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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삶 귀농귀촌/귀농귀촌 성공지침서

[스크랩] 전원생활을 등지는 걸 보며...

한 사람이 도시로 돌아갔다. 그 도시는 서울이다. 그는 지천명의 중반까지 살아온 서울사람이다. 그가 말년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몇 년 전 시골로 찾았었다. 가슴 가득 부푼 희망을 안고서. 그곳은 남한강이 흐르는 유명한 고장으로 전원생활을 꿈꾸는 수도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그랬던 그가 얼마 되지 않아 전원을 등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유는 동네 주민들과 잘 융화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 시골에 땅을 사서 큰집을 지었다. 굉장한 집이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정원과 연결된 테라스가 움직이면서 밑으로 커다란 수영장이 나타났고, 세 가족이 전부인 주차장에는 비싼 수입차종을 포함한 고급 승용차 3대가 주차돼 있다. 하물며 이럴진 데 2층으로 된 주거구조의 화려함이야 더 이상의 설명이 구차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인가 그 집에서 인적이 뜸해지더니 끝내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평생의 도시인으로서 익숙하지 못한 시골생활의 이상과 현실의 궤리에서 오는 갈등이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접으로리라고는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전원을 향한 평생의 꿈이 육십이 다된 이제야 겨우 이룰 수 있었다며 행복해하던 처음의 그를 떠올리면 내게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논어 위정편에서의 공자의 말대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어 지천명이고, 듣기만 하면 이치를 깨닫게 될 수 있어 이순이라는 데, 육십이 넘은 지금의 인생길에서 뜻을 접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 마음 물론 편치는 않았을 것이지만, 한편으로 당초 사려 깊지 못한 계획과 행동에 대해서는 모든 전원을 꿈꾸는 사람들과 귀농을 희망하는 분들이라면 깊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일찍이 산을 좋아했다. 거기 나만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서 대도시의 문화와 문명 속 깊이 살면서도 시간이 되면 자주 산을 찾았고 비록 전국의 산을 만나려면 아직 멀지만, 시간만 허락된다면 어떤 산이라도 오르내렸다. 결국 그게 계기가 되어 모든 걸 접고 산속에서 촌부로 살게 되는 현재의 생활로까지 연결되지만.

 

산행은 속세의 모든 걸 덮는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가쁜 호흡으로 인한 등산의 고통은 전 일상사를 지배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육신의 지배자가 정신이라곤 하지만 때로 강한 육체적 시련이 오히려 정신을 제어할 때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생긴 불편한 심기나 전날의 과음으로 인한 쏙 쓰림 같은 정신적 육체적 시련들은 산행의 고통 앞에서면 막상 꼬리를 감추고 만다.

 

인간은 어차피 지금을 산다. 현재의 통증이야말로 지금 자신에게 가장 강렬할 수 밖에 없다.

 

고통은 근본적으로 크기가 없다. 단지 비교에 의해서만 대소大小가 형성되는 상대성의 개념이다. 한 고통은 더 큰 고통 앞에서면 작아지고, 반대로 더 작은 고통 앞이라면 오히려 커져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크기란 단지 허구였을 뿐이다.

 

그런데 산행에서의 그 고통은 흥미롭게도 우리의 정신을 매우 맑게 해준다. 경험자라면 느껴보았겠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어느 때보다 청결한 관념에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럴까? 산행의 고통이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다른 생각일랑은 들어설 공간이 부재해서? 아니면 관념이라는 그릇에 숨가쁜 것에 대한 한 종류의 내용물만 남게 되는 단순함 때문에?...

 

뭐가 되었든 우리는 그 시점에서 세상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힘든 산행 중 숨을 고르기 위한 잠깐의 휴식은 어쩌면 세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시간이다. 가장 깨끗한 마음의 상태인데다 느림의 미학에서 매우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정지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장 깊고 넓게 관조하고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산의 비탈지대에 자라는 나무들을 관찰하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목체가 편 타원의 형태를 한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편 타원형은 길쭉한 두 끝의 어느 한쪽이 더 뾰족한 타원형이다. 서있는 나무를 수평으로 절단했을 때 단면의 한쪽이 배의 선수船首처럼 된 모양이다.

 

그런데 나무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 모양으로 있을까? 물론 그 같은 지대의 모든 나무가 그렇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더라도 종()이나 목질의 강도, 수령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등산로를 벗어난 험준지역에서는 그런 나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산짐승들이 주로 다니는 비탈길을 건너보면 안다.

 

그런데 그런 나무의 주위를 좀더 세밀히 관찰해 보면 나무의 주변에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지대가 있다. 고지대, 저지대, 평지대다. 더불어 나무와 주변지대와는 세가지 각도가 생긴다. 예각과 둔각 그리고 평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무의 몸체 또한 3종류의 각기 다른 면적과 형태의 면이 있다. 좁고 뾰족한 면, 다소 넓고 둥근 면, 매우 넓고 평활한 면이다.

 

나무와 지면의 이런 모습들은 서로 어떤 관계성이 있을까? 그리고 편타원형으로 된 나무는 땅의 어떤 쪽으로 가장 뾰족할까?

 

결론은 나무의 위치에서 산의 고지대쪽으로 가장 뾰족하다. 즉 나무와의 사이에 예각으로 있는 땅을 향해 나무는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모습이다. 그런데 나무는 왜 고지대쪽의 자기 몸을 그렇게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쪽이 충격적일 가능성 때문은 아닐까?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중력에 의해 아래로 구르거나 흐른다. 소위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유위가 가세하지 않는 한 자갈도 바위도 물도 밑으로 가게 되어 있다. 만약 나무가 어떤 것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필시 고지대쪽 무엇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무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

 

물론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사실 그런 물리적 사태가 아니다. 나무의 모양이나 땅의 높낮이 그리고 바위가 구르는 것 같은 외적 현상에 대한 관찰의 유희에 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건 우리들 보편적 삶의 형태와 양식에 관련된 어떤 것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크거나 작거나 비슷한 법칙으로 움직인다. 중력과 전자기력의 차이 말고는 거시적 행성계의 운동질서나 미시적 원자계의 운동질서나 크게 다를 게 없다. 지구가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질서 있게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면, 원자세계에서도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운동 역시 질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의 방도가 또 그렇다. 모든 생물이 분자의 결합과 해체, 그 과정에 요구되는 빛과 열의 작용으로 존재 가능하다고 한다면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 즉 인간과 나무 역시 똑 같은 유기체에 속한다. 그렇다면 존재 방식 또한 비슷할 수 밖에 없다. 인간적 삶의 방식 속에 나무의 삶의 방식 들어 있을 수 있다면, 반대로 나무의 삶 속에 인간의 삶이 들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무는 수평지대로 가장 많은 면적과 평평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저지대로 중간면적과 둥근 모습으로 있으며, 마지막 고지대로 좁은 면적과 날카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나무는 자신과 수평을 이루는 지면 쪽으로 자기를 가장 많이 드러내어 보인다. 물론 나무가 그렇게 된 이유를 우리가 알 길은 없다. 소란한 인간과 달리 청산과 초목은 침묵으로 일관하는지라 소통할 길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자기와 비슷한 처지를 좋아한다. 예부터 사람들은 수평적인 것을 선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서민은 서민끼리,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끼리 가까이 모여 살다 보니 서로 친할 수 밖에 없다. 친한 사람끼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 집안의 수저의 개수는 물론, 부부간의 사사로운 얘기까지도 나누며 널리 열어두고 산다.

 

나무는 또 자신보다 낮은 땅에 대해서는 부드러움으로 대한다. 비록 수평적 관계보다는 작지만 그렇다고 날카롭고 예리한 구석도 없다. 오히려 매우 너그럽고 유한 모습이다. 나무는 자신 아래의 존재들을 보살피기를 잘한다. 나무는 높은 곳에서 닥치는 바위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준다. 여름에는 잎을 피워 그늘을 만들어 준다. 겨울이면 낙엽이불을 제작해 덮어준다. 나무는 자신보다 못한 것에 베풀기를 좋아한다.

 

인간처럼 강자일수록 약자를 더 괴롭히거나, 힘을 이용해 약자를 유린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나무는 그리고 자신보다 높은 지대에 대해서는 날카로움으로 대한다. 그래서 타면에 비해 유난히 뾰족하고 예리한 형상으로 고지대쪽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나무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왜 나무는 고지대쪽을 향해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려고만 했을까? 무엇이 나무를 대립적이고 호전적인 느낌으로 서 있게 했을까.

 

물질적 풍요로움 좋다!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폼 나는 일인가. 사실 돈도 능력이 있어야 많이 가질 수 있다. 부자가 곧 능력 있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절대 부자를 무작정 부정적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은 산골 촌부로서 만족하고 살지만, 사실 나같이 빈곤한 사람에게 부자는 선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힘들여 벌어들인 내 돈으로 산 땅에서 내가 내 집 짓고 산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있나. 법치국가에서 법이 허락되는 한 걸릴게 무에 있냐. 자기 토지에 자기집 짓고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말이지!

꼭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의 올망졸망 소박한 가옥이 대부분인 그런 마을까지 찾아가서 굳이 수영장을 갖추고 담장을 빙 둘러 무인카메라를 설치하면서까지 집을 짓고 살아야만 했을까?

 

어차피 테마파크 개념의 마을도 있다. 연예인이면 연예인끼리, 시인이면 시인끼리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 소통하며 사는 동네가 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동네도 있다. 그런데 하필 그런 시골마을까지 가서, 작지만 땅에서 행복을 찾고 사는 순박한 사람들에게까지 박탈감과 위화감을 조성해가며 그 큰집을 짓고 살아야만 했을까?

 

물론 그런 무뇌적인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류들이 한가지를 모르는 것이 있다. 살면서 돈으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인간종말의 최대사인 죽음이 돈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뻔한 문제로서 사태를 비약하려는 건 아니다. 이런 문제는 불치병이나 죽음 같은 것 빼고도 얼마든지 있다. 우선 여기의 주인공의 전원생활도 돈으로는 안되었지 않는가 말이다.

 

그 중에서 무형의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삶이 물건이나 물질 같은 유형적인 것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소중한 건 정신과 영혼 같은 형태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건 돈으로 사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정신에 깃든 카리스마를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걸 아직 모르는 갈 길이 멀기만 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산중의 나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이 하잖은 미물로 생각하는 것에서 배우라고, 나무 자신이 무엇 때문에 더 낮은 것에 대해 너그러울 수 있었는지! 나무는 왜 수평적인 것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더 높은 것에 대해 그리도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지!

 

꿈을 저버리고 어쩌면 비로소 등장해야 옳았을 전원에서 쓸쓸히 퇴장하려는 그를 비롯해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의 길을 쏜살같이 치닫고 있는 우리는 이쯤에서 바쁜 걸음을 늦추고 한번쯤 사색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 나무와 땅과 돌멩이 같은 것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고 숨쉬고 그것으로 인한 신진대사 활동을 통해 우리가 있다. 그리고 끝내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 없이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며, 인간에게 자연은 곧 신과 같은 존재다.

 

신이 내게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물어 온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모든 건 당신 안에 있습니다. 자연 당신이 옳습니다’

 

남치악의 촌부 유수처럼

출처 : [우수카페]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
글쓴이 : 유수처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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