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1월, 12살 소녀 최순애는 <오빠 생각>이란 시로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의
동시란에 입선자가 된다.
그 다음 해 4월, 16세 소년 이원수 역시〈고향의 봄>으로 이 잡지의 주인공이 된다.
이리하여 수원의 최순애 소녀와 경남 양산의 이원수 소년은 서로를 발견하고 급기야
1936년 6월 부부가 된다.〈오빠 생각>과〈고향의 봄>의 만남이다.
이 시 속의 오빠는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빠의 부재는 계절의 변화를 더욱 민감하게 감지하도록 만든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계절의 변화가 그토록 새삼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오빠는 부재함으로써 오히려 옆에 있을 때보다 더욱 풍부한 존재감을 선사한다.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는 도처에서 오빠를 본다.
뜸북새, 뻐꾹새, 기러기, 귀뚜라미 소리들은 이 부재하면서 현존하는 오빠의 대체물들이다.
이 시가 지금까지도 우리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오빠'라는 단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오빠는 누이동생이 있어야 성립되는 개념이다.
오빠는 항상 누이의 오빠다.
'누이동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한한 연약함, 끝없는 보호, 그러면서도 한없이 정결한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빠라고
불리는 순간 우리 모두는 누이를 보호하느라 쓸데없이 진지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춘기 소년, 그 태초의 순결한 소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년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반백의 중년이 되며 어느 날 하얀 머리의 노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빠는 영원하다.
이 시는 우리들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는 바로 그 오빠들을 불러내는 애절한 '엘레지(Elegy : 悲歌)'
에 다름 아니다.
이 동요가 작곡되고 불리던 시기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기이다.
그래서 이 동요에서 비단구두 사러갔다는 오빠는 어린 동생의 생각이 떠올라도
조국을 위해 항일운동을 떠난 오빠를 가리키는 아름답고 가슴 아픈 노래라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