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건국(建國) 당시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은 60년 만에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이뤄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세계 13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돼 선진국 진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위대한 역사'를 가능케 했던 6대 요소들을 뽑았다.
① 어머니들의 열정과 희생
광복 이후 북한에서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치열해진 생존 경쟁은 왕성한 교육열을 낳았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가진 것이라곤 오직 맨주먹뿐이었다.
대한민국이 그 상황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들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녀 교육을 1순위로 삼고 악착같이 공부를 시켰다.
교육은 내면의 성숙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
교육을 통해 배출된 인력들은 경제 성장을 위한 질 높은 인적 자원이 됐다.
그 뒤에는 자신의 삶을 온통 자녀들의 미래에 투자했던 부모들의 열정과 희생이 존재했다.
하지만 21세기가 요구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나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해
이제 교육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② 빈곤의 악순환 끊은 리더십
민주주의의 전통이 지극히 짧은 상황에서 압축적 산업화를 이뤄낸 정치적 리더십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직 제도와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했던 국가 건설의 초기단계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훨씬 더
중요했으며, 냉전의 전초기지가 된 한국이 살아남고 발전을 이루기 위해선 '강한 리더십'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군과 경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미국과의 동맹 결성으로 국가안보를 보장한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의 강력하고 저돌적인 리더십은 정치적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한국을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했다.
③ 한국인의 특별한 행복 유전자
파란(波瀾)의 연속이었던 지난 60년은 어느 한 해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악조건에서도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인의 남다른 힘이 존재했다.
"한국인은 늘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특별한 유전자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6·25에서부터 가까이는 올림픽에서 보여준 젊은이들의 용기와 패기야말로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근면한 노동을 통해 현실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잘 결합했다는 평가가 있다.
④ "우리도 할 수 있다" 신바람
19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은 과거의 자포자기를 벗고 '우리도 잘할 수 있다'는 정신에
발동이 걸리게 됐다.
성과가 자신감을 낳고, 자신감이 생기니 더 열심히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화끈하고 자유분방한 한국인의 기질은 맺혀 있던 한(恨)을 풀고 '발바닥에 땀이 나 신명이
생기면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무서운 저력으로 되살아났다.
신바람의 구체적이며 실용적인 표현이 바로 '하면 된다'였으며,
이는 도전과 긍정의 순환을 불러오는 마법 같은 '자기실현적 예언'이었다는 것이다.
⑤ 위기 때마다 똘똘 뭉쳐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한국인들이지만, 국가적 힘이 절실히 필요한 국면마다
한데 뭉치는 위력을 발휘했다.
88올림픽 때는 전국의 소매치기들이 집결해 "외국인들의 돈을 털지 말자"며 '휴업'을 선언했고,
시민들은 자동차 홀짝 운행제를 준수했다. IMF사태 때는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서해에 기름이 유출됐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가 조약돌 하나하나를 닦아 냈다.
⑥ 정보화 원동력된 '빨리빨리'
한때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졸속(拙速)의 상징처럼 비판 받아 왔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자판기 컵 나오는 곳에 손을 넣고 기다리고,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나서 계산할 정도로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속도전'(速度戰) 문화야말로 압축적 산업화와 초고속 정보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새로 대두되고 있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신바람·光速 문화 (이 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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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개꼴이다. 삼성전자 애니콜의 신제품 수다.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휴대폰 시장에 100개 이상의 신제품을 내놨다. 시시각각 바뀌는 소비자 기호를 살펴 음악 기능도 확대하고, 스크린의 크기도 바꿔 넣었다. 수백 개 부품이 들어가는 데다 제품 수명도 6개월 안팎이니, 개발자 입장에선 숨이 턱턱 막히는 속도와의 싸움이다. 2006년만 해도 3위권에 머물면서 2위인 모토로라에 큰 차이로 밀렸던 위기를 탈출한 데는 광속(光速)의 스피드가 큰 몫을 했다. 지금도 삼성전자 휴대폰 부문엔 10개가 넘는 신제품 개발팀이 가동 중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용화 수석연구원은 "후발주자로 산업화에 성공한 우리는 스피드엔 강박증이 생길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한번 신바람이 붙으면 광속으로 질주하는 우리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기술력 없다던 기업들이 마음 먹고 나서자 단번에 세계 4위의 특허국에 올랐다. 국제특허출원 건수는 1984년 10건에서 2007년 7061건으로 700배 넘게 성장했고, 2007년엔 과학강국이라는 프랑스도 제쳤다. 우리 앞엔 미국·일본·독일뿐이다. 종업원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일하면서 순익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몰입도 수치인데, 한국 100대 기업들이 글로벌 100대 기업들보다 16% 높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분석했다. 1974년 6월 28일, 울산의 허허벌판에 현대조선소가 들어선 것은 세계 기업사(史)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60만평 부지에 불과 2년3개월 만에 조선소 준공식과 26만t짜리 유조선 2척의 진수식이 동시에 열린 것이다. 당시 현대는 조선소도 없이 배부터 주문받았고, 크레인도 없이 독(dock)을 만들어 냈다. 횃불을 켜고 철야작업을 했다. 지나가던 파이잘 국왕이 "저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공사를 더 주라"고 지시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래서 '빨리빨리'가 아니라 '쌩쌩(활력있게 질주하는 것)' 문화로 불린다.
한국인에겐 '한데 버무려' 이질(異質)을 동질(同質)로 만드는 독특한 문화적 소화 효소가 있다. 휴대전화에 MP3와 디지털 카메라를 섞고, 위성방송 수신 기능까지 얹어 세계 최초 제품을 잇따라 내놓는 것은 하이브리드(hybrid·혼합)형 '비빔밥 DNA'가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가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모계로 유전되는 세포조직)를 분석해본 결과 70~80%는 북방계이고, 20~30%는 남방계였다. 김 교수는 "미국은 시간이 흘러도 백인종·흑인종이 따로 살지만, 우리는 같은 지역 안에서 완전히 섞였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외래문화인 사우나는 한국에서 온돌과 만나 찜질방 문화를 창조해냈다.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따낸 야구 금메달은 한국식 하이브리드 야구의 성과다. 파워로는 미국에, 정교함으로는 일본에 못 당하지만, 이승엽 같은 파워 타자와 이종욱(두산) 같은 정교한 타자의 유기적인 화합이 세계 최강 신화를 만들었다. 10조원의 빚더미에 허덕이던 하이닉스는 혹독한 미국식 구조조정으로 회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살아난 하이닉스는 그동안 못 받았던 보너스를 모든 직원들에게 공평하게 나눴다. 성과주의와 평등주의의 절묘한 결합이다. 하나투어는 65세 정년을 보장하는 대신, 실력에 따른 철저한 성과급과 입사 6개월 이상 된 전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나눠 준다. 실력주의와 종신고용이 결합된 한국형의 '실력 종신주의' 모델이다. 일본에서 실패한 연봉제가 한국에서 정착됐고, 일본에선 사라진 회식 문화가 한국엔 살아있다. 성과를 높이면서도 조직의 단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브랜드와 자본력이 약했던 현대차가 불모지 인도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부품의 90%를 현지 조달하는 등 과감한 현지화를 통한 한국식+인도식의 혼합 전략에 있다. 밥(공동체)만 있으면 종교조차 비빌 수 있다. 대한민국은 불교(23%·2005년), 기독교(18%), 천주교(11%)의 3대 종교에다 원불교·통일교, 이슬람 신도까지 섞여 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多)종교 국가다.
노키아와 소니는 감원에 돌입했으며, 경쟁력의 대명사이던 GE엔 위기설이 나돈다. 승산 있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7년 말 기준 100% 미만은 7곳이었다. 10대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18조4957억원으로, 10년 전(4조1908억원)보다 4.4배 이상으로 늘었다. 10년 전엔 브랜드 100위권에 이름 하나 없었지만 지금은 삼성전자와 LG전자·현대차 등 3개로 늘었다. 전체 2553건 중 208개(8.1%)를 휩쓸어, 미국·독일·브라질에 이어 세계 4위였다. 일본·프랑스도 한국 뒤에 있었다. 2000년 초 IT버블 붕괴로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기업 숫자는 22개에서 12개로 줄었지만 삼성전자는 세계 7위에서 2위로 도약했다. 위기 뒤 찾아온 반도체 호황 덕분이었다. 포스코 역시 오일쇼크 직후(1982~1985년)나 선진국 저성장기(1991년), IT 버블 붕괴(2000년대 초) 직후처럼 위기 때마다 최고의 순익 기록을 갱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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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잘 살아보세" 선풍 "새마을 운동 "이 천지개벽을 이뤘다.
1966년에 '새마을'이라는 담배가 나오긴 했지만 그 말은 아직 일반명사일 뿐이었다.
- 그것이 실체를 갖춘 사업으로서 떠오른 것은 1970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 정부가 전국 동·리마다 시멘트 355포대씩을 지급해 환경 개선을 유도하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이기로
- 했던 것이다.
- 낙후됐던 대한민국 농촌에 일대 "잘 살아 보세" 선풍을 일으켰던 이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운동의 시작은
- 이렇듯 '시멘트 재고 처분'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은 "공산주의자가 침투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의 '빈곤'을 없애려는
- 대통령의 계산이 있었다"고 말한다.
- 1971년, 정부가 사업 성과를 낸 1만6000여 마을에만 다시 시멘트와 철근을 지급함으로써
- 새마을운동은 본격화됐다.
- 분명 정부 주도의 사업이었지만 그 핵심에는 이처럼 "잘하는 마을만 지원한다"는 원칙이 존재했음을
- 주목해야 한다.
- 마을과 마을 사이에 경쟁 원리를 도입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정신 중
- 자조(自助)였다.
그로부터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가 전국 농촌의 -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 가옥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초가집도 없애고") 농로를 확장했으며("마을길도 넓히고") 조림사업을 벌였고("푸른 동산 만들어") 마을회관·창고·축사를 개보수하고 전기와 전화선을 놓았다("알뜰살뜰 다듬세").
- 1971년 호당 35만6400원이던 농가소득은 1981년 368만7900원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살기좋은 내마을"),
- 그 바탕에는 새마을연수원에서 양성된 농촌 지도자들의 역할이 있었다("우리 힘으로 만드세").
- 1972년 4월 새마을 깃발 아래 도로 확장 공사에 참여한 농촌 주민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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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초가집을 없애는 등 전통문화를 말살했고, 유신체제 유지의 수단이 됐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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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발에 따른 농촌 경제의 붕괴를 저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현재 좌파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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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공 요인으로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표'로 신뢰를 쌓게 했으며 ▲종래의 농본주의와는 대립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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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주의'를 택했다는 점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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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경쟁력과 자생력을 키우려 했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 독(獨)탄광서 울어버린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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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는 "'루르'에의 길은 고되다"는 제목으로, 곧 서독으로 떠나게 될 광부들이 하루에 10시간씩 휴일도 없는 강행군 실습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 당시 국민 소득 87달러, 인구 2400만 명에 실업자는 250만 명이 넘었으며, 종업원 200명 이상의 기업은
- 54개뿐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광부 파독(派獨)은 실업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돌파구였다.
28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려 367명이 최종 합격했고, 신문마다 이들의 명단을 사법시험 합격자처럼 - 지면에 냈다.
- 대졸자가 20%나 돼 '신사 광부'라 불렸다. 1963년 12월 21일 1진이 출국했다.
- 지하 1000m에서 30도의 지열이 뿜어져 나왔고 작업 도구는 50㎏이나 됐다.
- 3년 뒤 이들이 귀국했을 때 대부분 골절상을 겪은 다음이었다. 마지막 출국자까지 합치면
- 모두 8300여 명의 한국 광부들이 서독에서 일했다.
간호사의 서독 파견도 이 무렵 시작됐다. 1962년 20여 명의 간호학생들이 파견됐고, -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300여 명의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건너갔다.
- 1973년 서독 전체 병원에서 일하는 한국 간호사는 6000명이 넘었다.
- 이들은 노인 환자들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민첩한 업무처리로 현지에서 찬사를 받았다.
- 서독 요하네스 크랑켄하우스 병원에 취업한 한국 간호사들. 이들은 친절하고 성실해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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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10일, 광부와 간호사 300여 명이 루르 지방의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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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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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통역관이던 백영훈의 회고에 따르면, 광부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부분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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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낌 때문에 더 이상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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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연단에 올랐다.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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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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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은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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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를 가득 메운 울음소리가 전이(轉移)돼 대통령마저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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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과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국민총생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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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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