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업과
농촌이 어렵다고 하지만 농촌으로 돌아가 영농에 종사하고자 하는 예비영농인들의 관심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농업 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거목이 되기까지 숱한 어려움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영농인이 거듭나는 과정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피어난 영농의 싹을 아름드리 거목으로 잘 키우려면 치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농촌의 현실과 환경이 어떠한지, 농촌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떤 준비,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도시에서 시골로‘출퇴근’하는 농사꾼
올해 서른 둘의 이재표 씨,
그의 집은 정읍 시내다. 매일 아침 그는 고부면 덕안리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한다. 그의 직장은 다름아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 마을이다.
그는 특
이하게도 도시에서 시골로‘출퇴근’하는 농사꾼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농한기인 요즈음 고등학교 시절 배운 포클레인 기술로‘부수입’을올리고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요새 그 짭짤한 부업을 포기한 채 매일 출근하고 있다. 지난 겨울 호남지역에 내린 최악의 폭설 때 무너진 축사를 다시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 부수입이지, 사실 소득으로 따지자면‘본업’인 벼농사보다 포클레인 일이 더 낫다. 그래
도 그는 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농사는 자신의 천직이고, 포클레인 일은 어디
까지나 농한기 때의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이다.
축사없는 농민이 되다
마을에 있는 거의 모든 축사들이 무너졌고 소들도 많이 죽었다. 축사에 대한 보상은 나오지
만, 죽은 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도 없다. 소를 키우는 농민들의 가슴이 시커멓게 멍들 수 밖
에없다.
그나마 그의 집 소들은 축사가 무너질 때 다른 곳으로 피해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축사
가없으니더이상소를키울수는없는법. 결국눈물을머금고모두팔수밖에없었다.
“그래도 소가 영물은 영물이네. 그렇게 건물이 무너지는 데 용케 알아서 피하는 거 보니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의 속은 오랜 가뭄으로 갈라진 논바닥처럼 타
닥타닥
타들어간다..
대응할 수 있다면 극복 못할 리도 없다
홍수가 나거나 폭설이 내려도, 태풍이 불거나 가물어도, 풍년이 들어도 손해보는 게 농민이다. 일은 일대로
힘들고, 노동에 비해 대가는 적다. FTA니 뭐니 들려오는 소식은 농촌의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망설임없이 농촌으로 뛰어들었다.
젊은이들이 계속 떠나는 게 당연시되는 농촌에서 그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불과 스물 다섯 나이에 농사꾼으로 진로를 정한 그를 만류했다. 때마침
인근 농협에 생긴 일자리는 당시 농촌 젊은이에겐 최고의 직장이었다.
농협에서 자꾸 오라고 연락이 왔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 일 때문에 형과 한동안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농촌의 미래를 어둡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쌀 시장 개방이라는 큰 위기에 대해서도 하루
빨리 대응할 문제일
뿐, 극복 못할 장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있냐?”
농촌을 떠난 친구들은 그를 만나면 여전히 그의 진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물론이지.”
“쌀 시장 개방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냐?”
“누가 쉽게 본다고 그래. 나는 다른 나라 쌀하고 경쟁해서 이길 자신도 있고, 또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
재표 씨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에게 우리 농촌을 지키는 것은‘안전한 밥상’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입맛에 맞고 품질 좋으며 무엇보다도‘안전한’쌀을 만드는
것이 우리 농촌이 나아갈 길이라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회·경제적 환경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에 그의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고 있
다. 아직 한창 젊기에 농사일에서 배우고 싶고 체험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농촌이 보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농사기술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몰라서 못할 뿐이
지, 알고도 안
하는 경우는 없다.
일전에 그는 동네 어르신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내 나이 일흔인데, 스무 살부터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까지 50번 밖에 못
지었어.”
몇 년을 해도 모를 게 농사일이다. 그래서 더 좋은 농사기술이 있다면 누구라도 배우려고 든
다. 농촌에서는 농사
잘 짓는 사람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人네트워크와 독기(毒氣)
손님이 왔다는 소리에 재표 씨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벗어났다. 영농 준비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 찾아온 손님이었다. 연고 없이 농촌에 정착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재표 씨도 잘 알고있었다.
“농촌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텃세도 심하지요. 외지인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제가 옆 동네로
이사가도, 영농을 위해 이주한 사람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정도에요.”
“그 정도인가요?”
“ 외지사람들한테 그동안 워낙 많이 당해서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겁먹을 건 없어요. ‘우리
동네 사람’이라고
인정만 받으면 그렇게 좋은 사람들도 없을 걸요. 어차피 사람 일이란 게 만나
면서 해결해야 하는 거죠.”
“그렇군요.”
그가 농촌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독기’였다.
“이왕 왔으면 잘 먹고 잘 살아야 해요. 농사도 못 짓고 잘 살지도 못 하면 여기 사람들도 싫어
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독기를 품어야 해요. 농사 일이건 사람 일이건, 독기를 품고 열심히 일하
지 않으면 안 돼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농한기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는 우리들도 농한기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거든요.
이제 갓 농촌으로 온 사람들은 농한기를 더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농한
기를 못 견디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아요.”
그는 자신의‘농한기 아르바이트’를 예로 들어 주었다. 그가 고등학교 때 포클레인 기술을 배
운 것은 농사일에 어떤
용도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다고 했다.
“아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처음부터 융자 받을 생각은‘절대로’하지 마세요.”
‘절대로’라는 단어에 힘주는 그의 어투에서 농민들과 융자의 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2대를 잇는 농촌 사랑, 고향 사랑
그 무렵 콘크리트 작업을 마친 그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손님 옆에 앉아 작은 아들
에 대하여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뒤를 이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누구보다 농촌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처지에
아들에게 힘든 농사일을 마냥
권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대학까지 졸업한 작은 아들이 농사꾼이 되겠다고 하니 내심 반갑고도 고마웠다고 한다.
“자기 앞가림도 잘하지, 집에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아들이라고 동네에 소문났어. 얘가 또 못
다루는 기계가
없어. 장가까지 알아서 잘 가더라고.”
술기운을 빌어 하는 아들 자랑이지만, 그 속에 아버지의 진심이 녹아 있음은 누구보다도 재표
씨가 더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낯선 손님을 무척이나 살갑게 대했다. 아버지는 어쩌면 사람이 그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농촌은
사람이 그립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안에 있는 사
람들은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것이다.
재표 씨는 아무래도 오늘 밤늦게까지 아버지와 함께 술을 대작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방인이 낀
농촌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조화로운삶 귀농귀촌 > 귀농귀촌에 꿈을갖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30대 회사원의 귀농이야기 (0) | 2008.03.01 |
---|---|
[스크랩] 토익 대신 선택한 귀농에서 `진실한 삶`을 발견하다 (0) | 2008.03.01 |
[스크랩] 땅을 살리는 사기맑골 뚝심이 (0) | 2008.03.01 |
[스크랩] "곁을 지켜준 아내의 희생" (0) | 2008.03.01 |
[스크랩] 귀촌해서 정착의 자세 (0) | 2008.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