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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직 여공무원, 8년 연하 남자와 사는 행복한 시골 생활

하늘내린터 원장 2012. 2. 12. 14:01


전직 여공무원, 8년 연하 남자와 사는 행복한 시골 생활
" 나란히 자전거 타고 시골길 달리는 순간, 우리는 행복합니다"
다솔감초 : 기자
시골 생활에 만족한다는 김가람 최은묵(오른쪽)씨 부부. 뒤의 그림은 최씨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다가 만났다. 남자 나이 30세, 여자 나이 38세였다. 인습과 상식을 뛰어넘은 만남과 결혼, 후회 없는 퇴직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하기 위한 시골행. 두 사람은 나란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산을 보고 강을 보며 자연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귀농을 원하는 부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생업이다. 과연 시골에서 무얼 해 먹고 살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부가 한마음로 귀농을 원하는가 이다. 불행히도 많은 부부들이 삐그덕거린다. 한쪽은 시골로 가고 싶어하는 반면, 다른 쪽은 도시를 떠나는 순간 인생이 끝나는 줄 안다. 한쪽만 귀농을 해 부부가 생이별을 하기도 하고, 시골로 들어갔다가 도로 도시로 나오기도 한다. 심한 경우 갈라서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충북 옥천에 귀농한 김가람 씨(33세)와 최은묵 씨(41세)는 하늘의 복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은 귀농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었고, 시골에 내려와서도 둘 다 만족하고 있다. 집 밖에 떨어져있는 불편한 재래식 화장실도, 시커먼 그을음이 잔뜩 낀 턱 높은 부엌도 이들에겐 그리 불편하지 않다.
최은묵 씨의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에 실린 글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시골생활에 만족하는 지를 가늠할 수 있다.

“벽은 흙집이어서 오리지널 황토방이다. 부엌엔 아궁이가 3개 있고, 작은방에 따로 아궁이가 있다. 장작을 때면 골고루 따뜻한 걸 보아 구들이 잘 놓아진 듯하다. 창호문은 앞쪽과 뒤쪽이 있어 양쪽을 열면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방을 통과한다. 에어컨 광고에 왜 대숲바람처럼 시원하다는 멘트가 나오는지 이해가 간다. 나비나 날벌레들도 문 앞뒤로 드나든다. 그냥 얻은 집이지만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집에 살 수 있게 되어 시골 생활의 첫해를 집에 대한 만족감으로 보내고 있다.”

지난 1월 초, 옥천군 장수리 점동마을에 있는 김씨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경부고속국도를 올라탔다. 금강휴게소 내에 있는 금강IC로 나와 구고속국도를 타고 청산 방향으로 20여km를 달려 궁촌재를 넘고 산계교 직전에서 좌회전을 했다.
김가람 씨가 가르쳐주는 대로 오른편으로 강을 끼고 달렸다. 구불구불 산을 오르자 수백 년은 됨직한 정자나무가 언덕배기에 나타났다. 나무를 중심으로 세갈래 길이 나 있었다. 오른편은 영신사 가는 길, 왼편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 가운데는 들판으로 내려가는 길. 왼편으로 마을 안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아니었다. 다시 돌아서 나와 절 표지판을 따라 차를 몰았다.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달렸다. 제대로 간 듯하다. 김씨가 1톤 트럭을 타고 마중을 나와 주었다. 차를 다리 옆에 세워두고 김씨의 차로 옮겨 탄 후 논길을 달려 김씨의 집에 도착했다.

오래된 감나무 두세 그루, 금방이라도 먼지가 돼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낮은 흙담, 소 대신 장작이 가득 쌓인 외양간... 붉은 지붕의 일자형 흙집이다. 집 뒤는 대나무 숲이고, 오른편에 자그만 텃밭이 있다. 집 앞으로 논밭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고 논 뒤로 강이 흐르고 강물에 높은 산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옥천은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에 왔을 때도 겨울이었다. 옥천하면 떠오르는 색감이 파스텔 톤의 갈색이다. 까만색의 나뭇가지들은 건조하게 메말라 있고, 집은 하나같이 지은 지 오래됐으며, 논과 밭은 회색빛이 도는 갈색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기둥처럼 빛바랜 갈색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물감이 묻어나왔다.
그런데 김씨의 집 바로 앞산의 허리가 흉하게 파헤쳐지고 있었다. 굴착기 한대가 산의 속살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둥 둥 둥 굴착기 소리가 조용한 산마을의 정적을 깼다. 옥의 티였다. 화장품 회사에서 원료용 흰돌을 캐가는 중이란다.
“작년 겨울에 왔을 때는 저렇게 일을 하지 않아 몰랐어요. 다 좋은데 저게 하나 흠이에요. 저 소리 때문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있어요.”

부엌도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가마솥 풍경이 정겹다.

김씨의 부인 최은묵 씨는 부엌에 있었다. 천정 높고 벽에 시커먼 그을음이 낀 옛날 시골집 부엌이다. 다져진 땅바닥에, 드나드는 턱도 높다. 반대편 문으로 대밭이 보였다.
툇마루를 올라서 비닐을 댄 창호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두 평 조금 넘는 작은 방이다. 따뜻했다. 벽과 천정에 창호지를 새로 발라 깨끗했다. 아랫목에 이불이 깔려 있다. 가구라야 작은 책상과 개다리소반이 전부다. 커다란 MTB자전거 브로마이드가 벽에 붙어 있다. 컴퓨터도 없었다. 모뎀은 되지만 속도가 느려 쓰지 않는다고. 옥천도서관에 나가 그곳 컴퓨터를 쓰곤 한다.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와서 세수도 못하고 있어요.”
김씨 부부는 이 집을 공짜로 얻었다. 이 집에 혼자 살던 할머니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 자식 집으로 들어가면서 김씨 부부에게 빌려준 것이다. 김씨 부부는 지난해 1월, 고개 너머에 있는 밭을 구입했다. 평당 1만 5천 원을 주고 1천 평을 구입했다. 이 밭은 귀농카페에 올라온 매물이었다. 한 회원이 샀다가 사정이 생겨 도로 내놓은 것을 김씨 부부가 인터넷을 통해 보고 구입한 것이다.
밭을 사고 난 후 부부는 마을 주민들에게 집을 얻는다는 입소문을 냈다. 2월 말에 부탁을 했는데 바로 3월1일에 연락이 왔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이 집이 비었다고 알려주었다. 보은에 사는 할머니의 손자는 김씨에게 “빈집을 그냥 두면 집이 상하니 불 때고 살라”고 했다. 김씨는 돈 한 푼 안들이고 튼튼하게 잘 지은 황토집을 거저 얻은 셈이다. 손자는 들어와 살지 않는다고 하니 10년은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가시는 바람에 장독대에 고추장이 그대로 있어요. 호미도 낫도 다 있어요. 그 덕에 여기 내려와서 농사 도구 하나도 사지 않아도 됐어요. 집도 손을 거의 안보고 그대로 삽니다.”
집세를 내지 않는 대신 할머니의 손자를 만나면 점심 대접을 한다고. 점동마을은 17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이름이 상징하듯 옹기를 굽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묘지기 자손들이 칡뿌리 캐고 살던 지역이다. 석탄광도 많고 탄광목욕탕도 남아 있다. 물이 좋아 여러 생수 회사들이 들어와 물을 퍼 간다.

김가람 씨와 최은묵 씨는 8년의 나이 차가 난다. 남자 쪽이 적다. 그렇지만 얼핏 보면 차이를 못 느낀다. 최씨가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얼굴도 작고 체구가 작아서인 듯하다.
김씨는 대구 출신으로 고등학교는 삼천포에서 다녔다. 경북대 농대를 나와 실험실에서 1년간 지내다 부산에서 식품회사에 다니던 중 최씨를 만났다. 김씨는 자전거가 취미이다.
최씨는 서울토박이로 건국대 축산학과를 나왔다. 농업기반공사와 해군군무관 등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다. 최씨는 답답한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주말에는 등산을 다녔다. 그러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전거를 타게 됐다.
두 사람은 아마추어 자전거여행 동호회 회원들이다. 김씨는 부산에서, 최씨는 서울에서 활동했다. 최씨는 자전거로 개포동 집에서부터 직장이 있는 대방동까지 올림픽자전거도로를 따라 출퇴근 할 정도로 자전거 매니아이다.
“처음엔 할 만했어요. 그런데 땅바닥에 가라앉은 매연을 들이마시면서 페달을 밟다보니 회사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기침이 나오더라고요. 자전거로 폐활량이 커져서인지 고통을 느낄 정도였어요. 석 달 만에 그만 두었어요.”

두 사람은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나 결혼했다. 최씨는 서울에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2003년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부산에서 자전거 동호회 정모를 했다. 서울의 회원 몇몇이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왔다. 부산의 회원들은 서울 회원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돌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친목을 다졌다. 서울 회원들의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부산 회원들이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추석 무렵이라 집안 일로 하나, 둘씩 빠져나가 나중엔 김씨 혼자만 가게 됐다. 기차로 올라갔다.
김씨는 낮에는 서울의 회원들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회원의 집을 방문했다. 자연스레 최씨의 개포동 집에도 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얘기를 하다보니까 저 하고 생각이 맞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이 사람이 직장 생활을 조만간 그만 두고 조용한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김씨의 말이다. 김씨는 평소 결혼 상대를 가까이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전거를 좋아한다면 일단은 운동을 좋아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전원생활을 원한다면 군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김씨가 찾는 여인인 셈이다.

“자전거 타는 남자들은 여자도 자전거를 타게 하려고 수백만 원짜리 값비싼 자전거를 사주기도 해요. 그러나 타지 않는 여자들이 많아요. 그런 점에선 더할 나위 없이 제가 좋은 거지요.”
최씨의 말이다. 큰 부분이 맞으니 그 밖의 소소한 일들은 볼 필요도 없다. 여자의 나이도 김씨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씨 또래의 여성들은 좋은 직장, 아파트 등 김씨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요구할 수도 있어 부담이 될 수 있다. 최씨는 물론 그런 것들은 살면서 같이 마련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의 소유자이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짧은 바지에 쫄티를 입고 되는대로 행동했어요. 방심했지요. 그래서 이 사람의 눈에는 제가 어리게 보였나 봅니다.”
최씨의 말이다. 최씨의 결혼관, 인생관도 사뭇 달랐다. 좋은 학교 나와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아파트 평수 늘리고, 자식교육에 매달리는 등 비슷한 가치관에 맞춰 사는 게 지루하게 보였다. 당사자만 좋으면 되는데 주변의 시댁 등 인간 관계가 복잡한 것도 힘겹다. 귀순용사, 고아 중에서 상대를 찾을까도 했다면서 최씨는 웃었다. 최씨는 그런 인연을 만나지 못해 결혼이 늦었다.

“월급쟁이는 안 당기더라고요. 이 사람이 자기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점을 높이 산 거지요.”
최씨의 말이다. 김씨는 서울에서 사흘간 지냈다. 그 사이에 김씨는 최씨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최씨는 그 자리에서 “좋다”고 했다. 너무나 쉽게 오케이라는 대답을 듣자 김씨 쪽이 오히려 미심쩍었다. 김씨는 최씨에게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시간을 주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날, 최씨는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갔다. 기차가 출발하고 2시간이 지난 후 김씨는 최씨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다. 최씨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결혼을 실감했다고 한다. 당시 김씨가 30세, 최씨가 38세였다.

김씨 부부는 작년 한 해 동안 텃밭 수준의 농사를 지었다.

두 사람은 현재 젊다. 그래서 나이차를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10년 후, 20년 후에는 나이차가 심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김씨는 “숫자상의 차이는 문제가 안 된다고 봐요. 마인드가 문제이지요. 나이가 젊어도 늙게 사는 이가 있고 나이가 많아도 젊게 사는 사람이 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다. 예식장에서 올리는 결혼식을 생략했다. 식을 치른 신랑신부는 비행기 타고 떠나고, 하객들은 밥 먹고 돌아가는 보통의 결혼식은 이들에게 낭비이자 성의 없는 형식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신 집안 어른과 친지들을 모시고 함께 식사를 하고 인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결혼하자마자 최씨는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원래는 연금을 탈 때까지 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다녀야 했다. 그렇지만 답답한 직장에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지루했다. 돈보다도 원하는 삶이 더 중요했다.
“돈이란 내가 벌든지, 아니면 조금 덜 쓰면 되는 거잖아요.”
김씨의 말이다. 김씨 역시 식품 회사를 그만 두었다. 최씨가 먼저 그만 두라고 했다. 어차피 시골로 들어갈 바에는 적은 월급 받는 것 보다 농사일을 익히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김씨는 시골로 들어가기 전 준비를 많이 했다. 귀농 관련 책자를 거의 다 섭렵했다. 인터넷상으로 귀농 카페 활동을 하며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해 귀농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사람들을 사귀었다. 자연농업 연찬을 비롯 흙살림 등 유기농 관련 단체 교육을 받고, 집짓는 것도 배웠다. 짧은 시간이지만 농장에서 일도 해보고 돼지도 길러보았다.
두 사람은 주말에 시간을 내 전국으로 땅을 보러 다녔다. 경남, 경북 쪽을 다녀봤다. 아무 마을이나 음료수 사들고 들어가서 마을 주민에게 빈집을 알아보았다. 영주, 봉화도 갔다. 울진은 안쪽으로 너무 골짜기였다. 밀양도 좋았다. 강원도는 여윳돈이 많아 난방비가 충분하면 몰라도 자신들에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시골로 들어간다 해도 자전거동호회와 각종 인터넷 카페 모임에 참석하는 날이 많다. 남쪽 지방처럼 한쪽에 치우치면 안된다. 옥천은 그런 점에서 딱 떨어졌다. 서울에서도 2시간, 부산에서도 2시간, 전국 어디서나 2시간 대이다. 옥천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땅을 구입하면서였다.

“귀농을 하려면 먼저 땅을 사는 게 나아요. 땅은 한정돼 있고 외지인들은 계속 사들이고 있어요. 우리도 여유만 있다면 땅을 사두었다가 귀농하는 지인에게 수고비 정도만 받고 넘겨주고 싶을 정도에요.”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나이가 귀농 연배로는 젊은 축에 속하지만 땅과 관련해서는 빠른 것도 아니라고 한다. 1년만 일찍 들어왔어도 사고 싶은 곳의 땅을 더 싼 가격으로 장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맹지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런 땅을 쳐다보지 않는데 그거 아니에요. 집을 짓는다면 못 쓰는 땅이지만 밭으로 사용한다면 값도 저렴하고 아주 좋은 조건의 땅이 됩니다.”

자전거는 이들 부부에게 소중한 인연의 고리이다.

두 사람은 2005년 4월, 생면 부지의 땅 옥천으로 들어갔다. 2003년 9월에 만나 그 해 11월에 결혼했으니 1년 5개월 만의 도시 탈출이다. 귀농 준비를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와서는 맘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작물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과연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불안하고 초조했던 시간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주변 환경에 안 좋은 것도 보이고, 농사 짓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상황도 알게 되었고, 농산물 가격 조건도 안 좋다는 걸 깨닫게 됐다.

최씨는 자신의 퇴직금으로 땅과 트럭을 구입했다. 땅을 사면서 부동산법에 대해 배운 것도 많았다. 최씨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해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림 물감을 구입했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생활비도 빠져나갔다. 통장의 돈은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비닐하우스 지을 돈만 남아 있다고.
“시골에선 천 원 한 장 생길 기회가 없어요. 수입은 없고 지출만 늘어나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최은묵 씨는 시골에 내려온 이후부터 결혼식 축의금을 현금 대신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선물한다. 축의금도 시골에선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동안 그림만 그려서 주었지만 올해는 나무로 액자를 만들어 선물의 품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생각이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지난 여름, 농사 아르바이트를 잠깐 해보았다. 벼 수확철에 수확을 거들고 사과농장에서 사과 따는 일을 했다. 최씨는 사과 따는 일을 한 번 해보고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다.
“일흔 살 할머니에게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사과를 따게 하는데 저에겐 가위를 주지 않더군요. 사과꼭지 따다가 멀쩡한 사과에 흠이 나면 안되니까요. 노인이 일하는 나무 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민망해 혼났어요.”
최씨는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체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친구와 얘기를 하다 의견이 다를 경우 에너지를 쏟으면서까지 자기 생각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골에 와서 자신도 모르는 일이 생겼다. 의견 차이가 나자 끝까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고 설득했다. 친구는 그런 최씨를 보고 놀란 듯 “왜 화를 내느냐”며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김씨 부부의 오래된 황토집. 집 뒤는 대숲이다.

도시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곤 했다. 시골에서는 더욱 그 시간이 행복하다고 한다.
“도시에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신호등에다 자동차 매연, 소음, 사람들에게 부딪치고...여기서는 그런 것에서 해방됩니다. 산 보고, 강 보고, 사람 보면 인사하고그렇게 가면 돼요.”
새소리, 바람소리, 대나무소리도 좋다. 이웃사람들도 좋고, 텃세도 없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일흔 이상의 노인들이다. 젊은이들이 시골로 들어왔다고 잘 대해준다. 마을과 동떨어져 일상의 간섭을 덜 받는다. 부부를 만나러 온 친지들과 맘 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한다. 마을 한 가운데 있다면 그런 일들이 조심스럽다.

최씨가 얼마나 시골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지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는 “아침 볼일”이다. 이들 부부는 1천 평의 밭에 300평 정도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 밭은 놀렸다. 농사 기술도 없이 첨부터 전부 짓는 건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나머지 밭에는 메밀이 예쁘게 자라 있다. 전주인이 밭에 메밀씨를 뿌려놓은 것이다. 꽃 속에는 벌들이 꿀을 따기 바쁘다. 최씨는 자신의 미니홈페이지에 아침 볼일에 대해 적었다.

“앞산의 안개가 걷히는 것을 보면서 메밀 향기를 맡으면서 볼일을 본다. 그리고 나의 응가를 흙으로 덮는다. 이 보다 더 아름다운 화장실은 없을 것이다. 흙을 덮으면 그게 거름이 된다. 거름 속의 미생물들은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인분을 흙으로 돌려놓는다. 사람은 흙에서 난 상추며 배추를 먹고 흙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부인 최씨는 공무원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왔다. 김씨 역시 미련없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러나 처음 시골에 내려와서는 힘든 순간도 있었다. 최씨는 지난 여름 이 집에서 난생 처음 뜨거운 여름을 겪었다. 너무 더워 현기증이 나서 일도 못했다고 한다. 흙집이라 방안이 오히려 시원했다. 햇빛에 밀려 안쪽으로 들어가며 더위를 피했다고 한다.
“도시 생활을 벗어나는 그 사실만 좋았지 실제 시골 생활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어요. 시골 모기는 도시하고 달라요. 지독해요.”
김씨 부부는 지난 1년간 텃밭 수준의 농사를 지었다. 배추 20포기, 무 약간, 고추 80근을 수확했다. 먹을 양을 남기고 부모와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씨는 올해는 토종매실과 곶감을 해볼 예정이다.
“지난 1년간 묘목, 과수에 대한 걸 배우러 다녔어요. 일반 작물은 힘들어요. 제가 키가 커서 밭작물도 힘들고, 땡볕에서 일하는 것도 어렵고... 그래서 정한 게 매실 하고 곶감입니다. 여기 옥천곶감은 옛날에 유명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명맥을 살리지 못해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죽어 있어요.”

김씨 부부는 올해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는 한편 민박도 할 생각이다. 먹거리는 기본적으로 하고 장기적인 수입원으로 과수를 할 계획이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농산물을 판매하고 도시인들을 대상으로 시골 체험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시설은 없다. 집 앞의 강에서 수영 하고, 래프팅도 하고, 낚시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는 것이라고. 김씨 부부는 이런 생각으로 농사를 짓는다.
“고추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대부분은 농약과 살충제, 제초제를 뿌려요. 그런 맹독성 약들로 무당벌레, 메뚜기, 땅거미, 지네는 다 죽어버리고 고추만 살아남아요. 땅이 죽은 땅이 되고 그 대가로 다음해 농사 때는 화학비료와 시중에 파는 퇴비를 구입하는데 많은 경비가 들어갑니다. 농사를 지면 품값도 안남는다는 결론이 나와요. 그런 바보 같은 농사짓기를 우리는 안하기로 했습니다.”

김가람 최은묵 씨 부부는 오랜 시간 밝은 표정으로 자신들의 결혼 스토리와 귀농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밭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박한 황토집과 갈색의 논밭, 오래된 감나무와 두 젊은 부부는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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