다. 영농규모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던 70년대에는 농민 모두가 함께 잘사는 농촌 건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안 씨는 적극성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76년 8월 새농민회가 주는 종합상을 받았다. 안 씨 나이 38세,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50대 전후였던데 비해 안 씨는 젊은 영농지도자였다. 안 씨가 지역에서 영농기법을 전수하기 위해 영농시간이의의 시간에 틈틈이 농협대학과 새마을연수원 등 전국을 돌면서 한 강연에 대해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