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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삶 귀농귀촌/귀농귀촌 성공지침서

[스크랩] 귀농을 앞 둔 제게 큰 의미를 준 글입니다.

귀농을 앞 둔 제게 큰 의미로 읽혀진 글을 소개합니다. 길더라도 찬찬히 읽어보세요.

 

귀농운동본부의 이오농장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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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농장


역발상기개세(逆發想氣蓋世) 


지금, 농촌엔 미래가 없다

그간 열심히 생활 하셨습니까? 저도 농사 열심히 지었습니다. 농사? 참 익숙하면서도 귀농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여러분과는 별 관계없는 말이었죠? 그저 농촌에서 하는 일,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벼나 무, 배추 가꾸는 정도...  저도 도시에 살 때는 그랬습니다. 홍수가 나고 논과 밭이 물에 잠길 정도가 돼야 TV를 보며 그저 “안됐네!” 하는 마음이 그나마 농촌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도 여러분 같이 사회인으로 도시에 살아보니 문득 농촌이 그리워지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내 할아버지, 아버지 조상 대대로 농부였던지라 제 심장 깊숙이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가 봅니다. 아무튼 각박한 도시살이를 정리하고 1년여 준비 끝에 97년 가을 충남 홍성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귀농전 배낭여행을 하며 귀농지를 물색했는데 이 때 농촌이 당면한 문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하면 농촌에 사람이, 그것도 젊은이와 아이들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당시 저희 부부는 30대 초반에 아이들이 다섯살, 세살인데 도대체 아이들 또래가 한 두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 산골 마을에 가니 계곡물은 그냥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한 데 그 해 초등학교 입학생이 한 명이라니 기가 막혔습니다. 대개의 농촌은 이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곳을 둘러 본 결과 지금의 홍성에 정착한 것입니다.

저희 마을 주변 지역은 농촌치고는 조금 특별한 곳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유기농업 단지이고 젊은이와 아이들과 꽤 많습니다. 저희 마을만 해도 30가구가 채 안되는데 초등학생이 두 자릿수입니다. 1개 면단위에 농민단체가 아홉 개나 되고 농협외에 신용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환경농업교육관, 여성농업인센터, 대학과정의 풀무 전공부 등 다른 농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관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로 인해 외부 방문객 수만 해도 연 2만여명에 이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웬만한 유기농업 경력을 가진 농민이라면 해외 연수 경험이 있고 저희만해도 제가 두 번, 아내가 한 번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90년대에 이미 국제 오리농 농민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외국의 유명 환경-생태학자들이 방문하여 강연을 열기도 합니다. 곧 말씀드릴 오리 농사만해도 규모면에서 발원지인 이웃 일본을 압도합니다. 오리쌀 전용 건조공장과 도정공장이 가동중이고 전국 각지에서 홍동면을 배우고자 공무원과 농촌지도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홍성군청의 군수님이 홍동을 모델로 친환경 농업 확대를 군정의 우선 순위로 삼는가하면 농정의 최고 수반인 전현직 농림부 장관님도 홍동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의 시발점은 풀무농업고등학교(당시에는 학력인가도 받지 못한 고등 기술학교)입니다. 모두가 공업입국(工業立國)을 외치며 산업화를 부르짖을 때 “이 나라 살 길은 농촌의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달렸다”는 신념하에 성서에 입각한 농촌교육, 땅과 생명을 죽이는 화학농법 대신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생명농업을 가르치고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지역에 정착해 지금의 홍동을 일궈낸 것입니다.

무엇을 심어도 돈되는 게 없다

그러나 지금 홍동과 몇몇 농촌마을을 제외하고 우리 농촌은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명랑한 울음소리 대신 과도한 농작업에 지친 농민들의 신음과 한숨으로 가득합니다. 농가의 마지막 버팀목인 쌀만해도 2년 전까지는 해도 관행이나 유기농산물 모두 생산만 하면 파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WTO(세계 무역기구)의 규정에 따라 관행쌀의 정부 수매량이 해마다 줄어들면서 얼마전 그마저도 완전히 사라졌으며 유기농쌀 판매도 현재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덧붙여 이른바 환금작물(換金作物)이라 불리우는 고추, 마늘, 담배 따위도 중국산의 물량공세와 밀수, 보따리상들로 인해 제 값을 받기 어습니다. 여러분도 몇 년 전 중국과의 마늘 분쟁때 핸드폰, 전자제품, 플라스틱 원료를 팔기위해 국내 마늘 시장을 내어준 예를 잊지 않으실 겁니다.

당시 정부는 농민의 피해를 여러 형태로 보상하겠다고 했으나 전국에서 드물게 유기농 마늘 작목반이 있는 우리 마을도 마늘 피해보상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10짜리 동전 한 개 지원받은 것이 없습니다. 저는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요 특별히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농촌의 현실은 너무나 어렵고 어딘가에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학창시절 사회시간에 ‘비교우위론’이란 경제용어를 배우셨을 겁니다. 외국과 무역을 할 때 이른바 경쟁력이 있는 물품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농산물 등 경쟁력이 없는 것들을 사오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동의 하십니까?

비교 우위론은 이미 수명을 다해 용도 폐기된 낡디낡은 경제논리입니다. 그런데도 외국물을 먹은 우리 고위 경제 관료들은 박물관속의 유물을 신주단지인양 떠받들고 있으니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윗물이 이러니 그 아래 공무원들은 어떻겠습니까? 소위 ‘농업’자가 붙은 공기관들의 농민 무시는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 

몇년전 4월경 몹시 가물때였습니다. 못자리에 물을 품어 올리는 데 누가 그랬는지 양수기의 코드를 죄다 뽑아 놨습니다. 저희 논 뿐 아니라 물길 위 논들이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다시 코드를 꼽아 물을 품는 데 이번에는 양수기 급수 꼭지를 빼 갔습니다. 그제서야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농업기반 공사 직원이었습니다.

즉시 전화를 걸어 왜 그랬는지 물어보니 목리구역 밖의 논들이라 그랬다고 했습니다. 목리구역이란 수세(水稅)를 받을 때 기반공사가 관할하던 구역으로 저수지 물길이 지나가는 아래 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희 논이나 물길 위의 논들은 모두 밭을 논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과거 목리구역안에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수세가 폐지되었는 데도 목리구역을 이유로 물을 못대게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못자리란 곧 본 논에 옮겨 심을 모를 키우는 곳입니다. ‘모농사가 반농사’ 라고 모를 제대로 키워야 그해의 벼농사가 제대로 되는 것인 데 여기에 물을 못대게 한다고 해서 대지 않을 농민이 있겠습니까? 모두들 급수꼭지를 사서 다시 대었더니 이번에는 양수기를 엎어뜨리고 급수변과 배수변을 묶은 고무띠를 전부 풀어 갔습니다. 기반공사 00군지부에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고 “논에 물을 못대게 하면 집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넣으란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당신들 사정”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래서 민원을 내겠다고 했더니 얼마든지 내라고 응수하던군요. 거기서 한 술 더 떠 또다시 물을 댄다면 아예 양수기를 가져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적기관(公社)이 농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기반공사에 근무하는 모든 분들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농민을 상대하는 최일선 부서의 직원이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언동을 스스럼없이 하던 것이 몇년전 농촌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농업기반공사의 태생이 농조, 수리조합, 농어촌 진흥공사가 합병된 탓에 과거 수리조합 시절 농민을 좌지우지 하던  드높은(?) 위세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 서울에 살면서 우리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들이 똑같은 재산상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친구의 팩시밀리를 빌려 백군데 이상 민원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5쪽 짜리 글이었는 데 당시 행정기관의 공식 민원창구는 물론 여론 환기를 위해 동사무소와 사법연수원까지 보냈습니다. 성경에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가 나오는 데 과부는 어려움을 당할 때 돌봐줄 이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속 과부처럼 “재판관이 두 손 들 때까지” 하고 또 해보는 것입니다.

대개의 농투성이들은 도시 빈민들처럼 상대적 약자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자리에서 분통을 터뜨릴 뿐 어떻게 조직적으로 대응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행정기관도 농협도, 농업기반공사도 심지어 지역 보건소까지 농민들을 무시하고 홀대합니다. ‘농사농(農)’자가 붙은 기관들마저 농민위에 군림하려는 데 다른 기관들이야 말씀드려 무엇 하겠습니까? 

아무튼 농업기반공사 군지부의 상급기관인 충남지사, 기반공사 본사, 기반공사의 관리감독 기관인 농림부 해당부서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를 비롯해서 군청, 군의회까지 총 8군데 민원을 보내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알렸습니다. 민원을 내기 전에 기반공사에 편지를 썼는데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편지의 제목이 “만일 농업기반공사 00군지부가 양수기를 거두어 간다면 00군지부의 체질 개선을 제 일생 일대의 임무로 알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싸우겠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그 뒤 정식으로 기반공사를 찾아가 지부장을 만나 항의하고 담당 직원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냄은 물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과거 못된 공무원을 다뤄 본 경험이 한 몫 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못자리에 물을 대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농민의 입장에서는 생존권을 빼앗는 망동(妄動)입니다. 물을 관리하는 기반공사의 수고로움을 모르지는 않지만 세상에 할 일이 따로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행정기관이나 공적기관이 이럴진대 기업은 농민들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제가 시골 내려와서 들은 우스개 소리중 하나가 “테레비도 서울서 사와야 잘 나온다” 는 말입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우리 농민의 피해의식은 그만큼 커져 있습니다. 농민을 무시하기로는 기업도 예외는 아닙니다.

농업용 트럭으로 세레스(CERES)라는 것이 있습니다. 4륜 구동 트럭인데 이게 20년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크게 없습니다. 히터를 예로 들면 발아래에 무슨 남비 뚜껑같은 것을 열어야 열풍이 나옵니다. 아마 50-60년대 사용했던 GMC 트럭이 그런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승차감도 경운기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어서 장거리를 뛰기에는 무리입니다. 매년 00년형이라고 업그레이드하는 승용차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제품을 농업용이라고 판매하고 있으니 기업들이 농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알만합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을 보십시오. 농업용 차도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제대로 잘 만들면 취약한 내수시장을 넘어 수출길도 있을텐데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농촌 소비자들은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97년 귀농이후 여러 업체에 신상품 개발 아이디어(product idea)를 보냈습니다. 요지는 농작업에 적합한 제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는 선풍기를 곡물 선별용으로 많이 씁니다. 수확후 흙이나 잎가루 등 이물질로부터 들깨나 참깨, 콩 등을 선별하는 것이죠. 이때 기존 선풍기를 사용하면 조작부위나 모터 덮개 주변으로 흙먼지가 들어가 수명이 짧아집니다. 옥외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커버 등을 개선하고 방진(防塵)설계를 한다면 훨씬 오래 사용할 수 있겠지만 답변이 없었습니다. 정말 행정기관, 기업, 농업관계 기관들을 상대로 우리농촌 바로알기 혹은 농촌 사랑하기 캠페인이라도 대대적으로 진행시키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픈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과 대학생 농활대 정도 말고는 농민의 친구, 즉 원군(援軍)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농촌의 가장 큰 현안인 쌀문제가 소비확대 캠페인으로 풀리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누구든지 하루 3끼 이상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쌀은 농촌의 상징이요 농업의 표상이기 때문에 쌀을 매개로 우리 농촌과 농업이 처한 현실을 여러분께 정확하게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농부보다는 한량이 대접받는 세상

시골에 와서 직접 들은 이야기중 충격적인 일화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귀농한지 두 해째 되던 해 풀무학교가 있는 팔괘리의 어느 50대 농부는 저에게 “난 동창회가서 농사짓는다고 안 혀. 친구들이 은근히 무시하더라구. 그래서 그냥 논다고 혀...” 라고 하시더군요. 농사짓는 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 선배 농부님이나 친구분 모두 잘못된 사례입니다만 농업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블랙 유머 한가지를 더 전해드리면 거지 부자가 길을 가다가 뙤약볕에서 힘들게 김을 매는 농부를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랬답니다. “너 열심히 안하면 나중에 저 꼴 된다” 고 말입니다. 이 유머에는 거지보다도 못한 직업, 뒤떨어지거나 못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농사라는 편견과 몰이해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농업을 무시하고 천대한 죄값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율은 25% 에 머무르고, 그나마 쌀을 빼면 5%밖에 안되며 대부분의 먹을 거리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80년에도 냉해를 입어 미국에서 쌀을 사오면서 세계 곡물가격의 3배나 주고도 향후 5년간 지속적으로 쌀을 수입하겠다는 불리한 조건으로 쌀을 들여온 예가 있었습니다. 
    
농업은 오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쌀과 곡물은 우리의 살이고 채소와 과일은 우리의 핏줄 같은 것입니다. 농업과 농산물이 지금 당장 천대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내다 버리거나 포기할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이 나라 일부 고위 경제 관료들의 밥상은 좋아하는 수입 농산물로 채워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국내에 들어오는 수입농산물의 실태가 어떠합니까?

인천항에서 미국산 밀을 하역하던 노동자가 허파, 대장, 신장이 파괴되고 피부암에 걸려 사망하였는가 하면 60-70년대에는 이를 잡기 위해 머리에 허옇게 뿌려지던 농약 DDT가 아직도 수입농산물에 살포돼 국내에 유입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렌지 쥬스의 원료인 오렌지는 손으로 따는 것이 아니라 고엽제의 먼 친척격인 농약(낙과제)으로 수확하여 자국 소비용과 해외수출용은 엄격히 구분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과일은 수출전에 아예 농약으로 샤워를 하고 곡물은 사일로에 들어갈 때 독성이 강한 농약으로 분류된 렐단으로 버무려져서 보관되고 있습니다.

예를 더 들자면 한이 없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바나나는 유태인 학살에 쓰였던 청산가스로 훈증 처리되고, 사과 따위는 트럭째로 방부제와 치아벤다졸을 소방호스로 살포한다고 합니다. 곡물과 과일뿐만이 아니고 고기류와 우유 등 축산 부산물을 더욱 위험합니다. 미연방 보고서는 87년에 자국산 쇠고기의 발암가능성을 여러 품목중 2위에 올려 놓았고 89년 EU지역에 수출된 미국산 쇠고기 50%에서 성장 홀몬제가 검출되었습니다. 이래도 백화점에서 대대적으로 세일하는 LA갈비 맛있다고 우걱우걱 뜯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 위험한 것은 여기에 더해져 G.M.O(유전자조작) 농산물의 피해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교수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 미국 농민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G.M.O 농산물을 재배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G.M.O 농산물이 병충해에도 강하고 수확도 많아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돈과 효율만을 추구하는 상업주의 농업의 폐해는 이제 극단적으로 치달아 일부 낙농가(젖소농장)의 경우 소에게 여물대신 플라스틱 수세미를 먹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반추(反芻)위를 가진 염소나 소는 거친 풀이나 짚들을 먹어야 위가 발달하고 건강해지는 법인데 힘들고 귀찮다고 소화가 되지 않는 플라스틱 수세미를 먹이니 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소화가 되지 않고 돌고 돌아 당장은 풀사료 비슷한 효과를 내겠지만 종말은 불을 보듯 훤합니다. 위벽은 헐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소에게서 짠 우유와 유가공품들,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입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집니다.

그렇다면 국내 축산물은 어떻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축산물의 질 자체는 별로 나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수입 농산물이나 축산물(미국산을 예로 들어)은 국내에 들어오기까지 짧게는 2주에서 5~6주의 수송기간을 요하고, 적도를 지날 때는 배의 갑판 온도가 무려 60℃까지 올라가는 관계로 여러 가지 후처리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동일한 재배방식으로 키워도 국내 농산물은 수확후처리(포스트 하베스트)는 거치지 않으니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축산 농가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저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한 가지 쓴 소리를 하고자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고기 좀 줄이자는 겁니다. 저희 홍성군은 대한민국 제 1의 축산군인지라 동물들이 어떻게 키워지는 지 잘 알고 있습니다. 돼지만해도 1개 군(郡)이 다른 3개도(道)와 맞먹는 규모이니 얼마나 많이 사육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자주 찾는 닭고기 요리인 양념 통닭이나 후라이드 치킨 역시 실상을 알면 결코 권할만한 것이 못 됩니다.

몇년전 인근 대규모 양계농가에 병아리 입식(들여놓기)과 출하(다 큰 닭을 빼는 것)작업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국내 유명 브랜드의 위탁 농가이니 아마 많이들 드셨을 겁니다. 그때가 이른 봄인데 닭을 모두 빼고 수고했다며 저와 동료들에게 닭 몇 마리씩을 주길래 닭장에 넣어놨더니 며칠 못가 대부분 죽었습니다. 놀래서 다른 동료들에게 연락했더니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퀸셋형 닭장(하우스)에 온풍기와 항생제 따위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연약하게 키워진 닭이 당시 쌀쌀한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죽은 듯 합니다. 이러니 이게 무슨 광고처럼 건강하고 생명력이 있는 닭이겠습니까? 지금 닭 사료용 봉투를 한 번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파리 구제제 첨가’라고 자랑하듯 큰 글씨로 박혀 있습니다.

조심스럽기는 다른 축산물도 마찬가집니다. 한 번은 젖소를 키우는 목장의 정화조를 퍼서 논에 거름으로 내었는데 1회용 주사기 보호캡이 어찌나 많이 논에 떠다니는지 줍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분은 함부로 주사를 놓을 분이 아닌 데도 짐승을 키우는 데 그렇게 많은 약품이 들어가야 하는지 저와 여러분의 건강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덧붙여 우리나라에서 만든 항생제중 상당량이 가축용으로 사용된다는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더욱이 가축사료에는 치료용이 아니라 예방용으로 항생제가 남용되는 것도 모자라 각종 성장 조절제가 첨가된다니 제 자식이나 여러분이 과거보다 체격이 커진 것은 단지 영양상태가 개선된 결과만은 아닌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른 농산물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본론에 앞서 말씀드리고픈 것은 제 이야기가 지금도 무진 애를 쓰시는 농민들의 땀과 수고로움을 가리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저 역시 논밭을 가꾸는 농민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젖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산 부업농이기도 합니다. 다만 생산자이자 소비자의 한사람으로 우리 농촌의 현실과 먹을거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표 농산물로 인삼을 꼽습니다. 저도 인삼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먹기가 꺼림칙합니다. 저희 동네 친한 이웃이 인삼 경작자에게 밭을 임대했는데 농약을 어찌나 해대는지 인삼이 독삼(毒滲)으로 불리는 이유를 절감했습니다. 이는 한약재로 쓰이는 구기자도 마찬가지이며 대표적 양념 작물인 고추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 발간하는  책자에 의하면 농가 평균 12회의 농약을 치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어떤 농가는 15회까지 살포한다고 합니다. 또한 연초 행정기관이 주관하는 영농교육 책자는 대부분 “무슨 병이 나타날 때 무슨 농약을 치시오” 라고 농약명까지 줄줄이 적어놓으니 영농 지침서인지 농약 회사의 홍보 카탈로그인지 구별이 어려울 지경입니다. 매사 이런식이니 과거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를 농약지도소로 고쳐 부른 동료 유기농업인의 속깊은 뜻을 헤아릴 듯도 합니다.

농약의 기원과 폐해는 직접 더 말씀드리기로 하겠지만 모든 농민이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해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에서 식량증산과 녹색혁명을 부르짖던 70년대 이미 이 땅에서도 일부 선각자들에 의해 농약과 화학비료를 한 방울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이 시도되었습니다. 어머니인 땅에 독극물이나 다름없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쏟아 붓고 소출을 바라는 생명약탈농법에 대한 반성때문이었으나 정부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반(反)한다하여 유기 농부들의 모임에 정보과 형사를 파견하는 등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때문에 이웃의 질타와 조롱, 정부의 감시라는 이중고속에 이 땅의 유기농 선각자들은 정농(正農)을 위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97년 국회에서 친환경농업육성법이 통과되고 농업기술센터에 친환경 농업 담당자가 배치된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입니다. 이젠 정부에서 올해까지 친환경 농업의 비율을 현행 1%에서 2%로 확대하려고 노력중이며 이곳 홍성에는 농림부 및 지방 공무원들이 농민에게서 오히려 친환경 농사법을 배워가는 형국입니다. 나아가 덴마크같은 선진 농업국은 향후 국가적으로 “화학농업을 폐기할 것” 이라고 공언했다니 21세기 농업의 화두는 “유기농” 임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유기농의 메카 - 홍성

현재 제가 사는 홍동면 소재지의 농협은 농약과 화학비료의 매출이 미미합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오리농을 하는 까닭입니다. 저희만 해도 농토 전부를 유기농으로 재배합니다. 유기농의 어려움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는 화학농법에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당장 저희 아내는 귀농 4년만에 손가락 인대를 끊어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잡초를 매느라고 호미를 달고 사니까 손가락에 건초염이 온 것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건초염이란 관절을 혹사하는 사람들 - 이를테면 프로야구 투수의 어깨 건초염처럼 - 에게 주로 온다고 합니다.

논농사만 해도 체초제 두어 번 뿌리면 논에 들어갈 일이 별로 없지만 유기 농가는 논에 오리나 우렁이를 넣더라도 적게는 한 번에서 세 번까지 논을 매어야 합니다. 논을 매본 분들은 그 어려움을 잘 압니다. 6,7월 무더위에 볏잎은 눈을 찌르고 볏대에 허벅지, 손등, 팔뚝을 스쳐 풀독이 오르기도 하고 어떤 생산자님은 하도 논을 매니까 손톱이 닳아 손톱을 깎을 일이 없습니다.

이제 저도 트랙터를 보유했지만 귀농후 5년동안은 경운기로 로우터리(흙덩이를 부수는 일 ; 碎土作業) 작업을 했습니다. 유기재배 제초법중에 모심기전 로우터리 횟수를 늘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논에 일찌감치 물을 대고 풀나기를 기다렸다가 풀이 나면 풀을 잘게 부수는 방법입니다. 기계의 힘을 빌려 제초하는 방법인 데 경운기는 작은 기계라 로우터리 회전수가 느립니다.

어느 해인가 로우터리를 작업을 했는데도 풀이 죽지 않아 논위로 파랗게 떠 다녔습니다. 그냥 놔 두면 모두 뿌리를 내릴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도 바람이 불어 논 한쪽으로 몰렸습니다. 이때다 싶어 아내와 어린 딸애까지 총동원하여 채반을 가지고 풀을 건져내는 데 일하면서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논속에서 고기라도 잡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진행되고 아직도 귀농(歸農)보다는 이농(離農)이 대세이지만 ‘곡소리날 때 들어가라’고 아직 우리 농촌에 희망의 불씨는 남아있다고 봅니다. 당장 저희처럼 IMF와 상관없이 농사를 짓고 싶어 귀농교육을 받고 내려오려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또한 농촌 총각의 1/3이 외국 여성과 결혼한다지만 처녀의 몸으로 단신 귀농하거나 건실한 농촌 총각이 있으면 결혼하겠다는 분들도 자주 보았습니다. 저희 아내만 해도 ‘농촌에 뼈를 묻겠다’고 하니 남편된 이로 참 든든합니다. 예전에 개그맨 안어벙의 ~ 빠져 봅시다! 란 말이 유행이었습니다만 농사의 진정한 매력에 한 번 이라도 빠져본 사람은 다른 일을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발견한 내면의 가치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체험과 흡사합니다.

최근 쌀이 남아돌아 큰 문제가 되고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해법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덴마크처럼 국가 차원에서 논농사를 과감히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생산량은 자연스럽게 감소될 것이고 소비자에게는 보다 안전한 쌀이 공급되며 유기농 쌀인만큼 대외적인 가격 경쟁력도 커질 것입니다.

현행 WTO체제에서도 그린라운드(Green Round)라 하여 친환경농업에 대한 보조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농가의 소득이 줄어든다면 정부에서 차액을 보전하면 됩니다. 유기재배 방식이라 쌀값이 어느 정도 올라도 소비자들이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우리쌀을 외면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단순한 견해인지 몰라도 글쓴이가 보기에는 현재 이 방법 이외의 다른 대안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밭작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우리 농촌과 농업은 분명히 위기입니다. 하지만 위기란 활용하기에 따라 위대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홍성이 유기농의 메카로 거듭난 것은 뛰어난 지도자와 넘쳐나는 오염원인 축분(蓄糞)을 유기질 비료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 때 우리의 적성 국가였던 쿠바의 예를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쿠바는 중남미의 사회주의 국가로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나라 경제가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소련이 붕괴되자 화학 비료와 농약, 석유 등 모든 것이 끊겼습니다. 그러자 쿠바 정부는 위기를 기회로 아예 화학 농법을 폐기하고 범국가적 자원에서 유기 농법을 장려하여 유기농에 관한한 세계 최선진국으로 변모했습니다.

지금 지구촌은 쿠바식 유기농 따라잡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쿠바의 국민들은 도심의 나대지를 활용한 유기농 텃밭에서 부식(副食)의 자급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덤으로 얻었습니다. 유기농은 단순히 농약과 화학비료를 대신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 나아가 다음 세대의 지속가능한 농업과 건강한 미래를 담보하는 바른 농사법인 것입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우리 선배 귀농인들도 이제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반 농민들과 똑같이 농약치고 비료치며 농사지을 요량이었으면 지금과 같은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앞서가는 농부들은 생명역동농법이란 농사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조금 생소하지만 별의 기운을 받아 농사를 짓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당근을 심더라도 뿌리 작물인 당근에 길(吉)한 날을 골라 파종하는 것입니다. 무슨 미신같지만 확실히 검증된 농법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도 이와 비슷한 농법을 실천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초상집에 다녀온 날은 볍씨를 파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가득한 씨앗에 자칫 슬픈 기운이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유기농을 ‘마음의 농업’ 이라 하고 농사일을 수도자의 수행에 비교하나 봅니다. 저 역시 귀농학교 다닐 때 풀무학교 홍순명 선생님의 엽서중 한 구절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사는 바른 시골사람이 되길 바라며...” 라고 쓰셨지요. 그 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구절을 되뇌이고 있습니다.

사실 농(農)의 진정한 의미는 曲(노래)+辰(별), 즉 별의 노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농사(農事)란 결국 별의 노래, 별의 리듬에 맞춰 농부가 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지금, 농촌은 여러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며칠전 모 대학의 귀농 장기 연수 과정 연수생들의 홍동투어를 안내했습니다. 그 전날엔 그분들께 귀농 선배로서 체험담을 들려줬구요. 그때 보내드린 글입니다. 작성한지는 몇년 되었기에 지금과는 좀 달라진부분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바나나의 소독과정 등등...옛글을 보며 귀농 후배님들께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 올려 놓았습니다. 올 해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빕니다.
출처 : [우수카페]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
글쓴이 : 훌러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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