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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내린터의 정신세계/아 ! 대한민국

대한민국 성공의 원동력

 1948년 건국(建國) 당시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은 60년 만에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이뤄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세계 13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돼 선진국 진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위대한 역사'를 가능케 했던 6대 요소들을 뽑았다. 

  ①  어머니들의 열정과 희생

 

광복 이후 북한에서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치열해진 생존 경쟁은 왕성한 교육열을 낳았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가진 것이라곤 오직 맨주먹뿐이었다.

대한민국이 그 상황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들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녀 교육을 1순위로 삼고 악착같이 공부를 시켰다.

교육은 내면의 성숙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

교육을 통해 배출된 인력들은 경제 성장을 위한 질 높은 인적 자원이 됐다.

그 뒤에는 자신의 삶을 온통 자녀들의 미래에 투자했던 부모들의 열정과 희생이 존재했다.

하지만 21세기가 요구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나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해

이제 교육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②  빈곤의 악순환 끊은 리더십

민주주의의 전통이 지극히 짧은 상황에서 압축적 산업화를 이뤄낸 정치적 리더십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직 제도와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했던 국가 건설의 초기단계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훨씬 더

중요했으며, 냉전의 전초기지가 된 한국이 살아남고 발전을 이루기 위해선 '강한 리더십'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군과 경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미국과의 동맹 결성으로 국가안보를 보장한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의 강력하고 저돌적인 리더십은 정치적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한국을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했다.

  ③  한국인의 특별한 행복 유전자

파란(波瀾)의 연속이었던 지난 60년은 어느 한 해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악조건에서도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인의 남다른 힘이 존재했다.

"한국인은 늘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특별한 유전자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6·25에서부터 가까이는 올림픽에서 보여준 젊은이들의 용기와 패기야말로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근면한 노동을 통해 현실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잘 결합했다는 평가가 있다.

  ④  "우리도 할 수 있다" 신바람

19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은 과거의 자포자기를 벗고 '우리도 잘할 수 있다'는 정신에

발동이 걸리게 됐다.

성과가 자신감을 낳고, 자신감이 생기니 더 열심히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화끈하고 자유분방한 한국인의 기질은 맺혀 있던 한(恨)을 풀고 '발바닥에 땀이 나 신명이

생기면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무서운 저력으로 되살아났다.

신바람의 구체적이며 실용적인 표현이 바로 '하면 된다'였으며,

이는 도전과 긍정의 순환을 불러오는 마법 같은 '자기실현적 예언'이었다는 것이다.

  ⑤  위기 때마다 똘똘 뭉쳐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한국인들이지만, 국가적 힘이 절실히 필요한 국면마다

한데 뭉치는 위력을 발휘했다.

88올림픽 때는 전국의 소매치기들이 집결해 "외국인들의 돈을 털지 말자"며 '휴업'을 선언했고,

시민들은 자동차 홀짝 운행제를 준수했다. IMF사태 때는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서해에 기름이 유출됐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가 조약돌 하나하나를 닦아 냈다. 

  ⑥  정보화 원동력된 '빨리빨리'

한때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졸속(拙速)의 상징처럼 비판 받아 왔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자판기 컵 나오는 곳에 손을 넣고 기다리고,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나서 계산할 정도로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속도전'(速度戰) 문화야말로 압축적 산업화와 초고속 정보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새로 대두되고 있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신바람·光速 문화 (이 인열)



• 중동서 횃불 켜고 공사… 한번 불 붙으면 아무도 못 말려

  
 

 

일주일에 두 개꼴이다.


삼성전자 애니콜의 신제품 수다.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휴대폰 시장에 100개 이상의 신제품을 내놨다.

시시각각 바뀌는 소비자 기호를 살펴 음악 기능도 확대하고, 스크린의 크기도 바꿔 넣었다.

수백 개 부품이 들어가는 데다 제품 수명도 6개월 안팎이니, 개발자 입장에선 숨이 턱턱 막히는 속도와의 싸움이다.

덕분에 삼성전자는 작년 50여 개국에 2억 대 이상을 팔아 휴대폰 세계 2위를 지켰다.

2006년만 해도 3위권에 머물면서 2위인 모토로라에 큰 차이로 밀렸던 위기를 탈출한 데는

광속(光速)의 스피드가 큰 몫을 했다. 지금도 삼성전자 휴대폰 부문엔 10개가 넘는 신제품 개발팀이 가동 중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용화 수석연구원은 "후발주자로 산업화에 성공한 우리는 스피드엔 강박증이 생길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위기 때마다 기회를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에는 신바람과 광속(光速)의 유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번 신바람이 붙으면 광속으로 질주하는 우리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기술력 없다던 기업들이 마음 먹고 나서자 단번에 세계 4위의 특허국에 올랐다.

국제특허출원 건수는 1984년 10건에서 2007년 7061건으로 700배 넘게 성장했고,

2007년엔 과학강국이라는 프랑스도 제쳤다. 우리 앞엔 미국·일본·독일뿐이다.

신바람의 유전인자는 1인당 경제적 부가가치(EVA)라는 지표로도 확인된다.

종업원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일하면서 순익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몰입도 수치인데, 한국 100대 기업들이

글로벌 100대 기업들보다 16% 높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분석했다.

신바람과 광속의 유전자는 근대화 과정에서 입증됐었다.

1974년 6월 28일, 울산의 허허벌판에 현대조선소가 들어선 것은 세계 기업사(史)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60만평 부지에 불과 2년3개월 만에 조선소 준공식과 26만t짜리 유조선 2척의 진수식이 동시에 열린 것이다.

당시 현대는 조선소도 없이 배부터 주문받았고, 크레인도 없이 독(dock)을 만들어 냈다.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제다에서 공사 중이던 삼환기업의 근로자들은 공기(工期) 단축을 한다며

횃불을 켜고 철야작업을 했다.

지나가던 파이잘 국왕이 "저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공사를 더 주라"고 지시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우리의 신바람 문화는 속도만 빠른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건설적 활기를 수반한다.

그래서 '빨리빨리'가 아니라 '쌩쌩(활력있게 질주하는 것)' 문화로 불린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비빔밥 유전자  (조의준)



• 휴대폰에 MP3·디카 결합… 뭐든지 버무려 새로운 걸 창조

 
 


 한국인에겐 '한데 버무려' 이질(異質)을 동질(同質)로 만드는 독특한 문화적 소화 효소가 있다.

휴대전화에 MP3와 디지털 카메라를 섞고, 위성방송 수신 기능까지 얹어 세계 최초 제품을 잇따라 내놓는 것은

하이브리드(hybrid·혼합)형 '비빔밥 DNA'가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하이브리드 속성은 염색체부터 시작된다.

김욱 단국대 교수가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모계로 유전되는 세포조직)를 분석해본 결과 70~80%는 북방계이고, 20~30%는 남방계였다.

김 교수는 "미국은 시간이 흘러도 백인종·흑인종이 따로 살지만,

우리는 같은 지역 안에서 완전히 섞였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미국 뒷골목 문화의 원조인 비보이(브레이크댄서)는 한국에서 국악 타악기 리듬과 농악의 몸짓을 받아들였고,

외래문화인 사우나는 한국에서 온돌과 만나 찜질방 문화를 창조해냈다.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따낸 야구 금메달은 한국식 하이브리드 야구의 성과다.

파워로는 미국에, 정교함으로는 일본에 못 당하지만, 이승엽 같은 파워 타자와 이종욱(두산) 같은 정교한 타자의

유기적인 화합이 세계 최강 신화를 만들었다.

한국식 하이브리드 문화는 위기 극복 때마다 소중한 원동력이었다.

10조원의 빚더미에 허덕이던 하이닉스는 혹독한 미국식 구조조정으로 회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살아난 하이닉스는 그동안 못 받았던 보너스를 모든 직원들에게 공평하게 나눴다.

성과주의와 평등주의의 절묘한 결합이다. 하나투어는 65세 정년을 보장하는 대신, 실력에 따른 철저한 성과급과

입사 6개월 이상 된 전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나눠 준다.

실력주의와 종신고용이 결합된 한국형의 '실력 종신주의' 모델이다.

미국식 심층면접 입사제도는 한국에 들어와 1박2일씩 합숙하며 팀워크를 판단하는 도구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실패한 연봉제가 한국에서 정착됐고, 일본에선 사라진 회식 문화가 한국엔 살아있다.

성과를 높이면서도 조직의 단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비빔밥 DNA는 우리 기업의 해외 개척 전략의 핵심이다.

브랜드와 자본력이 약했던 현대차가 불모지 인도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부품의 90%를 현지 조달하는 등

과감한 현지화를 통한 한국식+인도식의 혼합 전략에 있다. 밥(공동체)만 있으면 종교조차 비빌 수 있다.

대한민국은 불교(23%·2005년), 기독교(18%), 천주교(11%)의 3대 종교에다 원불교·통일교, 이슬람 신도까지

섞여 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多)종교 국가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공동체 에너지 (김정훈)



• 금 모으기, 태안의 기적… 위기감 공유할 때 에너지 폭발

  
 

 

글로벌 경제 위기는 대한민국의 저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일컬어진다.


대표 기업들의 경쟁력은 경쟁자를 앞서고 있고, 인재 경쟁력과 공동체 에너지는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저력,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잠재력은 무엇인가.

태안 바닷가가 기름 범벅이 된 지 16일 만인 2007년 12월 22일. 기름을 닦기 위해 모여든 자원봉사자가

30만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자랑하던 후쿠이현 미쿠니(三國) 유조선 사고 때의 '3개월간 자원봉사자 30만명'(1997년) 기록은

그렇게 깨졌다.

태안에선 3개월 동안 미쿠니의 4배인 123만명이 모여들었다. 울릉도에서 온 부녀회 회원이며 시각장애인,

그리고 48일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으며 묵묵히 기름을 닦은 탈북자 등이 함께 '태안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기적은 자주 있었다. 2002년 태풍 '루사'가 강릉을 강타한 날, 전국에선 3187명이 복구를 위해 모여들었다.

복구 3개월 동안 100만명 이상이 자원봉사자로 활동했고, 800여만명의 국민이 1300억원의 성금을 모았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는 2개월 동안 349만명이 장롱 속 금붙이를 꺼내 225t(21억7000만달러 상당)을 모았다.

전체 가구 중 23%가 동참한 것이었다. 1년 뒤 신용평가회사 S&P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올리며 '금 모으기 운동'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잠재 의식 속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렬한 운명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예외 없이 공동체를 생각하는 집단 에너지가 분출됐고, 그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1973년 오일쇼크, 기름값이 5개월 사이 네 배까지 뛰었다. 사람들은 기름값 시위를 벌이는 대신 악착같이

기름 소비를 졸라 맸다.

그 이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은 73년(6.4%)의 5분의 1 수준(1.3%)으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7.2%의 성장률을 유지했고, 수출은 무려 38%나 늘렸다.

한 발 더 나갔다. 기름 살 때 쓸 돈을 기름 파는 나라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1978년 한 해만 해도 14만명의 건설 노동자가 중동에서 땀을 흘렸다.

이렇게 해서 5년간 중동에서 205억달러를 빨아들였다. 수출의 40%를 담당한 셈이다.

1960~70년대 경제개발에 필요한 달러가 필요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서 달러를 벌어 보냈다.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은 지하 1000m 막장에서 탄가루 묻은 검은 빵을 먹었고, 광부·간호사 1만8659명이

연간 1000만달러를 한국에 부쳤다.

1964년 12월, 독일 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모국의 대통령 앞에서 이들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한없이 뿌렸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강해진 기업 (이인열)



•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 탄탄… 고비마다 경쟁력 키웠다

   
 


전 세계 철강기업 중 가장 돈을 잘 벌면서 빚은 적은 기업은? 외형 1위인 아르셀로미탈이나 일본의 자존심

신일본제철이 아니다.

한국의
포스코다. 포스코는 부채비율 25.9%, 영업이익률 23.4%로 경쟁업체들을 압도하고 있다(2008년 상반기).

현대자동차의 부채비율(64.6%)과 영업이익률(6.9%) 지표는 세계 최강 도요타(부채비율 163.3%, 영업이익률 4.8%)를 능가한다.

삼성전자의 부채비율은 휴대폰·반도체·디지털가전 등 각 사업분야에서 모든 경쟁자보다 낮다. 철강과 자동차, 전자의

3대 업종을 놓고 볼 때, 한국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탄탄해졌다.

 

위기 돌파에서 경쟁력 있는 글로벌 기업은 최고의 자산이다.

강한 글로벌 기업을 보유한 나라일수록 '끝까지 버티는 자가 독식한다'는 생존자 게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만 놓고 보면, 우리는 오일쇼크나 IMF 외환위기 등의 과거 어떤 위기 상황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반면 글로벌 경쟁기업들은 최악의 수렁에 빠져 있다. 그렇게 강하던 도요타자동차마저 67년 만에 적자가 예상된다.


노키아와 소니는 감원에 돌입했으며, 경쟁력의 대명사이던 GE엔 위기설이 나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종년 박사는 "혼자 겪은 위기도 이겨냈는데, 남보다 사정이 나은 상황에서 함께 맞는 위기라면

승산 있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우리 10대 기업(시가총액 기준) 중 부채비율이 100% 미만인 곳은 공기업이던 KT&G뿐이었다.

하지만 2007년 말 기준 100% 미만은 7곳이었다. 10대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18조4957억원으로,

10년 전(4조1908억원)보다 4.4배 이상으로 늘었다.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세계 21위로, 애플(24위)·소니(25위)를 앞지른다.

10년 전엔 브랜드 100위권에 이름 하나 없었지만 지금은 삼성전자와 LG전자·현대차 등 3개로 늘었다.

디자인 경쟁력을 살펴봐도, 2007년에 이데아(IDEA) 등 세계 3대 디자인상에서 한국 기업들은

전체 2553건 중 208개(8.1%)를 휩쓸어, 미국·독일·브라질에 이어 세계 4위였다. 일본·프랑스도 한국 뒤에 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위기를 거칠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2000년 초 IT버블 붕괴로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기업 숫자는 22개에서 12개로 줄었지만 삼성전자는

세계 7위에서 2위로 도약했다. 위기 뒤 찾아온 반도체 호황 덕분이었다.

포스코 역시 오일쇼크 직후(1982~1985년)나 선진국 저성장기(1991년), IT 버블 붕괴(2000년대 초) 직후처럼

위기 때마다 최고의 순익 기록을 갱신했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우수한 인재 (조의준)



• 교육열 세계 최고… 미국내 유학생 수 한국이 1위

  
 

 

스웨덴, 뉴질랜드,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높은 이들 나라들은 지난해 한국식 교육을 배우겠다며 교육부 장관 등을 한국에 보냈다.


우리 스스로는 과도한 교육열이라고 진단하지만, 밖에서는 한국의 인재 경쟁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딜로이트'는 국가경쟁력지수(2006년)에서 한국을 총 25개국 중 인적 자본 경쟁력 5위로 꼽았다. 같은 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학력평가 조사(15세 이상)에서 한국은 핀란드에 이은 종합 2위와 읽기 1위,

수학 2위, 과학 3위를 기록했다. 2003년 OECD의 학업성취도 조사에선 문제해결 능력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위기 극복에는 인재가 필수조건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의 인재 파워는 한국이란 울타리를 뛰어넘어 방대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지난해 현재 네팔·가나·탄자니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95개국에 뻗어 있는 한국 유학생은 무려 21만명(대학생 이상)

에 달한다.

미국에 유학 간 한국인 학생은 10만3000명으로, 인도(8만8000명)·중국(7만2000명)·일본(4만1000명) 보다

월등히 많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재학하는 한국 학생 수는 캐나다·중국에 이어 3위다. 한국인 기술자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파워그룹으로 떠올랐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인 공동체 가입인원은 750여 명에 달한다, 실리콘밸리 IT분야에 일하는 엔지니어 3~4명 중

한 명은 한국인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인재의 성장이 곧 한국의 성장이었다. 1948년 3900여 개였던 초·중·고교 수는 2007년 1만947개로,

34개였던 일반대학은 200개로 급증했다. 사흘에 하나꼴로 학교를 짓고, 석 달에 하나씩 대학을 만들었다.

지금은 고교졸업자의 80%가 대학을 가는 대학진학률 1위 국가다.

교육열이 최고의 인력을 낳았다. 외국 제품을 구해 분해해서 재조립하며 기술을 터득하는

'역행적(逆行的) 엔지니어링'은 뛰어난 문제 해결력을 지닌 한국의 인재만이 가능한 선진국 따라잡기 비결이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생전 "한국은 '지식이 현대경제의 유일한 자원'이라는 명제를 실현한 최고의 모범국가"

라고 극찬했었다.

1985년
삼성전자는 토종 개발팀 40여 명과 인텔 등에서 고액 연봉을 주고 데려온 베테랑 연구팀 40명에게

각각 1메가D램 개발을 맡겨 경쟁시켰다. 결과는? 토종팀의 승리였다.

밤새 일하고, 휴가도 없이 문제해결 방법을 찾은 한국식 인재 경쟁력의 승리였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    배려의 문화 (김정훈)



• 공동체 챙기는 전통… GDP대비 기부율, 일본의 20배

   
 

 

지난해 3분기 1인당 실질소득(GNI)은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했지만 자선단체 굿네이버스에 들어온 기부액은 30% 늘었고, 그중에서도 개인 비중은 2007년 88%에서 91%로 높아졌다.


1인당 평균 기부액 또한 4000원(1만3000원→1만7000원) 많아졌다.

한 통화에 2000원 기부하는 ARS 모금도 14만6000건으로 2007년(7만8000건)보다 2배로 늘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구세군 자선냄비는 경제 한파에서도 펄펄 끓어 모금 총액이 역대 최고였던

2007년보다 14% 늘었다.

기업·단체 기부는 줄었지만, 개인 기부가 20%가량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냄비 속에선 어김없이 1000만원짜리 수표가 나왔다.

사회복지단체 '기아대책'은 회원 1만6000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월 후원금을 1만원 더 올리는 것에

동의를 받고 있다. 회원 중 75%는 기꺼이 올려주겠다고 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숨은 천사들은 수없이 많다.

대구 수성구에는 7년째 연말이면 10㎏들이 쌀 500~1000포대씩을 기증하는 익명의 할아버지가 있다.

전주 노송동에도 9년째 매년 연말 수백만~수천만원이 든 돈 상자를 주민센터에 몰래 두고 가는 사람이 있다.

위기 국면에선 탈락하는 계층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배려와 나눔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충격을 완화해줄 수 있다.

흔히 우리는 기부 문화가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통계를 보면 그렇지 않다.

2007년 한국인들의 1인당 평균 기부액은 10만9000원. 1인당 국민소득의 0.4% 수준으로,

일본(0.02%)의 20배에 달한다.

절·교회 등 종교기관을 통해 내는 기부금(평균 23만원)까지 포함하면 1인당 소득의 1.34%다.

미국(GDP의 1.7%)에 약간 뒤질 뿐 호주(0.68%)와 네덜란드(0.9%) 등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아름다운재단).

현택수 고려대 교수는 "어려울 때 가족과 지역공동체를 챙기는 한국식 '확대 가족주의'의 전통이 기부로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두레·향약·품앗이 등 전통적인 나눔 정신은 IT기술을 만나 첨단 기부 문화로 진화하고 있다.

신용카드·교통카드를 통한 기부, 온라인 포인트를 모아 하는 기부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지난 겨울,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대면 1000원씩 쌓이는 기부에는 1만2000명이 참여했다.

2005년 시작돼 2500건이었던 싸이월드의 사이버머니 '도토리(1개 100원)'의 월 평균 기부 건수는

2008년 3만5000건으로 14배로 늘었다.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 

 

                              전 세계 229개국가 중 영토 규모 102위
                          전 세계 229개국가 중 인구 규모 59위

그러나 세계 경제력 11위

세계 군사력`15위(핵무기 제외시 6위)

4세대 통신망 와이브로 국제 전매 특허

세계 반도체 생산율 1위

세계 조선산업 제조 1위

세계 철강 제조 산업 1위

세계 초고속 통신망 보급율 1위

 세계 디지털기회 지수 1위

세계 학교 정보화 지수 1위

세계 금 세공 기술 1위

119서비스 화재진압 및 응급환자

구조력 등 세계 최고 수준

  

세계 온라인게임 제작 기술 세계 최고 수준

세계 단일 원자력 발전소 이용율 1위

세계 범죄 검거율 2위

  

세계 화폐제조 기술 미국에 이어 2위

세계 LCD 생산 산업 2위

세계 휴대폰 산업 2위

 세계 건설산업 규모 3위

세계 자동차 생산율 3위

 1mt급 인공위성 6개보유국 중 한 곳

외환보유액 2,150억 달러(5월13일 현재): 4위

세계 저축율 8위

세계 10대 채권국

세계 국가 신용등급 A 등급

 

자체 군수물자 생산 17개국 중 14위

한국군 →육군 3위 공군 8위 해군 14위

KI 탱크 공격 수준 독일의 레오파드에 이은 2위

 

세계 시장 점유율 50% 이상 점유중인 물품 갯수

(270개→ 전지렌지 등 )

세계 특허시장 점유율 7위

대미 무역 흑자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서울 10위)

  

세계 정치 부폐율 89위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

2002년 월드컵 4강

태권도 양궁 쇼트트랙 독점시대

 

 

세계 다섯번 째 고속철 보유국가

초고층 복합도시 두바이 건설

수출 2600 억불 달성 이룸

인천공항 : 규모 3위 총체적 1위

세계 국민문맹율 최저 확인


~~ 이것이 우리의  국력입니다. ~~ 


  농촌에 "잘 살아보세" 선풍  "새마을 운동 "이 천지개벽을 이뤘다.

 

  •       

    1966년에 '새마을'이라는 담배가 나오긴 했지만 그 말은 아직 일반명사일 뿐이었다.

    • 그것이 실체를 갖춘 사업으로서 떠오른 것은 1970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 정부가 전국 동·리마다 시멘트 355포대씩을 지급해 환경 개선을 유도하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이기로
    • 했던 것이다.
    • 낙후됐던 대한민국 농촌에 일대 "잘 살아 보세" 선풍을 일으켰던 이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운동의 시작은
    • 이렇듯 '시멘트 재고 처분'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은 "공산주의자가 침투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의 '빈곤'을 없애려는
    • 대통령의 계산이 있었다"고 말한다.
    • 1971년, 정부가 사업 성과를 낸 1만6000여 마을에만 다시 시멘트와 철근을 지급함으로써
    • 새마을운동은 본격화됐다.
    •  분명 정부 주도의 사업이었지만 그 핵심에는 이처럼 "잘하는 마을만 지원한다"는 원칙이 존재했음을
    • 주목해야 한다.
    •  마을과 마을 사이에 경쟁 원리를 도입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정신 중
    • 자조(自助)였다.

      그로부터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가 전국 농촌의
    •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 가옥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초가집도 없애고") 농로를 확장했으며("마을길도 넓히고") 조림사업을 벌였고("푸른 동산 만들어") 마을회관·창고·축사를 개보수하고 전기와 전화선을 놓았다("알뜰살뜰 다듬세").
    • 1971년 호당 35만6400원이던 농가소득은 1981년 368만7900원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살기좋은 내마을"),
    •  그 바탕에는 새마을연수원에서 양성된 농촌 지도자들의 역할이 있었다("우리 힘으로 만드세").
    • 1972년 4월 새마을 깃발 아래 도로 확장 공사에 참여한 농촌 주민들. 조선일보 DB
    • 새마을운동이 초가집을 없애는 등 전통문화를 말살했고, 유신체제 유지의 수단이 됐다는 비판도 있다.

    • 그러나 "개발에 따른 농촌 경제의 붕괴를 저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현재 좌파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 그 성공 요인으로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표'로 신뢰를 쌓게 했으며 ▲종래의 농본주의와는 대립되는

    • '발전주의'를 택했다는 점이 꼽힌다.

    •  농민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경쟁력과 자생력을 키우려 했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 독(獨)탄광서 울어버린 대통령
    • 1963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는 "'루르'에의 길은 고되다"는 제목으로, 곧 서독으로 떠나게 될 광부들이 하루에 10시간씩 휴일도 없는 강행군 실습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 당시 국민 소득 87달러, 인구 2400만 명에 실업자는 250만 명이 넘었으며, 종업원 200명 이상의 기업은
      •  54개뿐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광부 파독(派獨)은 실업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돌파구였다.

        28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려 367명이 최종 합격했고, 신문마다 이들의 명단을 사법시험 합격자처럼
      • 지면에 냈다.
      • 대졸자가 20%나 돼 '신사 광부'라 불렸다. 1963년 12월 21일 1진이 출국했다.
      • 지하 1000m에서 30도의 지열이 뿜어져 나왔고 작업 도구는 50㎏이나 됐다.
      • 3년 뒤 이들이 귀국했을 때 대부분 골절상을 겪은 다음이었다. 마지막 출국자까지 합치면
      • 모두 8300여 명의 한국 광부들이 서독에서 일했다.

        간호사의 서독 파견도 이 무렵 시작됐다. 1962년 20여 명의 간호학생들이 파견됐고,
      •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300여 명의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건너갔다.
      • 1973년 서독 전체 병원에서 일하는 한국 간호사는 6000명이 넘었다.
      • 이들은 노인 환자들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민첩한 업무처리로 현지에서 찬사를 받았다.
      • 서독 요하네스 크랑켄하우스 병원에 취업한 한국 간호사들. 이들은 친절하고 성실해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 1964년 12월 10일, 광부와 간호사 300여 명이 루르 지방의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 당시 통역관이던 백영훈의 회고에 따르면, 광부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부분에선

      •  흐느낌 때문에 더 이상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 대통령은 연단에 올랐다.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

      • 연설은 중단됐다.

      • 장내를 가득 메운 울음소리가 전이(轉移)돼 대통령마저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 영부인과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국민총생산)의

      •  2%에 달했다.
         

     





    최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의 땀과 노력,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의 일화를 담은 이 글에
    20, 30대 네티즌들은 <우리 세대의 가벼움>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며 공감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생도 교육에 사용해 그동안 ‘육사교장의 편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작성자는 예비역 장성인 김유복(金遺腹·79)씨. 
    그가 로터리코리아(한국로터리의 기관지)에 기고한 글은
     
    “60대를 수구 골통이라 몰아붙이는 젊은이들이여!
    이 글을 읽어 보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였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 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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