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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내린터 팜핑캠프/하늘터 주변즐기기

하늘내린터의 역사적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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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원 또는 둔도암 고증자료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6반 소재)             
         1, 절     골
    절골(寺谷) : 욋골과 바깥저울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3m 높이의 석탑이 있다. 이곳에 있었던 절 이름이 문헌상에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관음원(觀音院)"이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사학자였던 故 김중권(金重權)씨는 원대리가 은리(隱里)로 표기된 고적자료를 들어 "숨은 곳에 있는 절"이라 설명하고 신라말기에 낙랑공주와 죽방부인 박씨가 머물러 있던 "둔도암"이라 해석을 한 바 있다

         2, 사찰의 역사
    확실한 문헌은 없으나 지역적으로 이절은 고구려의 영토 하에 있었다, 고구려시대 600-668년경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낙랑공주와 죽방부인이 머물러 있었다하면 그때는 신라 말 서기930년경이다, 신라 말 인물 경순왕, 김부대왕, 경순왕의 비 죽방부인, 그의 후손 낙랑공주, 죽방부인의 아들 마의태자등이 모두 이 시대에 인물이다, 마의태자는 후에 금강산으로 갔다고 하나 승려로 일생을 보낸 것으로 본다. 마의태자 동생도     범공(梵空)승려가 되였다고 한다, 이전에 사찰이 이미 있었다 하면 고구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의 천년사직을 이끌어오던 김부대왕 및 등등이 중창 및 개창을 하였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일반승려가 기와를 구어 사찰을 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규모에 기왓장이며 흔적으로 볼 때 신라를 이끌어오던 왕의후손이 중창을 했을 것이다, 또한 마을지명으로     볼 때, 기와는 왯고개(와현)에서 만들어 운반하였을 것이다, 인근마을인 김부리 갑둔리 관대리 정자리등 지명이름이 이를 말해준다, 신라후손들은 이곳을 오가며 서라벌의 장엄했던 불교를 꽃피우고 다시 나라를 찾아 신라의 역사를 이여 가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 예로 신라가 멸망한지 200년 후에 영남지방에서 무신들이 들고일어난 군사 쿠데타가 그것을 증명한다.
    나라를 잃은 신라가 통곡하며 재기의 칼을 갈며 희망을 품었던 곳이다,
    현제 절골 탑을 중심을 (탑선골)위300미터지점에 촛대바위가 있고, 탑 우측골(안저울고개 쪽) 300미터 지점에 부처바위가 있고, 탑 아래쪽 좌측 골짜기는 불당(佛堂)골이라 부른다, 아마 이때는 여러 동의 사찰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2006년 수해로 인하여 이마져 산실이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이절이 약300~400년 전에 빈대로 인하여 불태웠다 하는데, (이는 절을 없애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의 무리들을 보고 빈대라 칭하였다,)
    폐사가 된 시기는 년도로 추정할 때 아마, 현 파고다공원, 전 원각사지 사찰과 집을 헐어 사냥터로 만든 조선시대 연산군 때에 불타지 않았나 생각한다. 절 이름도 처음에는 관음원으로 부르다가 죽방부인이 있을 때는 둔도암으로 부르다가     다시 관음원으로 불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예로 석탑을 살펴보면 신라의 탑 형식이 남아 있으며 탑 가운데 분명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있다, 그러므로 탑과 기와는 신라 왕권후예들이 이루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원대리
    원대리 :     院집이 있었음으로 원터, 원대(院垈)라 했다고 전하고, 관음원(觀音院)이란 소암자(小庵子)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19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원대리(院垈里)라 하였다
    1948년 38˚선이 생기면서 38˚선 이북 인제군이 분단되어 공산 치하로 넘어가고 38˚선 이남 원대리는 홍천군 신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51년 에 다시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의거하여 인제읍 원대리로 으로 승격되었다.

         4, 신라의 마지막 염원
    견훤에게 살해된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은 ‘공경하고 순한 왕’이라는 시호이며 그가     후에 인제에서 관대리를 중심으로 재건의 꿈을 꾸었던 김부(김부대왕)이다. 견훤에 의해 왕이 되었으면서도 견훤을 극도로 미워하고 반면,     왕건에게는     순종했던 인물이었다.     삼국사기,     (경순왕이) 전 임금(경애왕)의 시신을 운반해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하는데, 그는 이 통곡을 복수로 승화시키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내면화했을 것이다.     경순왕은 재위 5년(931) 왕건을 만난다.
    이 만남은 그 전해에 왕건이 견훤을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에서 대파했다는 소식을 들은 경순왕이 사신을 보내 치하하면서 만나기를 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왕건은 겨우 기병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 근교로 오는데, 신라의 자리에서 볼 때 반란군 수괴인 그가 불과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로 왔다는 사실은 신라를 이미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이 무렵 경순왕을 포함한 신라 지배층은 견훤은 원수로 여기면서도 왕건은 구원군으로 생각하는 이해하지 못할 기류가 지배하고 있었다. 견훤이 서라벌 침입때 보인 무도한 행위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견훤이나 왕건이나 신라 멸망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았다.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까지 가서 왕건을 영접하는데 ‘삼국사기’가 비록 고려의 정통성에 입각해 쓴 사서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도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경순왕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와서 마주 앉아 정다운 인사를 극진히 나누고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경순왕이 ‘나는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해 화란(禍亂)을 불러 일으켰고 견훤이 불의한 짓을 자행해 나의 나라를 상하게 하니 이렇게 통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며 우니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왕건)도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다.”(‘삼국사기’ 경순왕 5년) 나라를 빼앗으러 온 왕건에게 견훤을 욕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 위로를 받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서라벌 사람들이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범이나 이리떼를 만난 것 같더니 오늘 왕공(왕건)이 왔을 때는 부모를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천년 사직을 빼앗으려는 자를 ‘부모’라고 표현하는 지배층을 둔 신라에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경순왕은 재위 9년(935) 드디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기로 결심한다. “사방의 토지가 모두 타국의 소유가 되니 국세가 약하고 외로워져서 스스로 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더니,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혹자는 옳다고 하고 혹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경순왕 9년)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마의태자이다.
    그런데 ‘마의’라는 이름은 역사서에 기록된 정식 이름이 아니다. ‘삼국사기’는 다만 ‘왕자’라고만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왕대자(王大子), 즉 왕태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마의’라는 이름은 그가 삼베 옷, 즉 마의를 입고 평생을 보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자가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 있는데,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공고히 하고 있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 둘지언정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주겠습니까. 하니 경순왕이 ‘이렇게 고립되고 위급한 형세로는 나라를 보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봉휴를 시켜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그러나 경순왕을 포함한 신라 지배층에게 남아있는 것은 화랑정신이 아니라 견훤의 서라벌 침입 때 겪었던 두려움뿐이었다.    
    그런데 마의태자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기록들이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부도(浮圖·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梵空)이라 했으며 그 후에 법수사(法水寺·성주군 가야산 남쪽에 있던 절)와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 라고 적어 마의태자 이외에도 왕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외에 경순왕의 왕자가 8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왕성(王姓)이었던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는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가 그런 책인데, 여기에는 경순왕에게 두 부인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인조 20년(1642)에 편찬된 이 책은 경순왕의 부인은 석씨와 박씨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여덟 왕자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 중에는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려 하자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으며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라는 기록을 하고 있으나 마의태자 유적비가 인제군 관내에 있는 것으로 보면     둔도암 등 인제에서 재기를 꿈꾸다 무의로 돌아가자, 금강산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금강산으로 들어간 왕자가 두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현재 경주김씨 족보에는 경순왕의 첫째 왕비인 석씨 부인에 대해서는 누락되어 있고, 다만 왕건에게 귀부하기 전의 죽방부인 박씨와 귀부한 후에 얻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만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 죽방부인 박씨의 장남이 마의태자가 된다. 그러나 일제시대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는 경순왕의 첫째 부인을 석씨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경순왕의 왕자들에 대해 서로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왕건에 귀부한 경순왕을 따라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된 세력과, 마의태자를 따라 나섰던 세력 사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마의태자가 경주를 떠날 때 여러 사람들이 뒤따랐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건에게 귀부하러 갈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나 이어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항복 행렬이 이 정도라면 항복을 거부하고 떠나는 마의태자 행렬도 그리 단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의태자의 행보는 개인적 행보가 아니라 신라의 장래에 대한 강경정책의 행보이기 때문에 마의태자의 노선을 지지한 신라인들은 그를 따라 나섰을 것이다.
    삼국사기, ‘빈녀양모(貧女養母)조’의 1천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효종랑(孝宗郞)은 바로 마의태자의 조부였다. 효종랑이 1천 낭도를 거느린 화랑이었다는 사실은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 역시 화랑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마의태자가 그냥 마의초식하다 죽으러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신라 부흥운동을 하기 위해 떠난 것이라는 주장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 왕자 중 금강산으로 간 왕자는 마의초식하다 죽었지만, 설악산으로 간 왕자는 신라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는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발음이 똑같은 이 마을명의 김부는 경순왕이 아니라 마의태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인제군지’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 ?)은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한다면서 인제읍지(邑誌)를 인용해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했다.     이규경은 김부를 마의태자가 아니라 경순왕으로 이해했지만 신라의 마지막 화랑 마의태자의 유적은 오늘도 산천 곳곳에 남아 천년 사직 신라의 허무한 종말을 위로해 주고 있다

         5, 마의태자와 재건운동
    신라 최후의 왕 김부(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935년(경순왕 9) 10월 고려 건국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경주에서 올라와 인제군 상남과 가리산 피래에 은거하다가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베옷[麻衣]를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나 무덤등 확실한 자료는 없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에는 이렇게 전한다,‘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다,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한다,    
    신라후손 유적지 인제군은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관대리는 신라가 나라를 복원 하고자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또한 소양강 땜을 막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군사기지 3군단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이미 신라 때에부터 군사기지였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 시대에도 군사훈련 장소일수 있다. 갑둔리 정자리등 주변 마을도 이처럼 고려를 세운 왕건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시 세우기를 열망 하였던 곳이다.
    관음원에서 둔도암으로 암자 이름을 고친 것도 뜻을 같이한다, 숨어서 뜻을 이루려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름이 아닌가.
    항려운동의 신라인의 군사 비밀기지였던 인제 물론이때에 관음원 즉 둔도암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김부리 관대리 갑둔리 남전리등 여러 곳에 암자를 지어놓고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며 재건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 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