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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귀농귀촌/귀농귀촌 성공사례

귀농한 세사람의 일터 세곳

귀농한 세 사람의 일터 세 곳
야생화체험학교, 생태 농장, 천연염색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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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긴 모습은 다양합니다. 하는 생각과 사는 방식도 제 각각입니다. 이 사람이 옳으면, 저 사람은 꼭 틀려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서로 다를 뿐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귀농인 3인의 사는 모습과 하는 일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해 도시를 떠난 사연과, 마을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려는 바람만큼은 모두 한결같습니다.

하나. 들꽃 메꽃과 함께 사는 '산청 노총각'

"1999년 이곳에 터를 잡고 1700평의 밭에서 우리 풀꽃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 들메마을에 나날이 무성해지는 잡풀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과 생명에 대해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한낱 풀 한 포기조차 삶의 희망을 한 시도 놓지 않는 끈질긴 그 무엇을 지니고 있지요."

산청 단성면 방목리 야생화 자연체험농원 '들꽃메꽃 피는 마을'의 주인 최재길씨는 박꽃을 닮은 사람, 산토끼 같은 사람이라 불립니다. 지리산 동쪽 자락의 외딴 마을에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뜰과 밭에 들어앉은 외딴 농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볕을 쬐는 그의 모습을 보니 적절한 표현이다 싶습니다.

기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엊은 네 칸 짜리 오래된 전통 농가주택에 삽니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학교를 마치고 부산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최씨가 야생화를 키우며 살고 싶어 터를 찾아나섰다가 부도난 포도원을 발견하고 인연을 맺었습니다.

올해 43살인 최씨는 혼자 삽니다. 아니 들꽃 메꽃이랑 같이 삽니다. 요즘은 옆 마을에 뜻을 같이 하는 이가 있어 '지리산자연생태학교'를 준비하느라 바쁩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가족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살면서 갚아야 하는데 곧 그런 날이 오겠죠. '무얼 해서, 어떻게 먹고 사느냐'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선택한 길인데, 여기서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네요.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체험학교를 운영해보려고요."

그렇다고 관광을 목적으로 쳐들어오듯 하는 단체 체험객들은 반갑지 않습니다. 언론에 알려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와 우리를 풀꽃으로 이어요. 이웃과 함께 아름답게 웃어요. 작은꽃 큰꽃 동그랗게 피워요."

최씨가 하고 싶은 일은 딱 이만큼입니다.

둘.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한 '실상사 농사꾼'

"올해로 여기 내려온 지 4년째네요. 귀농교육을 받으러 왔다 그대로 눌러앉은 셈이네요. 생업의 터라기보다 생활의 터로 삼은 곳이라 일하고 받는 돈도 턱없이 적고 서울의 가족과도 떨어져 있어 육체적, 물질적으로 힘들지만, 어쨌든 서울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실상사 농장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규동씨는 우렁이농법으로 농사짓기 시작한 논을 살피러 나섭니다. 이전에는 오리농법으로 짓다가 손도 많이 가고 관리하기도 어려워 우렁이농법으로 바꾸었다는 설명입니다.

농장 고추밭에는 가깝게 또는 멀게 귀농의 뜻을 품고 농사 현장 체험 겸 자원봉사를 나온 예비귀농인 셋이 묵묵히, 그러나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습니다. 넓은 농장에 비해 일하는 사람은 몇 보이지 않아 얼핏 빈 농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꽉 들어찬 충만감 같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들판입니다.

김씨가 일하고 있는 실상사 농장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실상사 앞에 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실상사 주지 도법 스님이 사찰 토지 1만 평을 내놓아 귀농전문학교를 세우고 귀농인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지금은 실상사를 중심으로 생태농장, 생태귀농학교, 대안학교, 생협 등을 아우르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마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남원시와 전원마을을 유치했습니다.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지향하는 다양한 직업의 도시민들을 20~30가구 정도 모아 태양열 난방, 미생물 화장실 등 환경친화적인 생태마을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스스로의 귀농 실험이 한국사회의 근본적 병리현상인 도시생활의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도시와 농촌을 동시에 살리는 상생운동의 작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김씨는 몸도, 마음도 산내면의 대표 농사꾼이 다 되었습니다.

하나. 솟대촌으로 귀농한 '천연염색가'

"원래는 우리 옷을 오래 만들었어요. 제 이름을 내걸고 만들 정도로 인정받는 한복 만드는 데는 자신이 있지요. 그런데 지금은 천연염색에 빠져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게 됐어요."

1996년 휴가 길에 양산 통도사를 들렀다가 우연히 천연염색 체험을 며칠간 접하고 아예 방향을 이쪽으로 틀게 되었다는 체험학교 솟대촌 촌장 강영숙씨.

"그때 만났던 누비장 인간문화재인 김해자 선생님의 염색체험담을 들은 게 잊혀지지 않아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특히 강조하셨어요. 그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바로 천연염색 일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강씨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강원도로 시집왔습니다. 원주 시내에서 한복연구원을 운영하다 지금의 원주 흥업면 매지리로 귀농해 솟대촌이라는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솟대촌에서는 작품 활동을 하는 외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천연염색은 비롯해 천연화장품 체험교육도 하고 있습니다. 한 해 두 번은 원주시립박물관에서 3개월 과정으로 시민들을 위해 여는 천염염색강좌를 맡아 가르치기도 합니다.

"사실 귀농하시는 분들이 천연염색에 관심이 많지요. 생업에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때문인데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일단 일일이 손으로, 수없이 반복해야하는 작업공정 자체가 육체적으로 너무 고됩니다.

인내심과 지구력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그렇다고 크게 돈이 되지도 않습니다. 역시 판로가 문제지요. 적당한 방법으로 염색해서 대량생산하는 회사들이 시장에 물건을 쏟아내고 있고, 생산자보다 중간에서 이익을 많이 챙기는 유통구조의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사업목적보다는 그저 좋아서 천연염색 일에 빠져든 강씨. 현실적인 어려움을 연신 토로하지만 육신에 힘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 일을 그만 둘 것 같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