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초로 정리된 학문이다.
산과 물, 방위 등 자연현상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인간생활에 영향을 끼쳐 왔다.
인간이 오랜 세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얻어진 자연 이치를 정리한 것이 풍수지리다.
따라서 풍수지리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이라 할 수 있다.
풍수지리 원리는 산과 물이 기본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停止)한 것이므로 음(陰)이라 하고, 물은 흐르는 것으로 움직여 동(動)하므로 양(陽)이라 한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음양조화로서 이루어진다.
사람의 경우 음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서로 합해야 자식을 낳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음인 산과 양인 물이 서로 어울려 배합되는 곳에서 혈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풍수지리의 간단한 원리다.
풍수지리적 해석 - 경북궁일대
경복궁에 대한 풍수적인 해석을 내리려면 먼저 서울의 산천을 살펴야한다.
서울의 산천은 그 혼자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온 사방의 산천과 이어져 있다.
멀리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의 힘찬 맥은 지리산까지 달려 내려 말 그대로 우리 나라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다.
서울의 산천은 그 백두대간이 달려오다가 분수산(강원도 회양)에서 갈라져 나와 대성산, 포천군 이동의 백운산, 강씨봉, 가평군의 청계산, 현등산을 거쳐 양주의 주엽산에 이르고,
갈라진 또 한 줄기는 수락산, 불암산을 거쳐 구릉산, 아차산으로 이어지고 나머지 한 줄기는 불곡산, 홍복산을 거쳐 도봉산, 북한산에 이르러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을 일으켜 백두산과 한북정맥의 기를 받아들였다.
또 강원도 회양에서 서울까지 산맥이 달리는 동안 그 산맥 골골의 물이 모여 북한강이 되고 서울의 객수(客水)가 되었다.
한북정맥이 한강을 만나 우뚝 멈추어서 팔을 벌린 곳이 바로 서울이며, 서울의 산천은 한북정맥과 한강이 흘러서 만든 품 넓은 명당이다.
북악산을 중심으로 청룡맥은 동쪽의 낙산산맥이며, 그 바깥은 성북동에서 갈라져 미아리고개에서 좀 처졌다가 종암동에서 정릉천과 만나 멈추어 서서 외청룡맥이 되었다.
서울의 백호는 북악산에서 자하문을 만나 인왕산으로 연결되는 맥이다.
인왕산은 사직터널, 영천을 지나 숭례문에 이르며 남산까지 이어진다.
또 하나의 맥은 인왕산에서 안산으로 이어지는데, 안산의 또 한 맥은 만리동, 청파동을 지나 한강에 이어진다.
이 맥이 꿈틀꿈틀 힘차게 내리 뻗음으로 해서 용과 같이 살아있는 듯해서 용산(龍山)으로 불린다.
지금의 용산이란 지명은 바로 안산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이 맥의 모양에서 기원하였다.
남산의 맥과 용산의 맥 사이에 위치한 평평한 땅을 흐르는 하천이 지금은 복개가 된 만초전이다.
이 일대에 미나리 재배가 성했던 까닭에 붙은 이름이다.
안산의 본 줄기는 북아현동, 노고산으로 이어진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세검정, 부암동, 평창동 일대의 물이 흘러나와 한강으로 이어지는 하천이 모래내이다.
인왕산 북한산 비봉에서 백련산으로 이어진 맥 사이를 모래내가 흐르고 있다.
북악산을 중심으로 청룡인 낙산, 백호인 인왕산, 안산인 남산의 맥들로 둘러싸여진 분지가 서울의 명당이다.
북악산의 맥이 낮아지다가 물을 만나 멈추는데 그 물이 바로 서울의 명당수 청계천이며, 남산의 맥 역시 낮아지다가 이 물을 만나 멈추어 선다.
이처럼 청계천은 사대문 안의 골골을 흘러나오는 물들을 모아 성 밖에서 미아리고개 남쪽의 물을 모아 흐르는 안암천, 미아리고개 북쪽의 물을 모은 정릉천과 마장동에서 만나고,
북한산, 도봉산과 수락산, 불암산 양대 맥 사이의 평활지를 흐르는 중랑천과 한양대 뒤편에서 만나고 다시 한북정맥 골골의 물을 모아 내려오는 한강과 뚝섬에서 합쳐진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정도전이 ‘시경’, ‘주아’편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경복궁이라 하였다.
북악, 인왕, 낙산, 남산에 둘러싸인 서기어린 명당의 혈에 자리잡았다.
경복궁 일대는 명당의 구조로 이루어진 땅으로 수도의 중심인 동시에 국도풍수(國都風水)의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을 백호, 낙산을 청룡으로 한 명당에 세워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풍수적 환경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글에서는 경복궁에서 왕비의 침전이 되는 교태전 뒤의 아미산의 상징체계를 살펴보고 경복궁 전각들의 배치가 무엇을 상징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복궁도>를 보면 경복궁의 주요건물과 지형지세, 특히 지맥의 연결이 아주 간명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경복궁도>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교태전(交泰殿) 뒤의 아미산이 유난히 강조되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미산은 경회루를 조성하면서 나온 흙을 이용하여 교태전 뒤에 세운 인공적인 산(가산: 假山)을 말한다.
원래 아미산은 중국 산동성 박산현에 실제하는 산이름이다.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자주 이 산의 아름다움을 시나 그림으로 자주 짓고 그렸던 유명한 산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름난 산의 이름을 빌어와서 교태전 후원을 아미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림:교태전 사진) 교태전 뒤의 아미산 후원은 계단식으로 단을 지어 뒤뜰을 마련한 자연스러운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후원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아미산의 아름다움과 진면목은 쪽마루에 앉아서 보는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에 앉은 왕비가 가장 잘 볼 수 있도록 꾸민 후원이니 왕비가 앉아서 보았음직한 곳에서 보면 가장 좋을 것이다.
<경복궁도>에서 아미산이 강조되어 표현된 것은 아미산이 한북정맥을 이어받고, 이 줄기는 결국 백두대간으로 연결된다는 상징체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교태전 뒤의 아미산은 북악산, 삼각산으로 이어지고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결국 백두대간의 줄기와 연결된다.
따라서 아미산의 상징체계는 결국 백두산에서 뻗어오는 땅기운을 한북정맥을 통해 받는 곳이고, 이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땅기운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 건물이 근정전에서 수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지맥의 흐름을 아미산을 통해 이어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아미산은 명확한 상징체로서의 중요성을 지닌다.
근정전(勤政殿)을 비롯한 경복궁의 주요전각들은 교태전을 사이에 두고 아미산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아미산을 통해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지맥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다. 잘 알다시피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옛 사람들이 지은 전각 이름이 지닌 빼어난 상징성에 놀랄 따름이다. 교태(交泰)의 의미는 음양의 기운이 서로 화합하고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음양의 조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교태라는 말에 어울리게 교태전의 정문이름을 양의문(兩儀門)으로 한 것이다.
양의란 음양을 상징하는 말이다. 또 양의문 밖의 5채 건물(왕의 침전인 강녕전 일곽의 건물)은 오행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강녕전의 정문인 향오문 밖의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모두 합치면 8채의 건물이 되는데 이는 팔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 바깥에 회랑으로 둘러쳐진 근정전이 단일건물로 놓여져 있어 근정전으로 수렴되는 것을 상징한다. 정리하자면 교태전을 통해서 받아들인 땅의 기운이 음양, 오행, 팔괘를 상징하는 건물구조를 통해 근정전으로 수렴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태전을 통해 하나가 된 천지의 기운이 왕정국가 시대의 지고존재였던 왕(근정전)에게로 수렴되는 것이다(이원교, "한양의 지리체계와 공간구조적 특성", <<서울학세미나 1>>, 1994, 40쪽).
경복궁의 중심은 근정전에서 교태전까지 이어지는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이곳은 여성의 공간이고 잉태의 장소이며 모든 존재의 포용을 의미하는 곳이다.
따라서 교태전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천지가 서로 만나서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주역의 태괘(泰卦)는 건하곤상(乾下坤上)으로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괘가 된다.
하늘은 본디 오르려고 하는 속성이 있고 땅은 본디 아래에 있으려는 속성이 있으니, 태괘란 상하가 서로 통하고 화합하여 만물이 생겨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태전은 모든 천지와 음양의 기운이 한데 어울려 만물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새 생명을 잉태하는 상징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창경궁> 창경궁은 창덕궁의 주맥과 서울대 병원으로 연결되는 맥의 두 맥 사이에 위치하여 지대가 낮은 곳이다. 청경궁의 정전은 명정전이다.
자경전 터, 그리고 일제의 의해 세워졌다가 후에 철거된 장서각이 있던(풍기대 있는 곳) 맥이 좌청룡, 창덕궁에서 비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서 동으로 명정전 오른편을 휘감은 맥을 우백호로, 그리고 서울대 병원이 있는 맥을 안산으로 하여 동향하여 자리를 잡았다.
창경궁에서 가장 좋은 터가 되는 곳은 침전인 통명전이다.
통명전은 창덕궁 주맥이 부용정에 이르러 한숨을 돌린 후 다시 힘을 받아 입수한 맥이 기대어 있어 왕성한 생기를 받고 있다.
통명전으로 주맥이 들어오고 그 맥에서 나눠져 왼쪽 팔로 뻗는 요해처에 일제는 장서각을 지었다.
본래 이 자리는 통명전의 북쪽으로 높고 넓은 터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정조가 자신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그리고 자경전의 서쪽에는 성종 대부터 있었다가 복원된 환취정이 있었다.
일제는 바로 이 높고 넓은 자리에 있었던 자경궁과 환취정을 헐어내고 왜색풍의 장서각을 지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창경궁의 좌청룡에 해당되는 지맥을 억눌러 지맥을 상하게 하고 생기의 왕성한 작용을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이 장서각은 1992년에 제거되었다.
<일제의 경복궁의 풍수구도 파괴> 일제는 아미산 뒤의 흥복전 터에 연못을 조성하고 교태전을 헐어서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을 중수하는데 사용하였다.
홍복전 터에 연못이 만들어지면서 백악에서 아미산으로 연결되는 지맥의 흐름은 단절되었다.
이 연못이 생김으로써 아미산은 삼각산과는 근원을 달리하는 산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교태전이 사라짐으로써 아미산까지 흘러온 지기를 한데 모아 근정전으로 수렴하던 상징매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아미산과 교태전이 훼손됨으로써 백두대간, 한북정맥, 삼각산, 백악을 거쳐 이어져 온 지맥의 흐름이 아미산과 교태전을 통해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풍수상의 구도가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는 또 창경궁에 동식물원을 개설하여 창경원으로 통칭했다.
창경국의 동식물원이 폐쇄된 것은 1984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한편 청경궁 내의 식물원은 일제에 의해 창경궁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곳의 지맥을 억누르는 위치에 세워진 것으로, 장서각과 함께 창경궁의 지맥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시대 한양의 도로골격>> 각 간선도로들이 서로 간에 관통하지 않고 서로 어긋나게 만난다.
육조거리는 광화문 네거리인 황토현(黃土峴)에서 멈추고, 창덕궁 진입로는 종로에서 멈추고, 숭례문로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쪽으로 관통되지 않는다.
도성 중간에 동서로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잇는 하나의 간선도로가 나고, 남북으로 난 간선도로들은
동서대로와 맞추어 서 있되 서로 만나서 관통하지 않는 T자형 도로를 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이를 해석하면, 두 개의 간선도로가 만나 직교하면 십자형의 길이 나게되고, 정(井)자 모형이 되어 불길한 것으로 여긴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명당으로 향하여 들어오는 도로는 지현(之玄)형태의 곡선이어야 하며 그것이 소로이든 산맥이든 직사(直射)하여 들어오는 것은 꺼리는 것이니 이런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대로 앞에 교차로나 정(井)자형 길이 있거나 집의 사면이 길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흉하다" 고 하였다.
서유구의 논리에 따르면 만약 경복궁의 남쪽 대로가 동서 대로와 만나는 황토현에서 십자로로 만나게 된다면 궁실방위와 연관시켜 볼 때 살기가 직선으로 날아들어 상충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 숭례문에서 북으로 난 대로와 동서대로가 만나는 지점은 종루(鐘樓)가 자리했던 지금의 종로네거리 부근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숭례문에서 경복궁까지 관통하는 직선도로가 생기게 된 것은 일제 때부터이다. 한일합방 후 10년간 일제는 시구개정이란 명목으로 서울의 기존도시질서를 마구 파괴하면서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들을 개조, 확장하였다.
<<일제의 도로건설을 통한 풍수침략(궁궐훼손)>> 창덕궁과 종묘를 단절시켜 관통되는 도로의 개설로 인해 종묘의 주산인 응봉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주맥이 잘려버렸다.
종묘는 창건 당시 도성 감방(坎方)의 주산인 응봉에서 주맥을 이어받아 임좌병향으로 지어진 것이고, 같은 주산을 이어받은 창덕궁과는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지맥을 절개하여 이화동쪽으로 도로를 개설하는 바람에 종묘는 주산과 맥이 끊어진 채 외따로 서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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