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경아 기자] 5년 전 어느 날,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오래된 배낭 하나만 달랑 든 채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 귀농전문학교에 입학을 했다. 거기서 농사기술을 좀 배우고 나면 어딘가 허름한 빈집이라도 얻어 혼자 살아볼 작정이었다.
그 당시 나를 지배했던 것은 '자급자족'과 '자발적 가난'이라는 두 단어였다. 남들은 제대로 겉멋이 들었다고 혀를 차고 걱정의 소리를 해댔지만, 그때 나는 월든 호숫가의 소로우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빚지지 않고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깊이 믿고 있었다.
자급자족의 삶을 찾아 귀농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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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해서 처음 살았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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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정경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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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이 없었다. 빨리 떠나고만 싶을 뿐. 서울을 떠나야만 내 막힌 숨통이 트이고 닫힌 사고가 열릴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도무지 앞날이 내다보이지 않는 내 인생의 바닥이었던 것 같다.
귀농은 확실히 내 숨통을 터 줬다. 당시 미혼이던 내가 귀농학교 교사이던 남편을 만나 3개월 만에 결혼까지 했으니 말이다. 사실 미혼 여성 혼자 귀농할 수 있을지, 사례도 자신도 별로 없었는데 다행히 지혜롭고 일 잘하고 생각이 같은 남편을 만나 산골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이곳에 귀농해서 이루어진 커플이 30쌍을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스개로 도법스님이 중매장이라는 소리도 하는데, 아마도 생각이 같기 때문인지 짝이 잘 이루어지는 듯하다.
처음 정착한 곳은 귀농학교 인근에 있는 상황마을이었다. 10년간 비어있던 흙집을 무상으로 빌려서 고쳐 살았는데, 불 때는 아궁이에 물을 끓여서 설거지를 해야 했고 화장실도 재래식이었다. 아파트에서 생활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아마 시골에서 살게 되면 당연히 그렇게 사는 걸로 믿었던 듯하다.
밤과 낮을 뒤바꿔 생활했던 도시의 습관이 채 벗겨지지 않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불면증과 변비가 없어지고 까맣게 죽어가던 발톱이 살아나며 건강도 회복되었다. 규칙적인 식사와 적당한 노동, 게다가 문만 열면 파란 하늘에 건강한 산과 나무들을 대하게 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다.
첫 해 농사 수입 총 80만원 그러나 첫 해 농사를 짓고 나서 농촌 생활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젊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마을 분들이 좋아하긴 하지만, 귀한 농토를 선뜻 빌려 주지는 않는다. 겨우 얻은 것이 논 다섯 마지기와 묵은 밭 400평. 다섯 마지기라지만 다랑이가 열두 개나 되는 옛날 논이라서 경운기가 못 들어가는 데도 있었다.
괭이로 파서 모내기를 하고, 장맛비 속에서 우비를 입고 김을 맸건만, 하필 그 해에 태풍 매미가 몰아닥쳤다. 일주일간 내리던 비가 그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논에 가보니,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 같았다. 산사태로 여기 저기 흙더미가 쌓여있고, 계곡의 물이 넘쳐서 논둑은 다 터졌다. 벼는 쓰러져 흙속에 묻혀 있고.
결국 그 해 쌀농사는 반타작도 안 되었다. 쑥대밭을 개간해 심은 고추도 바이러스 때문에 한두 포기 씩 죽어나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어찌나 허탈하던지, 그 이후로 고추는 절대 안 심겠다 작정했는데 올해 또 천 포기를 심었다. 올해는 잘 되겠지 믿으며. 그렇게 해서 귀농 첫 해 농사 수입이 모두 80만원이었다. 도시인의 한 달 월급도 안 되는 돈이다.
첫 술에 배부르겠느냐고 하긴 했지만 충격이 컸다. 농촌 또한 자본주의 사회 인지라, 돈이 하는 일이 많았다. 농기계나 도구들을 구입하는데도 초기 투자비가 적지 않게 들어가고, 당장 먹을 것은 사서 먹어야 했다. 결국 그 해 모자란 생활비는 남편이 집짓는 현장에 일당잡부로 나가면서 채워야 했다.
농사만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나요? 귀농해서 산다하니 열이면 열이 물어보는 것이 "농사만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원래 농촌 출신이라면, 비록 혼자 사시는 할머니라 해도 농사만 짓거나, 품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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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하는 농삿일이란 결코 쉽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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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정경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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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시 출신들은 힘들다. 우선 농사에 서툴고, 트랙터, 경운기, 관리기 같은 비싼 농기계를 갖추기 힘드니 대규모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더구나 제초제 안치고 유기농 농사를 지으려면 1000평 내외도 벅차다.
중요한 건 그렇게 농사지어도 수입이 별로 안 된다는 점이다. 이웃 언니네는 관행농으로 논 50마지기 농사를 짓는다. 고추는 2천 포기를 심었고, 감자는 천 평 정도 심었다. 가을에는 김장 배추도 넉넉히 해서 김치를 담아 판다.
그렇게 할 때 1년 수입이 2500만원 정도이다. 귀농인들이 볼 때는 거의 불가능한 규모의 농사이다. 그래도 수입이 2500만원 밖에 안되니, 어쩌면 귀농인들이 농사만 지어서 먹고 살기는 요원한 꿈인지도 모른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은 한 달에 7만원으로 생활비를 해결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절제된 생활 속에서 안빈낙도의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시골 생활은 얼마든지 풍족하고 넉넉할 수 있다. 자동차도,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애고, 기름 보일러 대신 나무 때면서, 먹을 것들은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산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담배 가게를 갈래도 40분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 생활인지라 자동차도 있어야 하고, 농사지은 것 판매하려면 전화도 있어야 한다. 혹시 홈페이지라도 만들어 팔아 볼 생각을 하면 인터넷도 해야 한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교육비도 들어가야 하고, 집안의 경조사를 모른 척 할 수 없으니 현금으로 지출되는 돈도 적지 않다. 모아둔 돈이 넉넉하다면야 모를까, 뭔가 수입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 게 현실이었다.
환금성 작물을 찾아라 첫 농사에 크게 상심하긴 했지만, 다시 도시로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어찌됐든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 해나가야 했다. 우선 큰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 환금성 작물을 찾아 토종꿀 농사를 시작했다. 벌 30통을 사서 설탕 안 먹이는 진꿀 생산으로 방향을 잡고, 책으로 공부하며 벌을 키웠다.
일은 힘들었지만 벌의 생태가 워낙 재미있고 역동적이어서 할 만했다. 틈틈이 각종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은 집 짓는 현장에서, 나는 공공근로, 인구조사, 선거 사무실 전화받는 일, 글쓰기 등을 생기는 대로 했다. 내심 한심했지만, 어쩌랴.
그러던 차에 살던 집의 서까래가 주저앉아 지붕에 커다란 구멍까지 뚫렸다. 도시에 나가 있는 집주인은 고쳐줄 생각도 없고 팔 생각도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다른 빈집을 구해야 했다. 인근에 비어있는 집이라곤 뱀사골 계곡에 있는 민박집뿐이었다. 얼떨결에 민박집 아줌마가 된 나를 두고 인근의 후배들은 참 안됐다고 생각했단다. 농사짓겠다고 시골에 왔는데 민박집을 하게 됐으니 얼마나 안쓰러웠겠는가.
그래도 민박집 때문에 전화위복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농외 수입이 생겼으니까. 이제는 토종꿀과 민박 수입으로 생활비는 나온다. 앞으로 과제는 땅을 좀 사서 우리 집을 짓는 것인데, 이 정도 수입으로 땅 사고 집 짓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막연한 뜻만 세워두고 있을 뿐이다.
투자는 신중히 집과 땅 문제는 귀농할 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민거리이다. 대부분 빈집을 공짜로 얻거나 세를 얻어 들어오지만, 요즘의 귀농 풍토는 예전 같지가 않아서 어떤 분들은 땅부터 사고 황토집이나 기와집 등을 아예 지어서 들어오기도 한다.
여유가 있으면야 모를까 한꺼번에 몫돈을 투자해버리면 이후 생활이 불안해질 수 있다. 일단 귀농해서 찬찬히 둘러보고 집짓기에 좋은 땅, 농사가 잘 되는 땅에 대한 안목을 늘리고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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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해 농사 수익 80만원, 하지만 난 복 많은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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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정경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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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던지, 올해는 농사일이 손에 좀 붙는다. 귀농 초기 하루 종일 종종대면서도 다 하지 못했던 일들을 오히려 낮잠까지 자면서 밀리지 않고 해내고 있으니,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있는 참이다.
내년에는 농사 규모를 좀 더 늘려볼까도 싶다. 20년을 공장의 노동자로 살았던 어떤 이는 농사일을 해보고 나서야 그 어떤 노동보다도 진정으로 노동을 했다는 자족감을 느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농사일은 일과 삶을 일치시켜주는 수행 같은 면이 있다. 그 게 좋다. 쓸데없는 경쟁심, 이기심, 좌절감이 없고, 나를 쥐어짜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이나, 열등감, 박탈감도 적다. 육체적으로야 좀 힘들겠지만, 자연은 거짓이 없다. 열심히 산다면 충분히 살 만한 곳이라는 얘기다.
해질녘 실상사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뭔가 겨운 느낌이 들어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농촌의 삶이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겁낼 일은 아니다.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힘들지만 가보는 거다. 누군가 농사는 신선의 직업이라고도 했단다. 한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이만한 일이 또 있을까.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됐지 뭐.
덧붙이는 글
정경아 기자는 지리산 산내면으로 귀농해 토종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정 기자의 개인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boa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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