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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삶 귀농귀촌/귀농귀촌에 꿈을갖자

[스크랩] 좌충우돌 귀농일기

제목 없음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

<좌충우돌 귀농일기 ①> 샐러리맨과 배달맨의 차이

 

  김지영(redoox) 기자   

 

귀농을 했다. 한 달 전 일이다. 소박하게 살고 싶었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평수 큰 아파트를 얻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싶지 않았고, 고급 승용차를 사기위해 가족들과의 살가운 시간을 포기하기 싫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광포한 경쟁'이란 괴물의 손아귀에 끌려 밤늦도록 학원을 전전하는 것은 더군다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냥 내 삶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슴이 따뜻하고 선 한 사람들과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긴 했지만 욕심을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머리 좋고 운도 좋은 내 또래의 어떤 사람들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저 푸른 초원위에 하얀 집을 지어 놓고 행복하게 살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2년을 준비했다. 우연히 찾아낸 교육생태마을에 입주허락을 받고 함께 살기 위한 마음준비를 한 기간이 2년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오늘은 오늘의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하여간 불과 한 달 전 나는 샐러리맨이었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중소기업의 기획행정실 차장이 당시의 내 직책이었고 집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었다. 아내와는 막대한 주거비와 생활비를 벌충하기 위해 맞벌이를 해야 했고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 중 변함없는 것은 아이의 학년일 뿐 다른 모든 것은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나는 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둔철산 자락에 있는 유정란 농장의 배달원이 되었고 내 직책은… 그냥 배달원이다. 혹은 계란 아저씨이기도 하다. 집은 둔철산 너머 갈전리를 지나 더 이상 길이 없는 산 중턱에 있고 아내는 그토록 원했던 아침잠을 실컷 즐기며 그토록 원했던 전업주부로 아이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아이에게도 큰 변화가 있는 셈인데 먼저 사는 곳이 달라졌고 학교가 달라졌고 함께 공부하는 학급의 학생 수도 40명에서 8명으로 달라져 있다. 또 중요하게 달라진 한 가지는 인터넷이 상당히 느려터진(사진 한 장 뜨는데 걸리는 시간이란…) 이 곳 마을에서 아이의 놀이 감이다. 맞벌이 부부의 아들로서 오로지 위안을 받았던 인터넷 게임이 이곳에서는 불가능하다. 간신히 텍스트들은 읽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지만 아이는 풀어 키우는 개들과 흙이 있는 마당과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지붕으로 인터넷 게임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쩔 수 없이…, 책을 많이 읽는다. 물론, 학원은 다니지 않는다.

텔레비전도 유선전화도 없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서울에서 상상했을 때처럼 그렇게 적조하거나 따분하고 심심해서 미칠 것 같거나 혹은 의미 없는 일상들이라면 내가 이 글을 쓸 일이 없을 거다.

텔레비전도 유선전화도 인터넷도 잘 안 되는 곳에서의 일상들은 대신 다른 것들이 채워지게 되어있다.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곧 반짝이는 신발이 생기거나 맨발로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처럼….

그 이야기도 나중에 하기로 하자. 오늘은 오늘의 주제에 충실해야하니까. 어쨌든 나는 샐러리맨에서 배달원이 되었지만 그 일이 그리 순탄하거나 만만하지만은 않다. 하루 종일 아침나절부터 초저녁어름까지 길과 아파트들을 배회하는 일은 먼저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대량납품이란 쉬운 선택을 버리고 직접 직거래 회원들을 찾아다닌다는 보람이 없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뽀대(?)나는 위치에 뽀대나는 건물 지어놓고 뽀대나게 파는 물건들의 우수리는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말로 눈물 나게 불공평하다. 귀농자들이 고달픈 직거래를 하려는 철학적인 이유들은 차치하기로 하자. 다만, 직거래는 소비자나 생산자 입장에서 보면 단순계산으로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또한 주제에서 빗나갔으니 접어두기로 하자.

어쨌든 세상에는 뽀대나는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 사건이 있었으니 지금부터는 눈물 젖을 손수건 한 장씩 손에 쥐고 읽어주기 바란다. 때는 바야흐로 며칠 전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모니터 바라보며 받아냈던 수입을 절반으로 동강내며 달려든 이 뜻 깊은, 지금은 내 가족의 온전한 생활비가 되어주는, 더군다나 치사하게 왜곡된 자본주의 시장질서의 대안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이어주는 사회적으로도 대단히 엄중하게 취급되어야 할 배달 일을 하는데 그렇게 길과 아파트를 넘나들고 있는데….

저기 가까이서 누가보아도 모자임에 분명한 사십이 넘었을까 말까한 그러나 처녀티 물씬 풍기려는 옷을 입은 엄마와 초등학교나 갔을까 말까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아들이 정답게 길을 걸어와 나와 마주친 직후의 일이다. 나는 어느 아파트 입구에서 차를 주차하고 10개짜리 포장으로 12개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지나치고 있었다.

그 때는 점심때가 막 지난 무렵이라 게다가 장마 철 답지 않게 해가 쨍쨍했던 때라 길거리에서 그대로 받아야했던 작렬했던 햇빛과 그로인해 흘러나온 더운 땀과 그로인해 발생한 그리 탐탁하지 않은 냄새들까지 뒤섞이면서 그야말로 몰골이 추레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겠지만….

지나치면서 들려왔던 그들의 대화내용이 이러했다.

"엄마! 저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야?"
"응. 계란 배달하는 사람이야"

여기 까지는 좋았다. 친절한 엄마는 분명한 사실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좀 더 설명이 필요했는지 친절한 엄마는 굳이 안 해도 되는 설명을 덧붙였고 굳이 내 귀에 까지 들릴 필요가 없었던 설명은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너 근데 나중에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 알았지?"
"응."

이어지는 몇 마디의 말들이 더 있었지만 내 기억 속의 대화내용은 여기까지다. 그 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겠지만 좌우간 나에게 더 이상 그들의 대화내용이 들려올 리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서 등을 타고 발끝까지 이만볼트쯤 되는 전류가 후다닥 흐르고 지나가버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귀농까지는 좋았는데 아이들이 닮지 않아야 될 좋지 않은 직업을 가진 인물의 표상이 된 것만은 영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만약 이들 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친절한 엄마는 차치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에게 "얘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직업 이란다"라는 상당히 뽀대나는 설명을 해주어야만 되는 것은 아닌지 그걸 말하려면 말쑥한 옷차림과 상쾌한 스킨냄새가 코를 간질이는 뽀송뽀송한 몸가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잠시 숙고할 필요는 있겠지 싶다.

하여간에 나는 허름한 면바지에 구멍이 송송 뚫린 팔천 원짜리 조끼를 입고 끈을 바짝 졸라맨 운동화를 신은 채 한동안은 산청에서 가까운 J시의 아파트촌을 누빌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은 상당히 행복한 편이다. 적어도 샐러리맨 때보다는 더 그렇다는 것이다.

 

귀농, 가출 먼저 하고 시작해 볼까?

<좌충우돌 귀농일기②> 아내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당신에게'

 

  김지영(redoox) 기자   

 

 

▲ 아내와 아들의 꼭 잡은 손.

 

ⓒ 김지영

 

그래도 '귀농일기'라는 단어를 쓰려면 한 십여 년 정도는 묵은 후에 시작하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니겠냐는 선배의 조언이 진작부터 있었다. 당근 인터넷이든, 종이신문이든, 잡지든 간에 시골생활에 대한 애환들을 풀어쓰는 분들의 내공을 보노라면 역시 보통 세월은 지나간 후에라야 가능한 일인 것도 같았다.

시골로 내려온 지 한 달을 갓 넘긴 내가 감히 '귀농'을 입에 올리는 것이 혹여 장구한 세월을 먼저 살고 계시는 선배 귀농인들에 대한 예의도 예의려니와, 자칫 설익어서 떫거나 신 내 나는 풋과일을 사람들에게 내놓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떫고 신 내 나고 어설픈 이야기일망정, 혹은 굉장히 우울한 현상이겠지만 귀농을 실패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할 상황이 발생할망정,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겠지 싶다. '이렇게 하면 귀농을 실패한다'는 전형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면 '이런 사람은 귀농을 조심해라' 정도의 모범적인 사례가 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한참을 더 고달파봐야 하는 시골생활이지만, 그 실패와 성공의 기로에 서기에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귀농을 2년여 준비하고, 실행하고, 마침내 귀농을 하고, 다가올 미래에 제대로 착근하기까지 그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나의 삶의 모습이 혹시라도 마음 한 자락에 '귀농에 대한 꿈과 희망'을 단단히 여미고 계시는 분들에게 도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포부를 굳이 밝히고 넘어가야겠다. '이런 사람도 귀농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내가 귀농을 실행하기 전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피드백은 첫째 '부럽다', 둘째 '존경한다', 셋째 '그런데 나는 못하겠다'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첫째가 '부러움'이었던 걸로 보아 나의 '귀농일기'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듯싶다.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인간이 하고 싶어하는 가장 최상의 선한 의지로 취급하고 있음을 꿰뚫었다. 그런 이상, 그 선한 의지들이 실행에 옮겨지거나, 혹은 셋째 '나는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분들에 대한 대리만족을 제공하는데 내가 기여할 수 있다면 나 역시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아시다시피 귀농을 하는 것 자체가 인생을 바꾸는 일이다. 더군다나 귀농 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만도 크나큰 행복으로 여겨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복으로 알지 못하고 그보다 더한 행복을 찾아 나섰다. 이것에 대한 어리석음의 결과를 치환시킬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귀농을 결심하고 결행한 나의 미래에 대한 좋은 전망일 것이다.

내가 그런 어리석은 결심을 하고 나서 결행까지 가장 먼저 부딪쳐야 할 벽은 '아내'였다. 나는 도시에서 나서 자라고 결혼했으며, 시골이라고는 단 한 달도 머물러 본 일이 없었다. 이런 나와는 달리 아내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다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 도회지로 나왔다. 아내는 그래도 방학 때면 착실히 부모님 댁에 내려가 농사일도 제법 돕기도 했다. 그런 착실한 여덟 남매의 막내딸이었던 아내는 그래서 더욱 질색할 일이기도 했다.

아내의 머리 속에는 '농촌은 지독한 몸 고생에 비례해 지독하게 돈은 벌리지 않는 지독한 곳'이란 생각이 남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 단 한 번이라도, 꿈에서라도 내가 시골로 내려가 살 것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시골에 대한 동경'만은 결코 꿈도 꾸지 않았던, 그야말로 전형적인 '강남 아줌마'였던 것이다.

'내가 찾아냈던 생각공동체 교육생태마을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할까?', '아이의 미래에 대한 좋은 교육의 본질을 따지고 들까?', '우리 가족의 현실과 진정한 행복에 대한 탐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논의를 먼저 시작할까?', 아니면, '가출 먼저 하고 시작해 볼까?' 등 아내에게 어떻게든 귀농 문제를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직접 말을 던지는 것보다 진심이 담긴 편지가 오히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편지를 썼다. 2년 전의 일이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과 나, 백일도 채 지나지 않은 선웅이를 안고 시작한 서울 살이가 어느덧 만으로 육년이 넘어가 버렸소. 그 육년이란 시간조차도 그냥 흘러가 주진 않았고, 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신이 그 동안 남몰래 흘려보냈을 눈물과 한숨들을 기억한다오. 물론,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이 항상 있어 왔음을 또한 생각하오.

우리가 살을 섞고, 피를 나눈 가족으로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이 결코 많은 저축통장과 넓은 평수의 아파트만으로 재단되지 않는다면 행복했고, 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오. 내가 일시적으로 돈의 쪼들림과 생활의 궁핍함을 원망하고 한탄해 본적은 있었지만, 보다 더 큰 행복의 가치를 당신과 선웅이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소. 당신도 이 부분만큼은 잘 알고 있겠지만….

선웅이가 벌써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버렸소. 참으로 기특하고 뿌듯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권에서 척박한 교육시스템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만큼은 많은 걱정과 우려가 있다오. (중략) 교육의 문제는 선웅이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고 앞으로 펼쳐질 선웅이의 인생을 가늠할 만큼 절대적인 문제라는 거에 대해서 나는 지나온 나의 선험적 결과를 바탕으로 심각하게 생각한다오.

(중략) 과연 2004년 지금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했지만 이곳 서울하고도 강남권 학교들의 혹은 도시학교들의 교육시스템은 얼마나 변화하고 발전했는지를 생각하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오. 지금도 학생들은 성적으로 줄 세워지고, 학교 내든 외든 폭력 앞에 무기력해지고, 폭력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지고, 일부 자격이 없는 선생들의 횡포와 극성학부모들이 빚어내는 이기적인 그릇된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오.

선웅이가 바르게 자라고 착한 심성을 유지하고 잘하는 것을 개발하고 못하는 것을 수정하는 좋은 교육을 지금 현실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도 할 수 없겠지만, 이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대단한 노력과 특별한 행동들이 수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하여, 아직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공교육 시스템은 선웅이에게 전반적으로는 좋은 교육환경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오.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선웅이가 공부를 잘하고, 서울대학을 들어가는 교육을 받는 것보다는 참된 사람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자아를 개발하고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의 의미를 알아 가는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게 바램이오. 그런 의미에서 선웅이에게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라오.

이제 우리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나는 당신이 익히 알다시피 좋은 학벌도, 좋은 재주도, 좋은 집안환경도 갖추질 못한 사람이었소. 지금 역시 그런 측면에선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은 아니라오. 다만 더 많이 소비할 수 없는 경제적 상황을 이어가고 있고 더 많이 가질 수 없는 취약한 자본상태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오.

우리는 매달 현금으로 기백만 원이 넘는 돈을 벌지만, 그 중 태반은 서울시 서초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금융비용으로 쓰이고 있고, 또 나머지는 더 많은 평수의 주택을 얻기 위해(그것이 편리함과 무시당하지 않는 위안을 주는 것 말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 말고 정작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더 많은 최신식 전자제품을 사기 위해 쓰여지고 있는 현실이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루 중 세 식구 함께 호흡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서너 시간으로 줄여야 하고, 선웅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의 많은 부분을 만화영화에 할애할 수밖에 없고, 주말에나 기껏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여가 시간들을 보내고, 서점에서 9000원짜리 책 한 권조차도 30분을 갈등하고 고민하며 구입해야 하는 등 많은 인내와 현실적인 어려움들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오.

나는 이 모든 것이 더 많은 소비만을 추구하게 하고 더 많은 편리함만을 요구하는 도시적 시스템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오. 이 건조하고 삭막한 도시는 끊임없는 욕심을 가져야 하고,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경제만으로 판단해야 하고, 이 도시에서 인정 해주는 학벌과 재산과 극한 경쟁에서 인정사정 없는 우위를 학보한 사람만이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오.

(중략) 처음 서울에 올라와 내가 가졌던 꿈은 우리 세 식구 마음 편하게 부대끼고 누워 잘 수 있는 전세 칸 마련이었소. 하지만 그것을 이루고 나자 집을 가지고 싶고 집을 가지자 이제 살고 있는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그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연스러운 원초적 욕심이라고 하기엔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소.

우리가 반 농담으로 늙어 시골 가서 살자고 말하던 것이 기억나오? 나는 그 말을 진지하게 했었고 당신 역시 그저 하는 소리만은 아니었을 것이오. 지금 우리가 소비적인 삶을 위해 지불해야할 인생의 가치들을 생각하면 시기는 가능한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오. 시골에서의 삶은 지금과 같은 많은 돈을 벌게 하진 않지만 적어도 당신이나 내가 포기해야하는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되돌려주긴 할 거라는 결론이오.

물론, 편리함을 포기하는 이상 육체적 노동과 삶의 불편함 들이 당장 앞서겠지만 조금만 욕심을 포기하고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면 오히려 인생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라오. 시골에서의 삶을 이상향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소. 그곳에도 예측 할 수 없는 어려움들과 불편함들이 불거져 나오겠지만 도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긍정성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오.

여보! 솔직히 지금 내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곳 직장이란 곳도 그리 안심할 상황은 아니오. (중략) 도시의 샐러리맨들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비루한 상황들을 십분 감안한다 하여도 남은 내 인생의 소중함을 생각하면 조금 더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 가족들에게 마음으로부터 평안하게 대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찾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오.

조금만 욕심을 버리고 살 수 있다면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소. 같은 노동력으로 비록 얻을 수 있는 재물은 적어도 편리함을 쫓지 않고, 불필요한 비용을 아낄 수 있다면 시골에서의 생활도 부족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오. 다만 우리 세 식구의 남은 인생을 가늠할 만큼 중요한 결정들이니 만큼 신중한 접근과 판단이 필요는 하겠지만, 당신과 원칙적인 공유가 필요할 거라는 판단에 이 글을 쓴다오.

선웅이의 인생을 위해 당신과 나의 인생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오.

2004년 12월

 

 


지극히 사적인 편지이기 때문에 관계자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거친 표현들이 보일 것이다. 아내에게 절박한 심정을 호소하기 위한 약간은 침소봉대하고 있다고 치부하시고 이해를 바란다.

하여간 이 편지는 작성한 날 아내에게 이메일로 발송했다. 그날 저녁 아내는 약간의 두려움과 당황함이 섞여 내게 '교육생태 마을'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읽어보니 상당히 어색한 문장들이 더러 섞여 있지만, 내가 이것을 그래도 끝까지 간직해야 했던 이유는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장이 바로 상기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문장의 유려함을 떠나 말보다는 글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때가 있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이 많은 사이일수록 더욱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많다. 아내는 지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귀농 후, 한 일년 푹 쉬고 싶었는데...

<좌충우돌 귀농일기 ③> 행복한 쓰리잡 인생

 

 

▲ 우리 가족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기숙사 2층방

 

ⓒ 김지영

 

“귀농 하면 한 일 년은 푹 쉬어라. 육 개월 정도는 도시에서 묻어온 몹쓸 독을 빼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필수적으로 지켜라. 빈둥빈둥 방안에서 뒹굴기도 하고 하릴없이 이곳저곳 다녀도 보고, 가족들과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정말로 살이 닿는 시간들을 가져라. 여행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워커홀릭이다.

인정을 못하는 사람도 본인만 모를 뿐, 다 그렇다고 보면 된다. 정말 자신이 지독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세상이 왜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사랑하는 시간보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더 가치 있게 보는지를 역설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필요한 만큼 일하고 살 수 있다. 마음 속으로 가지고 싶은 것들 중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만 빼면 되는 일이다. 가지지 않아도 지금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은 육 개월은 구체적으로 먹고 살 것들에 대한 계획들을 세워라. 시골에서도 잡(job)은 잡아야 한다. 작물이든 짐승이든 말이다. 아무리 소박한 살림이라 해도 분명한 밥벌이는 있어야 한다.”

잘 아는 귀농 선배가 작년에 내게 던져준 충고였다. 선배의 조언을 충실히 따라야 했지만 나의 까칠한(?) 경제는 일 년 푹 쉬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교한 도시시스템을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서울에서의 대차대조표는 겨우 당기 순이익을 약간만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땅과 집을 마련하고 나면 그야말로 나의 경제는 유동성 부채를 끌어와야만 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돈 벌면 귀농 하겠다는 분들께서는 이 대목을 유념하시길 바란다.)

어차피 나는 서울공화국에서 퇴출되어야 할 변변치 못한 CEO였던 셈이다. 그럼 집과 땅을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것은 변변치 못한 CEO들의 일관된 대답이면 족하겠다. 해 볼만큼 해봤다. 줄일 만큼 줄여봤다.

 

▲ 귀농 직후 시작한 유정란 배달

 

ⓒ 김지영

내가 사는 마을은 아직 완성된 마을이 아니다. 올해 말이나 가야 어느 정도 기반시설 공사와 현재 입주가 예정되어 있는(나처럼 전국의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오매불망 이 마을로의 낙향만을 학수고대하는) 21가구 중 8∼9가구가 올해 안에 완전한 이주를 계획하고 있는 진행형 마을이다.

무슨 마을인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해 드릴 수 있다. 오늘은 나의 경제 이야기가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은 마을 안에 들어서게 될 (대안)학교의 기숙사 건물이다. 집은 9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하여간, 난 결론적으로 돈에 있어서만큼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아내는 내가 혼자 서울에 남아 한 일 년 회사생활을 하면 적어도 한참동안은 돈걱정 없이 살 거라며 은근히 국내산 기러기아빠가 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아내와 아들 없는 서울살이는 애초에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그 기간의 길고 짧음을 떠나서 말이다. (회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곳이다) 그럴 거면 회사에 독하게 달라붙어 정년퇴직하고 전원생활을 하지 아직 한창 나이에 귀농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돈은 이제 나에게 중요한 삶의 가치는 아니었다.

나는 그만큼 아끼고 줄이면 가능한 일이라고 항변했고 아내 역시 ‘가족들은 흩어지면 안 된다’는 삶의 철학을 놓지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부유하는 기러기를 면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시골로 내려왔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잘한 선택이다.

그러나 시골로 내려왔지만 서울에서 번 돈은 반 토막이 더 나버렸다. 이것은 한 편으로 우울한 일이긴 하다. (예정된 일이기도 했지만) 내려오기 직전에 구해진 유정란 배달 일은 일당제다. 그나마도 일주일 중 월요일과 목요일만 한다. 나머지 날은 선배의 권유대로 놀면 될 일이기도 하지만 그건 이미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래서 마을 공사 일의 현장잡부를 시작했다. 이것도 일당제다. 잡이 두 개인 셈이다. 이름하여 투잡이다.

 

▲ 요즘 내가 두번째로 시작한 일이 삽질(?)이다.

 

ⓒ 김지영

오랜 세월을 에어컨 밑에서 일하다가 8월 땡볕 아래서 작업화와 소매가 긴 셔츠를 입고 고된 노동을 한 지 며칠이 지났다. 써보지 않은 근육에서 발생하는 피로의 문제도 문제지만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지 못한 이 피부가 말썽이다. 몸 구석구석에는 땀띠가 생긴 지 오래고, 긴 노동이 끝난 후 샤워를 마치고 나면 연고를 구석구석 발라야 하는 처지다. 자연의 이치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에는 나쁜 점과 좋은 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법이다. 거친 노동 뒤에 오는 후련함은 가파른 산자락을 힘겹게 올라서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비유될 듯하고, 육체 노동을 통해 얻는 약간의 돈과 머리를 쥐어짜서 얻는 과분한 돈의 상관관계가 보여지는 듯도 하다.

출퇴근을 위해 하루 서너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고, 건조한 조직생활의 이면을 살펴야 하는 일도 없다. 바쁜 회사 일로 잠든 아이의 얼굴만 보아야 하는 안타까운 일도 없고, 다른 즐길 거리들이 없어 먹고 마시는 일에만 몰두할 필요도 없다.

밥먹듯이 하는 수당 없는 야근도 없고, 부당한 업무에 무작정 따라야 하는 비겁함도 없고, 상사에 대한 지극히 형식적인 예의와 후배들의 싸가지 없음에 절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함도 없다. 일하기 싫으면 일당만 포기하면 끝이다.

 

▲ 귀농 후 읽은 책들이다. 저녁시간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 김지영

하여간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없는 시골에서는 밤이 되면 그야말로 깜깜하고 적막하다. 온전히 낮과 밤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로등도 없는 이곳에서 밤이 깊으면 자는 일 말고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리고 사람은 밤이 되면 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밤에 일찍 자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초등학생도 아는 이 단순한 이치를 나는 시골로 내려와서야 깨달았다. 내 나이 마흔 하나에 말이다. 왜 서울에서는 일찍 자도 늦게 일어나야 했는지는 이제 어렴풋하게 알 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참 길다. 긴 시간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지금이야 이른 아침부터 일터로 나가야 하지만 초저녁 일을 마치고 나면 남는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의 것이기도 하다. 단순하지만 행복한 노동은 그런 시간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원천이다.

작물을 키워내는 일이나 혹은 짐승을 길러내는 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하다. 어차피 뿌린 대로 거두어내는 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 불로소득은 없다. 일한 만큼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일생을 그렇게 살고 싶다. 불로소득에 대한 염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살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는지를 단순한 노동을 통해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 몽식이, 개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은 아들의 귀농결심에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 김지영

그래도 까칠한 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아직은 2% 부족하다는 아내의 현실적인 고언을 받아들여 지금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내 옆에 없다. 얼마 전 아들과 함께 일본 L사의 주재원으로 있는 마을 주민 집에 놀러갔다 오기가 무섭게 역시 아들을 데리고 친정 나들이를 갔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 내내 밥벌이를 함께 해야 했던 아내는 귀농하면 한 일 년 푹 쉬어 보라는 선배의 충고를 나 대신해서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부족한 2%를 메우기 위해 자정을 넘기도록 노동에 지친 몸을 눕히지도 않고 바탕체 10포인트로 A4 3장째를 쓰고 있는 나를 홀로 남겨두고 말이다.

하여간, 이걸 잡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생나무만 아니면 작든 크든 돈이 생기니 시골살림에 잡이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관계로 일하기 싫어 선택한 귀농인데 어찌하다보니 투잡도 모자라 쓰리잡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맺고 싶으나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지금 남쪽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실루엣으로 비추는 소나무 사이로 노랗고 동그란 달이 정확히 걸쳐 있다. 가끔 밤을 가르는 새 소리가 들리고 엷은 구름은 달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날 고향집 부모님 곁에서 행복한 꿈에 젖어 잠들었을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제갈공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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