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1. 형국론, 간룡법, 장풍법(藏風法)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1. 형국론, 간룡법, 장풍법(藏風法)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정의와 분류
오늘날 풍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서울의 경우는 특히 풍수지리설의 강한 영향 아래 그 입지가 선정된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사상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한 감이 없지 않다.
서울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인들은 풍수지리를 단순히 산소 자리잡기에 관계되는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풍수지리가 본질적으로 지녀왔던 논리성(論理性)이나 지혜성(智慧性) 그리고 엄격한 윤리성(倫理性)은 너무도 무시되어 온 반면, 풍수사상의 피상적이고도 술법적(術法的)인 성격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온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풍수지리사상의 내용과 논리구조에는 확실히 사람들을 혼란시킬 요인이 내재되어 있다.
확연하게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밝혀 이렇기 때문에 저런 결과가 나온다는 식의 설명이 안되는 부분들이 많다.
게다가 땅의 힘, 이것을 지기(地氣)라고 하는데, 이 힘은 직접적이고도 빠르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하고 따져서 그것을 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전문가가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그렇게 나오면 풍수는 지극히 신기한 믿음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풍수는 엉터리 술법으로 전락이 되어버리는 식이었다.
풍수지리사상이란 음양론(陰陽論)과 오행설(五行說)을 기본으로 주역(周易)의 체계를 주요한 논리구조로 삼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전통적인 지리과학(地理科學)으로 추길피흉(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상지기술학(相地技術學)이다.
이것이 후에 효(孝)의 관념이나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이기적인 속신(俗信)으로 진전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토지관(土地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풍수지리사상이 구체적인 이론체계를 갖게 된 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확실치 않다.
중국의 경우, 대체로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와서 풍수지리적 관념이 처음으로 발생하였다고 보는데, 특히 한대(漢代)에 이르러서는 음양설이 도입되어 완전한 풍수원리를 정돈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중국의 풍수이론이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부터 였으리라고 믿어진다.
더욱 확고히 뿌리를 내린 것은 통일신라 말기였지만 풍수적 사고방식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어 온 것이 분명하다.
풍수지리사상의 구성은, 산(山), 수(水), 방위(方位), 사람 등 4자(四者)의 조합으로 성립되며 넓게 보면 두가지의 체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땅에 대한 이치를 논구한 경험과학적(經驗科學的) 논리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지기(地氣)가 어떻게 인사(人事)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하는 기감응적(氣感應的) 인식체계이다.
이 중 오해의 소지가 많은 쪽은 기감응적 인식체계 부분이다.
경험과학적 논리체계 부분에도 오해될 여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분야는 다분히 땅에 대한 경험과 지혜의 축적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너무나 어려워서 생기는 몰이해를 제외한다면 그 소지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
풍수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기(氣)이다.
기는 천지 만물의 존재와 운동의 근본적 법칙이고, 그 있게 함의 원천이다. 천지간(天地間)의 자연현상을 총칭하는 말로서, 천둥 · 번개 · 바람 · 구름 · 눈 · 비 · 우박 · 안개 · 무지개 등은 모두 기의 변화에 기인한다. 기는 음양(陰陽)의 정(精)이며 몸의 활동력의 바탕으로 살아있는 것에 가득 차 있다.
만물 생성력의 근원으로 힘, 바로 그것이며 빛 · 냄새 · 소리 등 인간의 전체 감각기관의 근본적인 존재력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기를 설명하자면 한이 없다.
이 기를 공간적으로 파악하여 땅 속에 흐르는 기, 즉 지기(地氣)의 덕을 얻어 보자는 사상이 풍수이다.
한편 시간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사람이 특정 시기에 받은 기로 말미암아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아 그것을 연구하는 분야를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이라 한다.
더 나아가서 기의 본질은 같은 것인 즉, 천지에 가득 찬 기를 받아들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해 보자는 뜻으로 심신의 수련을 하는 것을 양기(養氣) · 양생술(養生術)이라고 한다.
신선술(神仙術)에서 발달된 방법이다.
여하튼 우리 민족은 사람 속에 있는 기(氣)가 하늘 · 땅 · 우주 · 만물의 기와 통하게 되면 그와 같은 힘을 내게 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천지에 미만(彌滿)한 기나 사람 몸 속에 있는 기나 같은 기인데 왜 그것이 교류되지 않느냐가 의심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제 스스로‘나는 천지 만물과 분립(分立) 되어 있다’고 믿는 자의식(自意識)이 그것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술이나 좌선(坐禪)은 자의식을 떼어내는 일로부터 수련을 시작한다.
한편 수련을 쌓지 않고도 자연의 기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풍수술법(風水術法)이다. 기가 많이 모인 곳에 집을 지어 살면 그 밑에 흐르는 지기(地氣)를 받아 발복(發福)케 된다는 논리이다.
사람은 잠자고 있을 때 자의식이 가장 희박해진다. 그래서 좋은 땅에 집을 짓고 살면 잠잘 때 자연스럽게 기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명혈(名穴) 길지(吉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모든 기가 모든 사람에게 다 잘 맞는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그에게 맞는 기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맞출 필요는 있다. 그렇지만 좋은 기가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기 때문에 그 땅이 길지라면 누구에게나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생기(生氣)가 밑으로 흐르는 땅 위에 집을 짓고 살면 그 기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것이 된다. 또 좋지 않은 기 위에 머물면 그 기의 영향으로 나쁜 병에 걸리고, 좋은 기를 받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
문제는 풍수가 산 사람의 터 잡기 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 모실 자리 잡기에 더욱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죽은 사람의 유골(遺骨)이 받은 기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옮겨질수 있는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풍수에서는 이것을 친자감응(親子感應) 혹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부른다.
부모나 조상의 유해(遺骸)가 받은 기는 자식과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얘기다.
살아있는 사람은 항상 몸을 움직이고 머리로는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가 필요하다.
음식과 호흡을 통하여 필요한 기를 흡수하지만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기(人氣)로 화(化)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이 받은 기는 그대로 그 사람의 것이 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뼈가 땅 속에 묻혀 받는 지기(地氣)는 쓸 곳이 없다.
죽은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쓸 곳이 없는 기는 자연히 자기의 분신인 자식에게 그 기를 보낼 수 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또 이런 비유를 하기도 한다. 나무는 그 뿌리가 좋은 땅을 차지해서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해야 줄기와 잎이 무성해지는 법이라거나, 아무리 엄동설한(嚴冬雪寒) 같은 찬바람이 휘몰아쳐도 입춘(立春) 지나 우수(雨水)가 되어 봄 기운이 서리게 되면 꽁꽁 언 땅 속에 묻혀 있는 씨앗이 움틀 채비를 차리는 것처럼, 기운(氣運)과 기미(機微)는 그 윗대에 물려받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물려 받는다는 뜻이다.
생명체 뿐만이 아니다.
궁궐에 매달려 있는 동종(銅鐘)이 바람도 없는데 제 스스로 뎅그렁 울었다. 후일 알아보니 종을 만든 구리를 캐낸 멀리 있는 구리 광산에 그 시간에 지진이 나서 광산 전체가 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쇠붙이까지도 제 근본을 이같이 따르는데 하물며 사람에 이르러서야 말해 무엇하랴 하는 예증(例證)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친자감응론을 납득할 현대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구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있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없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안(道眼)의 경지에 이른 참된 풍수지관(風水地官)은 어떤 무덤을 보면 그 무덤의 자손의 운세를 알아 맞춘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설명할 수 없다고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물리학도 추정적(推定的 stochastic)이거나 확률론적(確率論的 probabilistic)인 사실을 말한다.
세상에 확정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일이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풍수의 동기감응론도 인간의 이해 범위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이 소론(所論)은 풍수지리 전반에 걸쳐 두루 통하는 일반론이기 때문에 유독 서울에만 해당되는 부분이란 있을 수 없다.
생기(生氣) 가득한 지기(地氣)가 다른 지방보다 유난히 서울에 많으냐 하는 문제는 간룡법(看龍法)에서 살펴 보는 것이 온당하리라 여겨진다
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
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이라는 용어는 지금까지의 풍수 분야에서 독립시켜 사용한 개념은 아니다.
이 말의 출전(出典)은 명나라 초기에 서선계(徐善繼) · 선술(善述) 형제가 쓴『인자수지(人子須知) 자효지리학(資孝地理學)』이란 책의 내용 중 ‘이십사룡(二十四龍) 소주길흉(所主吉凶)’이라는 표현에서 나온 것인데, 여기서는 사람과 관계되는 풍수이론을 종합하여 표현하는 경우에 적용하였다.
소주길흉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풍수사상의 철저한 윤리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건 중국이건 모든 풍수서(風水書)에서 예외 없이 지적하고 있는 문장이 하나 있다. 원래 역경문언(易經文言)에 나오는 말이지만 요약하면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은 앞으로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고, 악한 일을 많이 한 집은 앞으로 반드시 재앙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다.
명혈(名穴) 길지(吉地)는 반드시 적선(積善) 적덕(積德)을 하여야 차지할 수 있다거나, 아무리 거금을 들여 당대 최고의 명풍수(名風水)를 초빙해서 좋은 땅을 잡은 들, 그 땅을 쓸 사람이 생전에 악행(惡行)을 많이 했으면 소용없는 허혈(虛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그런 예들이다.
살아 계신 부모 보기를 빚장이 대하듯 하던 사람이 돌아가신 뒤 부모의 뼈를 부귀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아 온갖 짓을 다하여 진혈(眞穴)을 구해본 들 그것은 헛일일 뿐이다.
또 소주길흉론에서는 땅을 쓸 사람의 사주팔자(四柱八字)가 그 땅의 오행(五行)과 상생(相生)되는 지도 따진다. 물론 사람의 10간(十干) 12지(十二支)도 문제가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주명리학과 풍수지리학의 만남으로 지인상관설(地人相關說)인데, 여기에 천(天)이 합쳐지면 천지인(天地人) 합일(合一)의 경지에 이른다.
이 때 천(天)은 택일(擇日)의 문제로 대변이 된다. 그 자리를 쓴 날의 오행과 간지(干支)는 결국 그 날의 천기(天氣)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택일과 풍수의 명리(命理)의 만남은 천지인 합일이 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사람의 체질상 어떤 풍토에 잘 맞거나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소주길흉론에 관계되는 풍수설화(風水說靴8는 서울에서도 상당히 많이 수집된다. 천편 일률적이라 할만큼 내용은 틀에 박힌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표현되어 왔다. 가장 전형적이라고 여겨지는 한가지 만을 수록하기로 한다.
「우암 선생 아버지가 훈장 일을 보고 있었는데 세금을 빨리 내라는 독촉이 왔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인데 세금을 내려고 산 길을 가다가 산모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구출해 주었다.
그래서 산모는 목숨을 건지고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은혜를 갚기 위해 그의 집에 와서 나무도 해다 주고 집일도 거들며 살게 되었다.
하루는 나무를 갔다가 지나가는 스님이 혼자 말로 이곳에 묘를 쓰면 뒤에 큰 학자가 날 것인데 하는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 표시를 한 후 우암 선생의 아버지에게 알려 주었다. 결국 그 자리에 웃대 산소를 쓰고 난 뒤 우암같은 큰 인물을 낳았다.」
그 외에 지명(地名)에 관계되는 풍수설화도 있다.
형국론(形局論)
좋은 땅은 좋은 산이 있으므로 해서 생기는 법이다.
이 산이 좋으냐를 찾는 기술적인 방법은 경험과학적(經驗科學的) 논리체계의 범주에 속한다. 이것이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실제 산을 보기 위하여 산에 들어가 보면 책에서 배운 이론대로 산이 떠올라 주지를 않는다.
소위 풍수가 말하는 바 산은 산일 따름이고, 책은 책일 따름이다(山自山 書自書)의 현상이다.
상당히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때 그 산의 생긴 모양을 사람이나 짐승 · 조류 · 파충류 기타 여러 가지 물체에 빗대어 봄으로써 보다 분명이 그 소응(所應)됨을 알아 보자는 술법이 형국론이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풍수가(風水家) 복응천(卜應天)이 지은 유려한 필체의 지가서(地家書) 『설심부(雪心賦)』가 「물(物)은 인물금수(人物禽獸)의 유(類)로 미루어 헤아릴 수 있고 혈(穴)은 형(形)으로 말미암아 취한다」고 갈파한 바와 같이 분명치 못한 산천 형세를 사람(人) · 물체(物) · 들짐승(獸) · 날짐승(禽) · 뱀무리(龍蛇類) 등의 형상에 유추하여 판단하면 비교적 쉽게 지세(地勢) 개관(槪觀)과 길흉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우주의 만물(萬物) 만상(萬象)은 모두 고유의 이(理)와 기(氣)와 상(像)을 갖기 때문에 물체의 외형에는 그 형상(形象)에 상응(相應)한 기상(氣象)과 기운(氣運)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풍수설에 있어서 보국(保局) 형세와 산혈(山穴) 형체에 따라 이에 소응(所應)되는 정기(精氣)가 그 땅에 엉기어 모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형국론의 이론적 원리이다.
한 두가지 예를 들어 본다.
옥녀단장형(玉女端粧形)은 앞 쪽으로 병풍의 역할을 하는 낮은 둔덕이 있어야 격이 맞는다. 그것이 없으면 옥녀는 귀한 여자가 아니라 길바닥에 나 앉은 화류계(花柳界) 여인(女人)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서울의 강남지역이 개발되기 이전, 말죽거리에서 채집된 사례인데 위의 얘기는 물론 풍수형국론상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예화(例靴8에는 간과할 수 없는 이상한 암시가 뒤따른다. 즉 이 형국의 지세는 예외 없이 개발의 여파에 말려 들더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형국이 개발이 되는 경우 어떤 불합리성이 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옥녀단장형국(玉女端粧形局)에 있어서의 명당(明堂)은 그 산과 앞쪽 병풍산과의 사이에 든 지역이고, 혈처(穴剔8는 옥녀의 생식기 위치가 된다. 풍수의 원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마을은 당연히 명당 터에 자리를 잡는다. 통상 혈처에는 사원(寺院)이나 대가(大家)의 산소가 들어선다.
이 때 예컨대 토지개발공사에서 택지 조성을 한다고 병풍산을 밀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실제로 말죽거리는 병풍산 뿐만이 아니라 주산(主山)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형국론상으로는 길거리의 여자가 되어 버리는 셈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도 그 공사는 불합리하다. 병풍산은 마을의 개인공간(個人空間)을 외부의 사회공간(社會空間)과 차단시킴으로써 마을 주민의 심리를 안정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던 산이다.
일종의 완충공간(緩衝空間) 혹은 점이공간(漸移空間) 기능을 병풍산이 맡아왔던 것이다. 건축심리학(建築心理學)에서도 개인공간으로부터 사회공간으로 완충지대 없이 직접 노출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지적한다. 구조가 좋지 못한 가옥은 문만 열면 안방이 길거리에 그대로 노출이 된다. 이런 집이 좋은 집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위에 예를 든 마을에서도 병풍산을 제거하게 되면 마을 내부가 간선도로에 그대로 몸체를 드러내는 꼴이 되어 버린다. 이런 때는 대지(垈地)의 단위면적당 가격이 좀 높아지더라도 병풍산을 근린공원(近隣公園 neighborhood park) 개념으로 존속시키는 것이 보다 타당한 조치가 된다.
이처럼 풍수에서는 내포된 의도가 오랜 경험의 집적에 의한 지혜의 발로임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은 논리체계(論理體系)가 아닌 인식체계(認識體系), 즉 이해하기 어려운 미묘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그 의도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청량리 경동시장 부근에 ‘찬우물집’이라는 옥호(屋號)의 설렁탕집이 있었다. 이곳의 지형이 날아가는 까마귀가 죽어가는 용에게 먹을 것을 주는 모습의 형국인데 지금의 판단으로는 비오사용형(飛烏食龍形)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원 지형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대충 재구성해 본다면 까마귀가 허기져서 죽어가는 병든 용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것은 풍수형국론을 떠나서라도 한 토막의 훈훈한 미담(美談) 감이다.
여하튼 이에 지신(地神)이 감복(感服)하여 용과 까마귀에게 시원한 물을 제공해 주게 되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찬우물집 터이다.
결국 이 집터는 자연스럽게 용혈(龍穴)이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그 집에는 맛이 좋은 우물도 있었다. 현대 지리학적으로 말하여 음식점 입지도 좋아서 그 집은 큰 돈을 모아 마을을 떠났다.
남산은 서울의 안산(案山)이다. 이 산은 그 형국이 누에의 머리 모양이라 잠두산(蠶頭山)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잘 알다시피 누에는 뽕 잎을 먹고 산다.
그래서 남산의 지덕(地德)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뽕 잎을 대어줄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남산이 막바로 보이는 한강 건너 사평리(沙平里)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의 지명은 잠실(蠶室)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혹은 영동(永東)과 부리도(浮里島)에 누에에 먹일 뽕나무를 심게 한 잠실리(蠶室里)가 두 곳이나 있었다고도 한다.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잠실동(송파구), 잠원동(서초구)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아현동고개를 애우개(兒峴)라고도 한다. 원 지형이 사라져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고개의 모습이 엄마 등에 업힌 아기의 모습을 닮았었으리라 추측이 된다.
우리나라 서부지방의 화강암 구릉지에는 판상절리(板狀節理)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 둥근 모양의 지형을 잘 이루는 화강암과 같은 일부 암석은 괴상(塊狀)으로 존재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지하 깊이 묻혀있던 이러한 암석이 침식으로 지표(地表)에 노출될 때 판상절리(sheeting joint)라고 부르는 독특한 절리군(節理群)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지세(地勢) 환경 아래서는 그런 바위 모양을 찾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서울의 정기(精氣)가 이 곳 애우개를 통하여 빠져 나간다고 여기고, 이 애우개의 어린애를 잡아두기 위하여 이 곳에 모악(母岳)이라는 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있으면 아기(애우개, 兒峴, 阿峴)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안산(鞍山)이 그 곳이다.
풍수상(風水上)으로 용두는 입신양명(立身揚名)과 대성(大成)을 뜻하며 문과(文科)의 장원급제를 나타내는 상서로운 상징이다.
또 구미(龜尾)나 구이(龜耳)는 장수(長壽)와 다복(多福)의 상징인 거북을 뜻하는 말이다. 성주상량(成柱上樑)을 할 때 용은 천(天) · 양(陽)을, 구(龜)는 지(地) · 음(陰)을 나타내는 가택(家宅)을 상징하는 것이며 지명(地名)으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동대문구 용두동과 성동구 구의동(龜耳洞의 음전(音轉)일 듯)은 그러한 예이다.
남산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단 하나 있는 복구형(伏龜形) 명당이라고 잡아 놓은 혈처(穴剔8가 있다. 집 터로는 두 개인데 그것은 거북이의 왼쪽과 오른쪽 눈 자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회현동(會賢洞)인 타락동(駝駱洞)에 있다.
이 외에도 오성(五星)에 관계되는 명당 형국이 있는데 이는 장풍법(藏風法)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사례들은 옛사람의 풍토에 관한 지혜가 설화 형식으로 변질되어 풍수사상에 접합된 경우로서, 표현상의 전근대적인 속성은 어찌할 수가 없다
간룡법(着龍法)
위의 세가지 술법이 설명에 애로가 많은 기감응적(氣感應的) 인식체계라면 이제부터 소개할 내용들은 경험적이고 기술적 성격이 매우 강한 경험과학적(經驗科學的) 논리체계라 할 것이다.
풍수는 땅의 생기(生氣)를 받자는 지리학(地理學)인데, 이 생기가 흐르는 통로가 산이고 산을 용(龍)이라 부른다. 물론 풍수에서 말하는 산의 개념은 서양의 산의 개념과는 다르다. 풍수술법(風水術法)에 따른 산의 기준은 경우에 따라서는 평지의 경우 한 척(尺)만 높아도 산이요, 한 척만 낮아도 물(水)로 보게 되기도 한다. 평지에 혈(穴)이 있는 경우도 땅 속으로 산의 기맥(氣脈)이 통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수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원리가 가시적(可視的) 실체로서 표출되는 사상이 산, 즉 풍수 용어로 용이며, 그 용맥(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조산(祖山)으로부터 혈장(穴場)까지 살피는 일을 간룡법이라 한다. 용 속에는 감추어진 산의 정기(精氣), 즉 지기(地氣)가 유행(流行)하는 맥이 있어 간룡에서는 용을 체(體)로, 맥을 용(用)으로 하여 그것을 찾는다. 용과 맥은 따라서 외면상으로는 한가지인 것이니, 용을 살펴 맥의 선악을 알 수 있어도 맥을 보아 용의 길흉을 알기는 어려운 것이다. 용은 형태가 현저한 것이고, 맥은 용의 속에 숨어 있는 기운의 은미(隱微)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이 있어야만 맥이 있고 맥이 없으면 시체와 같은 용이다.
‘맥(脈) 이란 사람의 몸에서도 혈(血)의 이치(理致)가 나뉘어 겉으로 몸에 행하는 것을 말함’[註]이니, 풍수의 맥도 역시 지중(地中)의 용의 생기가 그 이치를 나누어 지표면 부근에 행(行)하는 것으로 보면 되고, 사람의 맥을 보아 건강 정도를 진단하는 것처럼 용맥(龍脈)도 그 형세로써 길흉을 판단케 되는 것이다.
용은 조산(祖山)이라 불리우는 명산으로부터 시작된 그 산의 본 줄기와 곁가지가 연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인데, 풍수에서 말하는 조산은 모두 중국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크게 셋으로 나누어 남산(南山)은 민산(岷山)으로부터 일어난 장강(長江)과 남해(南海) 사이에 끼인 것이고, 중간(中幹)은 서령(西嶺)에서 일어난 황하(黃河)와 장강 사이에 끼인 것이며, 북룡(北龍)은 곤륜(崑崙)으로부터 출발하여 압록(鴨綠)과 황하 사이에 끼어 이어져 백두산에서 종(宗)을 일으킨 한국 풍수의 조종(祖宗)이 되는 용맥(龍脈)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산곤륜지자손(山崑崙之子孫)’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래 중국인들은 곤륜산을 황하의 수원(水源)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의 중부를 동서로 관주(貫走)하는 전장(全長) 2,500km의 대산맥으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고산(高山), 미옥(美玉)을 생산하는 신비스러운 산이라는 것이 곤륜산에 대한 중국인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주봉인 울 무스타그봉(7,546m)을 필두로 하여 6,000m급 고봉(高峰)이 60개나 있는 대산군(大山群)이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와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 흥미가 가는 점이지만 여기서 다룰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산을 상점(相占)할 때에는 곤륜산과 백두산으로부터의 산맥세(山脈勢)를 순차적으로 모두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상징적으로 대룡(大龍)임을 거기에 비견시킬 뿐, 지사(地師)의 실제 간룡시에는 주산(主山) 뒤에 연결된 내룡(來龍)의 적당한 범위 내에서만 용의 길흉을 판단케 된다.
간단히 말하여 간룡법이란 그 산이 정기의 원천인 곤륜산, 백두산으로부터 잘 이어져 있는지, 병들었거나 죽은 용은 아닌지, 또 복스럽고 순하며 생기를 가득 품은 산인지 등을 파악하는 술법이다.
기(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 그래서 기를 모으는 방법을 풍수라 부르는 것이다. 바람을 타면 흩어지는 기는 산에 의하여 감싸인다. 그러므로 산은 너무나 중요하다. 산을 오래 다닌 사람은 풍수의 술법을 몰라도 기를 끌어 모으는 산을 잘 안다. 풍수를 잘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간룡법을 아는 듯한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이제 여기서는 고려말 조선초 한양 천도 논의과정에서 거론되어졌던 한양과 모악(母岳)의 풍수 간룡법상의 내용을 함께 다루어 보기로 한다.
한양은 오늘날 서울시내 중심가를 형성하고 있는 사대문내(四大門內)와 그 인근을 지칭하는 지명이고, 모악은 현재 서울의 서강(西江), 신촌 일대를 일컬은 것인데, 모악은 간혹 무악(毋岳)이라 기재된 곳도 있다. 예컨대『서울통사』에는 주로 모악을 사용하였고 『서울육백년사』는 모악(母岳)과 무악(毋岳)을 혼용하고 있으며, 건설부 발간의 『한국지명요람』에는 무악현(毋岳峴) 설명에는 무악을 사용했다가 무악동 항목에서는 모악현(母岳峴)이라 기재하는 식의 혼동을 빚고 있다.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마찬가지로 권(卷) 3 산천조(山川條)에서는 무악이라 하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2 산천조에서는 모악이라 명기하고 있다.
지봉(芝峰) 이수광(李邈光)이 ‘부아암(負兒巖)이 집을 나가는 형상이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이 산을 이르기를 모악(母岳)이라 이름하였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모악이 맞고 무악은 무학(無學)에 비유시킨 음전(音轉)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실제로 1 : 25,000 지형도(地形圖)와 『한국지명요람』에는 무학재(無學峴)라는 표기를 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본고(本考)에서는 이후 모악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서울은 대체로 개경(開京)과 함께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강, 임진강 등을 이용하여 내륙지방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고, 또 이들을 타고 황해로 나갈 수도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갈라져 서울 부근까지 이르는 광주산맥(廣州山脈)은 추가령지구대를 가운데 두고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과 호응하며 명지산(1,267m), 국망봉(1,176m), 광석산(1,046m), 양평군의 용문산(1,157m) 등의 높은 산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구성된 지질(地質)이 심히 삭박되어 산맥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높이는 동북부의 가평, 포천 일대는 1,000m 이상으로 상당히 높으나 서부로 향하여 감에 따라 점점 낮아져 서울 부근의 북한산(836m), 도봉산(710m), 인왕산(338m), 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잔구성(殘丘性) 산지가 발달되어 있다.
화강암 산지는 절리(節理)와 풍수작용으로 백운대, 인수봉과 같이 첨각봉(尖角峰)을 이룬 것도 있고, 또 박리작용(剝離作用)으로 돔(Dome)상의 원정봉(圓頂峰)을 이룬 것도 있다. 한강을 건너서는 100m 이하의 구릉지로 되고 나중에는 평야로 이행한다.
서울은 북한산을 최고점으로 하는 고양, 양주 구릉과 경기평야와의 접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주위에 상당히 높은 산악 구릉으로 둘러싸인 분지상 지대로써 동쪽이 약간 열려 청계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남서의 남대문 부근의 분수계[分水界 (36.6m)]가 심히 낮아 용산 방면을 향하여 열려져 있으나 그 동남에 한강이 자연호(自然濠)와 같이 흐르고 있어 방어상 이상적인 지형일 뿐더러, 북서의 인왕산에서부터 북방(北方)의 북악산을 지나 응봉(鷹峰)에 이르고, 동의 타락산[駝駱山 (125m)], 남의 남산(265m) 등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산지 구릉은 자연 성벽(自然 城壁)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이용하여 견고한 축성(築城)을 할 수 있고, 또 성벽의 외방(外方)에는 북에 북한산(836m), 남에 남한산(495m), 관악산(829m)이 솟아 외곽을 이루어 3중의 방위벽으로 되는 천연의 요새지였다. 또 청계천이 동쪽으로 흘러 배수가 잘 되어 토지가 고조(高燥)하고 주연(周緣)을 흐르는 한강은 서해와 연결하여 각지의 물자가 집중되는 위치이기도 하다.
『택리지(擇里志)』에는 이곳의 맥세(脈勢)를
「함경도 안변 철령의 일지맥(一支脈)이 남쪽으로 오, 육백리를 달려 양주(楊州)에 와서는 작은 산으로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 들면서 갑자기 솟아 나와 도봉산(道峰山) 만장봉(萬丈峰)이 되었다.
여기서 동남향하여 약간 끊어진 듯 하다가 다시 우뚝 솟아 삼각산(三角山) 백운대(白雲臺)를 이루고, 또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萬景臺)가 되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는 남향하여 백악산(白岳山 오늘의 북악산)이 되었다. 형가(形家)의 이르는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의 형국(形局)이며 궁성(宮城)의 주산(主山)이라」
하였는데 광주산맥의 흐름을 잘 설명해 준 셈이다.
또『택리지』에서는 한양의 삼각산을 개경의 오관산(五冠山)과 함께 산수수청(山秀水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각산은 도봉산과 연달아 얽힌 산세이다. 석봉(石峰)이 대단히 맑고 수려하여 만화(萬火)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특히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 어렵다.
다만 기세(氣勢)를 도와주는 보필(輔弼)의 산이 없고 고을이 적다. 전에는 중흥사(重興寺) 계곡이 있었으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을 때 모두 깎여져 평평하여 졌다. 성 안에 있는 백악(白岳)과 인왕(仁王)은 석세(石勢)가 사람을 두렵게 하여 살기(殺氣)를 벗은 송악산(宋岳山)보다 못하다. 의지할 바는 다만 남산 한 가닥이 강을 거슬러서 국(局)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수구(水口)가 낮고 허(虛)하여 앞 쪽에는 관악산이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또한 너무 가깝다.
비록 화성(火星)이 앞을 받치고 있어도 풍수가(風水家)에서는 언제나 남향하는 것은 불길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局內)가 명랑하고 숲이 수려하여 흙이 깨끗하고 길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한양에 인사(人士)가 막히지 않고 밝은 점은 좋으나 웅기(雄氣)가 없음이 한이라.」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조선(古朝鮮)은 마한(馬韓)의 땅이다. 경도(京都)는 화산[華山(삼각산, 지금의 북한산)]을 북쪽의 진산(鎭山)으로 하여 용이 도사리고 호랑이가 걸터 앉은 형세이다.」
고 하였고 같은 책의 다른 곳에서도 화산(華山)을 한성부(漢城府)의 진산(鎭山)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국여지비고』에도 화산 즉 북한산으로 한양의 진산을 잡고 있다.
국역풍수상(國域風水上) 한양의 입지(立地) 해석은 한반도 중심 위치로 개성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내룡(來龍)의 맥세(脈勢)는 지형상 개성이 마식령산맥으로 이어지는데 대하여, 한양과 모악은 추가령지구대를 연하여 그 대안(對岸)의 광주산맥세이기 때문에 백두조산(白頭祖山)은 같이 하지만 지맥(支脈)은 다른 계통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개성과 한양은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매우 비슷할 수도 있지만 대축척지도상(大縮尺地圖上)에서 국역(國域)으로서의 입장을 보자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개성은 경기만(京畿灣)의 북안(北岸)으로 개성에서 65km 동남방에 위치하여 서해안과 남부지방을 통할(統轄)하기 쉬울 뿐 아니라 추가령지구대를 이용하여 동북면과의 교통을 쉽게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다로부터의 거리는 개성에 비하여 먼 편이지만 한강이라는 가항(可航) 하천에 임(臨)하여 있기 때문에 수운(水運)도 개성에 비하여 불리하지 않은 편이다.
한양의 내맥(來脈)은 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삼각산인 북한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삼각산에서 종(宗)을 일으키는 형국으로 내룡(來龍)의 맥세(脈勢)에 흠을 잡을 곳은 없는 편이다.
다만 ‘택리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삼각산이 보필(輔弼)의 산을 갖추고 있지 않은(但山無補弼) 단점은 있다. 원래 보필은 오성(五星), 구요론(九曜論)에 나오는 좌보(左輔), 우필(右弼)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호위하는 산이 없음을 지적한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용경(龍經)에 이르기를 진용(眞龍)은 호위하는 많은 산들이 용신(龍神)을 둘러싸야 하는데 특히 산이 정답게 와서 공손히 절을 하는 듯 해야 하며’[註]‘객산(客山)과 더불어 본용신(本龍身)에 내응(來應)하는 산을 두루 칭하여 호룡(護龍)이라 하는데 조종산(祖宗山)을 같이 하는 산이기 때문에 본용(本龍)의 형제와 같은 산’[註] 이라 하여 맥세(脈勢)에 호위의 산이 없음은 풍수에서 꺼리는 바이다.
이것은 용의 개장(開帳)과 천심(穿心)의 관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개장이란 장막을 편다는 뜻으로 용맥(龍脈)의 펼쳐나간 모양이 마치 거대한 장막을 펼친 것 같고 혹은 새가 날개를 편 것 같으면 길격(吉格)이지만, 개장이 없이 단조롭거나 조화가 없어 보이면 생기가 없는 것으로 본다. 천심이란 조종산 또는 주산(主山)의 용맥이 중심을 뚫고 혈장(穴場)까지 나간 것을 말한다.
북한산은 광주산맥 말단부의 구릉성 잔구이기 때문에 천심은 분명히 아니지만 개장이 없어 이런 면에서도 흠이 간다.
특히『지리대전(地理大全)』에 의하면 3중, 5중으로 전호(纏護)된 것을 더욱 중히 여김을 알 수 있는데, 술법상으로는 장풍(藏風)의 효과를 얻는 형세가 되며 도읍풍수상(都邑風水上)으로는 방위, 주거조건과 결부된 장점을 지닌 지세(地勢)가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중부 평야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다중 호위 개장의 땅이 지형적 이유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한양과 모악이 상대적으로 다른 곳에 비하여 열등한 조건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면에서는 개성이 한양에 비하여 우월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개성은 오관산에서 일단 개장, 전호를 이루었다가 송악(宋岳)으로 천심되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장풍법(藏風法)
명당 가운데서도 혈장(穴場)을 잡는 것이 목적인 풍수에 있어서 명당 주위의 지형(地形), 지세(地勢)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풍수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명당 주변의 지세에 관한 풍수이론을 통칭하여 장풍법이라고 하며, 결국 장풍법을 통하여 정혈(定穴)도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실제로 도읍이나 주택 혹은 음택(陰宅)을 상지(相地)함에 있어서는 장풍법이 바로 요체(要諦)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장서(葬書)에 의하면‘장자(葬者)는 생기(生氣)에 의지해야 한다.’하였는데 이는 ‘음양의 기는 내뿜으면 바람이 되고, 오르면 구름이 되고, 분노하면 우뢰가 되며, 떨어지면 비가 되고, 땅 속을 흘러 다닐 때는 생기가 된다.’하여, 풍(風)이나 생기를 모두 음양이기(陰陽二氣)로부터 생겨난 동질이체(同質異體)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음양이기라는 것도 장서(葬書)에 의하면 원래 하나의 기가 오르내림에 따라 음양이란 이름을 가진 것일 뿐으로 양이란 음의 체(體)요, 음은 양의 용(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기가 바람을 타면 흩어져 버리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葬者)가 생기를 얻을수 있도록 하는 법술(法術)을 바람과 물, 즉 풍수라 일컫게 되었다는 것이 장서(葬書)의 주장[註]이다.
그러니까 풍수의 법술은 물을 얻고 바람을 막는 방법을 얻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 바람은 지중(地中)에서 발생하는 생기를 흩어버리므로, 생기를 포용하고 음양의 원기(原氣)를 지닌 바람을 잡아 모을 수 있다면 풍수가 노리는 목적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풍의 필요성이 생긴다. 이것은 바람을 막는 것[방풍(防風)]이 아니고 불어서 흩어지고 사라져 가는 바람을 잘 끌어들여 간수하자(장풍)는 의미로 보아야겠지만 실제 상지(相地)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혈장 주위를 산이 둘러싸고 그 중앙의 요지(凹地)에 음양이기의 결합과 생기의 활동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장서에서는 ‘古人聚之使不散 行之使有止’라 표현하였다.
혹은 장풍법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음내양수(陰來陽受)라는 원칙에 의하여 철형(凸形)으로 이어내린 내룡(來龍)을 요형(凹形)의 지세로 받아들여 그 요형 지세의 중앙에 혈을 정하는 것이 음양조화에 맞으므로 그것을 찾는 방법이 장풍법이라는 견해이다.
철형(凸形) 음내(陰來)의 내룡과 요형(凹形) 양수(陽受)의 중앙분지가 마주치는 곳에 생기가 넘쳐 흐르리라는 판단일 것이다.
이 때 혈 주위의 산세를 풍수에서는 사(砂)라 칭한다. 산수도(山水圖)에 의하면 ‘사(砂)란 혈의 전후좌우에 있는 산’이라 하였다.
사신수(四神獸) 관념(觀念)은 전통적 짐승인 청룡(靑龍) · 백호(白虎) · 주작(朱雀) · 현무(玄武)가 동서남북 혹은 전후좌우 방향을 수호해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본래는 수호성신(守護星辰)의 이름으로『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기타 위서(緯書) 등에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는 고대 중국인의 천문사상(天文思想)의 영향인 것으로 후에 풍수의 혈처 사방의 산세에 빙의(憑衣)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사신수 신앙은 이미 풍수 전래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이며 고구려, 백제의 분묘(墳墓) 벽화(壁畵)의 사신도(四神圖)가 이를 증명한다.
장서에 의하면 사신사(四神砂)의 위치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라 하여 혈(穴)이 남향 즉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한 경우 동쪽이 청룡, 서쪽이 백호, 남쪽이 주작, 북쪽이 현무가 되는 셈이다.
한편 복응천(卜應天)은 『설심부(雪心賦)』에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고인(古人)이 사수(四獸)로 사방을 나누던 것이다. 청룡은 목(木)에 속하여 동방(東方), 백호는 금(金)에 속하여 서방(西方), 주작은 화(火)에 속하여 남방(南方), 현무는 수(水)에 속하여 북방(北方)이 된다.[註]」 고 하였다.
먼저 현무사(玄武砂)의 경우를 보면, 여기에 해당하는 혈 뒤쪽(남향인 경우 혈의 북쪽)의 산으로는 태조산(太祖山)으로부터 맥세(脈勢)를 일으킨 용이 중조산(中祖山)을 거쳐 혈 바로 뒤의 소조산[小祖山 후산(後山) 혹은 주산(主山)이라고도 이르고 마을의 경우 진산(鎭山)이라 하기도 함]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현무와 주작의 관계는 주인과 손님, 남편과 아내, 임금과 신하의 사이처럼 인식된다.
이것은 음내양수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현무가 머리를 들어밀듯 음내(陰來)로 다가오는 것을 손바닥을 오므린 듯한 양수(陽受)의 주작이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그 형세는 현무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의연히(玄武垂頭) 그리고 주작은 춤을 추듯 부드럽게(朱雀翔舞)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현무 주작의 관계가 음양의 조화로 생기를 얻는데 있는 것인 만큼 주작이 산이 아니라 물의 경우에도 가할 수 있음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수주작(水朱雀), 즉 양내음수(陽來陰受)는 술법상 득수법(得水法)에서 다루게 된다. 이럴 때는 산인 현무가 양이 되고 수(水)인 주작이 음이 되어 양내음 수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라서 사신사(四神砂) 중에서도 생기와 직접 관련되는 현무 주작이, 생기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그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청룡 백호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있다.
주작에는 주산에 대응하는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의 두가지가 있다.
조산은 주산에 대하여 주인에 대한 손님, 임금에 대한 신하, 남편에 대한 아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이므로 공손히 절하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 특히 단정(端正) 청수(淸秀)해야 좋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본다.
그러나 주산에 비하여 조산이 지나치게 얕거나 산체(山體)가 작으면 재상(宰相)이 되거나 만석거부(萬石巨富)가 되어도 항상 부족감, 불만감을 갖게 된다고 하여 역시 균형이나 조화를 잃지 않도록 설득한다.
반대로 조산이나 안산이 주산보다 지나치게 높거나 크면 오히려 주산과 혈장을 눌러 무세(無勢) 무력(無力)하게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조산(朝山)의 용(用)은 다음과 같다. 산형(山形)이 청수(淸秀)한 문필봉(文筆峰)이면 문장현세(文章顯世)의 선비가, 둥글면 거부(巨富)가 나오고, 그릇에 놓인 과일이나 떠오르는 보름달 같으면 부귀다남(富貴多男)한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토성체(土星體)를 제일, 금성(金星) · 목성(木星)을 다음으로 친다. 수성(水星)이나 화성(火星)은 다른 성체(星體)와 결합하여 장형(帳形) 혹은 귀인형(貴人形)을 이루어야 좋다.
풍수에서는 산의 모양을 나타낼 때 ‘성(星)’또는 ‘요(曜)’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하늘에 있는 성요(星曜)가 지상에서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성체(星體)는 오성(五星)과 구요(九曜)가 기본이 되고 또 변격(變格)되어 다양한 형상을 나타내게 된다.
오성이란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다섯가지 성진(星辰)으로 곧 오행(五行)을 말한다.
『인자수지(人子須知)』에
「소자(邵子)가 말하기를 태극(太極)이 나뉘어 음양이 되고 음양이 오행을 생(生)하고 오행이 만물을 생(生)한다.
고로 오행의 정(精)은 하늘에 매이고 오성의 형(形)은 땅에 있어 오재(五材)가 되었으며 기운(氣運)은 세(歲)에 거느려 오진(五辰)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오장(五臟)이 되고, 물건에 있어서는 오색(五色 : 청 · 황 · 적 · 백 · 흑), 오음[五音 : 궁(宮) · 상(商) · 각(角) · 치(徵) · 우(羽)], 오미[五味 : 산(酸) · 함(艶) · 신(辛) · 감(甘) · 고(苦)]가 되며 행(行)에 있어서는 오상(五常 : 부자(父子) · 군신(君臣) · 부부(夫婦) · 장유(長幼) · 붕우(朋友)이 되는지라, 고로 임금이 오운(五運)을 타 관직을 두고 오례(五禮)를 나누고 오형(五刑)을 베풀어 만방을 다스리고 백성이 모두 화순(和順)한 뒤에 이로 인하여 득실을 살피고, 비오고 개이고 차고 더운 것과 눈과 바람, 그리고 동물과 식물 등의 길흉화복의 변화를 보인 것이니, 지리법(地理法)도 마찬가지로 산의 형세로 오성을 분별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경험하는 이치가 당연하므로 오성에 대한 이치를 밝히 알아야 한다.」 고 하였다.
오성의 구분은 혈형(穴形)에 의하여 정하여지는데 금성은 원(圓), 목성은 직(直), 수성은 곡(曲), 화성은 예(銳), 토성을 방(方)을 그 정체(正體)로 한다.
또 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한데 금성은 태백성(太白星)이오, 목성은 세성(歲星), 수성은 진성(辰星), 화성은 형혹성(熒惑星), 토성은 진성(鎭星) 등이 그것이다.
오성에 의한 산형(山形)의 판단은 매우 까다로운 편으로 그 정체에 의하여 추론할 수 밖에 없으며 술사(術師)들의 그에 대한 해석도 무척 구구한 편이다.
예컨대 요금정(寥金精)은 금으로 문성(文星), 목으로 장성(將星)을 삼고, 장자미(張子微)는 금으로 무성(武星), 목으로 장성[역시 무성(武星)]을 삼고, 양균송(楊筠松)은 토(土)로 존성(尊星)을 삼고, 자미(子微) · 금정(金精) 두 사람은 토(土)로 재성(財星)을 삼는 식이다.
이 오성의 변격(變格)으로 이루어진 탐랑성(貪狼星), 거문성(巨門星), 녹존성(祿存星), 문곡성(文曲星), 염정성(廉貞星), 무곡성(武曲星), 파군성(破軍星), 좌보성(左輔星), 우필성(右弼星) 등이 구성(九星) 혹은 구요(九曜)가 된다.
조산(朝山)은 혈장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근조(近朝), 원조(遠朝), 암공(暗拱)으로 나눈다. 가까운 근조는 그 높이가 현무가 입수(入首)하는 두뇌보다 높으면 불길하지만 원조나 암공같이 멀리 떨어진 조산은 하늘 높이 치솟아도 무방하다.
이 때 어디까지를 조산, 즉 주산(主山)의 세력 범위로 보아야 하는가는 오직 내룡(來龍)의 규모에 따르게 되는데 내룡 백리(百里)면 조산 백리, 천리 내룡이면 천리 조산이란 원칙에 따르면 된다.
그러나 술서(術書)에 따라서는 근조(近朝)만을 중시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데 복공(卜公)은 먼 외산(外山)의 천중산(千重山)이 가까운 일개 안산만 못하다 하였고, 먼 데 있는 산이 아무리 수려 장엄하여도 혈장 가까이 있는 조그마한 독봉(獨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요컨대 산세를 미시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거시적으로 보느냐 하는 안목의 차이일 뿐으로 양자 모두 균형과 조화의 산세를 추구하고 있음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혈전(穴前)에 일반적으로 조산보다 낮고 작은 또 하나의 주작이 안산이다. 안산은 이름 그대로 주산의 책상 혹은 안석(廓案)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은 옥궤(玉廓) · 횡금(橫琴) · 안궁(眼弓) · 옥대(玉帶) · 집홀(執笏) · 안검(按劍) · 석모(席帽) · 아미(蛾眉) · 삼태(三台) · 관담(官擔) · 천마(天馬) · 정절(旌節) · 서대(書臺) · 금상(金箱) · 옥인(玉印) · 필가(筆架) · 서통(書筒) 등과 같으면 좋다고 한다.
안산은 조산의 발치 기슭에 위치함이 보통인데‘端正圓巧 秀眉光彩 平正齊整 回抱有情’하면 길사(吉砂)가 되고 형상이 좋다 하더라도 물에 흘러 날아가 버리듯 혈을 향하여 찌르듯 하면 좋지 않다.
또한 ‘?腫粗大 破碎讒巖 醜惡走竄’하고 혈에 대하여‘反背無情’하면 흉사(凶砂)이다.
혈장으로부터의 거리는 그 명의(名義)에 비추어 안산이 가까이에, 조산이 멀리 있음이 원칙이다.『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에서도
「혈전(穴前)이 주작으로 양명(陽溟8의 이름을 취하는 고로, 혈전 명당이 내양(內陽), 안산이 중양(中陽), 그리고 조산이 외양(外陽)[註]」
이라 하여 안산, 조산의 혈전으로부터의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술법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조산보다 가까이 있는 안산을 더 중시한다. 조산은 없어도 결국(結局)이 가능하지만 안산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이 까닭이다.
어떤 산서(山書)에는 아예 안산과 조산을 그 산형(山形)에 있어서 동일시하는 경우까지 있는 형편이다. 일반적으로는 위엄이나 격식이 필요한 국도(國都) · 읍성(邑城) · 제릉(帝陵) · 왕릉(王陵)에는 조산이 필요하고 보통의 음택(陰宅), 양기(陽基)에는 조산보다 안산이 절대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는 현무의 형세이다. 언제나 수두(垂頭)하여 유정(有情)하여야 하며 꼿꼿이 치솟은 무정의 형태는 혐기(嫌忌)의 대상이 된다. 앙연(昻然)하여 위압감을 주는 산세보다 수그러들듯 온화한 기품의 산세가 길격(吉格)이라 생각한 듯하다.
현무는 그 대소(大小) 여하가 매우 중요한데 역량이 큰 용이 커다란 용혈(龍穴)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현무는 혈 뒤의 모든 산에 대한 총칭으로써 크게 넒은 의미의 내룡(來龍)과 좁은 의미의 내룡으로 구분된다. 넓은 의미는 태조산으로부터 주산을 거쳐 혈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산이 포함되며, 좁은 의미의 현무란 주산으로부터 혈장까지의 산세를 말하는 것이다.
현무사는 내룡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之) · 현(玄)’자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고 분맥(分脈)을 치며 내려오는 것이 좋고 고직(孤直)한 형세는 좋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좁은 의미의 현무는 입수(入首)와 두뇌(頭腦)가 중요 부분이다. 입수란 용의 머리가 혈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내룡의 말절(末節)이 낮게 두뇌로 넘어가는 곳이다.
두뇌란 혈 바로 뒤의 높이 솟은 부분으로 혈을 바로 주위에서 둘러싸고 있는 사성(砂城)의 뒤 가운데 가장 높은 부분을 말한다. 예컨대 왕릉으로 볼 때 곡장(曲墻)의 중앙 제일 높은 곳이다.
아미(蛾眉)는 두뇌에서 봉분(封墳)에 이르는, 도도록하게 솟아나온 부분을 말하며 팔자아미(八字蛾眉), 월미형(月眉形)의 2격(二格)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좋다. 입수 전체적으로는 진(眞) · 횡(橫) · 곡(曲) · 비(飛) · 삼체(三替)의 오격(五格)이 있다.
현무를 용의 머리로 간주하는 만큼 뿔(角) · 귀(耳) · 눈(目) · 코(鼻) · 이마(聊) · 수염(鬚) · 입(口) 등이 있는 것은 물론이며 부위에 따른 길흉법도 있다. 예를 들면 코나 이마는 좋고 뿔과 이마는 좋지 않다는 등이 그것이다.
용(龍) · 호(虎) · 작(雀) · 구(龜)의 사신수 가운데 좌우의 용호(龍虎)는 풍수의 성국(成局)으로 볼 때 불가결의 요건으로서 그 임무는 장풍에 있으므로 혈을 두루 감싸고 보호하고 있어야 한다. 산수도에서도 특히 혈 주위를 조밀하게 호위하고 생기를 융취(融聚)하는 것이 용호라 하였다.
청룡은 주산에서 안산을 향해 왼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를 말하며 백호는 오른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를 말한다. 청룡, 백호가 모두 내룡과 연결된 본신(本身)으로부터 발출(發出)한 것일 수도 있고, 둘 다 다른 산에서 나와 둘러싸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하나는 본신, 다른 하나는 다른 산에서 이어져 나올 수도 있다.
이 때 둘 다 본신에 이어진 것을 본신용호(本身龍虎), 다른 산에서 온 것을 외산용호(外山龍虎), 혼합된 것을 주합용호(湊合龍虎)라 부르기도 하며 본신용호가 가장 좋고 외산용호와 주합용호도 모두 흉격(凶格)으로는 보지 않는다.
용호는 2중 3중으로 호위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안쪽 것을 내청룡(內靑龍), 내백호(內白虎)라 하고 그 바깥쪽 것은 외청룡(外靑龍), 외백호(外白虎)라 한다. 성국(成局)과 합치되었다면 왕후(王后)를 배출할 수 있는 길세로 친다. 용호의 체(體)는 ‘청룡완연(靑龍伏穆) 백호순부(白虎順琅)’로서 서로 화합의 형태로 유정(有情)하게 감싸면 좋다.
더욱이 주산에 대하여는 복부(伏俯), 항복(降伏)의 형세를 취하는 용호라야 좋다는 사실을 누누히 설명하는 술서(術書)가 많다. 『설심부(雪心賦』에
「백호는 복(伏)하고 청룡은 강(降)해야만 한다. 그래야 혈장의 존귀한 정신이 스스로 백배(百倍)하여 청룡을 부를 수 있고 그에 응하여 대장(大將)이 등대(登臺)하여 전후의 사졸(士卒)을 스스로 만천(萬千)의 기상(氣像)으로 위엄(威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고 이어서 현무에 대한 용호의 분명한 주종관계를 밝히고[註] 있다.
그렇지 않고 용호가 후산(後山 주산)을 질투하는 듯 돌아 앉거나 용호가 서로 물어뜯을 듯 대치하거나 혹은 그 모양이 첨사(尖射) · 파쇄(破碎) · 반역(反逆) · 주찬(走竄) · 사비(斜飛) · 직장(直長) · 고압저함(高壓低陷) · 수약(瘦弱) · 노근(露筋) · 단요(斷腰) · 절비(折臂) · 앙두(昻頭) · 파면(擺面) · 조악(粗惡) · 단축(短縮) · 박협(迫狹) · 강경(强硬) · 엄락(掩落) · 순수비주(順水飛走) · 여도(如刀) · 여창(如槍) · 여퇴(如退) 한 것은 모두 흉악한 것으로 간주한다.
조화되고 균형을 이루면서 온화한 산세를 길(吉)한 것으로, 흩어짐 · 부조화 · 불균형 · 갖추지 못함 · 포악 · 흉폭 혹은 부러지거나 흉기(凶器)처럼 생긴 산세는 흉한 것으로 본 듯하다.
용호의 용은 왕자(王者)의 표정 · 재화(財貨)에 관련, 호는 무력 용기와 자손 번성을 맡고 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청룡은 자손과 관귀(官貴)를 주재(主栽8하고, 백호는 처첩(妻妾) · 여식(女息) · 자부(子婦)와 재산을 주재한다는 설도 있다.
대체로 청룡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제왕(帝王) · 출세(出世) · 관귀(官貴) · 남자를 , 백호는 해가 지는 결실의 서쪽으로 여자와 재산에 유추(類推)하는 듯하다. 물론 용호가 아무리 이상적 형세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내룡이 진룡(眞龍)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용호는 풍수 구성상 종속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호위(護衛)와 장풍(藏風)을 조성(造成)하는 것이 그 주요 임무인 것이다.
따라서 용호 중 하나가 결여된 경우라도 만약 물이 음양의 순화(諄化)를 충분히 할 수 있다면 괜찮다. 이렇게 되면 장풍국(藏風局)이 아니라 득수국(得水局)이 됨은 물론이다.
용호가 현무, 주작에 비해서 중요성이 몹시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소위‘좌청룡 우백호하는 풍수’라 하여 용호가 더욱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까닭은 고래(古來)로 풍종호(風從虎)[註]라든가 용은 구름과 비를 부른다는 기우관념(祈雨觀念)에서부터 비롯된 듯하다.
또한 용호는 주인격인 주산 내룡보다 형세가 장대하지 않고 변화도 다양함이 없이 가지런하며, 양명(陽名)하고 수려하며 배역(背逆)하지 않아야 한다.
용호가 자기 본분을 잃고 기세있게 변화하면 자체에 길혈(吉穴)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룡의 생기만 도기(盜氣)할 뿐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용호의 예리한 가지가 주산의 혈장을 충사(沖射)하여 살(殺)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양의 풍수적 입지 해석에서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국도(國都)의 주산 문제이다. 주산은 장풍의 입장에서는 사신사(四神砂) 중 현무에 해당된다.
내룡 맥절(脈節) 중에서 혈의 뒤쪽에 높이 솟은 산으로 양기(陽基)의 경우는 마을을 진호(鎭護)한다는 뜻으로 진산(鎭山)이라고도 하고, 단순히 혈 뒤의 산이라 하여 후산(後山)이라고도 한다.
이런 논리는 그 후 여러 논문에서 그대도 답습되어 왔는데 이는 아마도 촌산지순(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가 끼친 영향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택리지』그리고『동국여지비고』등에서는 모두 한양의 진산을 삼각산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주산을 백악(白岳) 즉 오늘의 북악산으로 제시하여 혼란의 여지가 있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가 해산(亥山) 즉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임좌병향(壬坐丙向)을 취하라는 글을 올린 일이 있고, 백악을 현무, 주산으로 설명한 대목이 있으며 세종 때 국도 주산 문제의 논의에서도 한양의 주산은 백악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진산은 반드시 백악이란 것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촌산지순(村山智順)의 해석대로 진산이 곧 주산이라고 한다면 한양의 후산 문제는 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기록에 따라서는 진산과 주산을 명백히 구분하여 「삼각산은 서울 북방에 높이 솟아 서울의 진산, 백악산은 삼각산의 중심맥으로 서울 북방에 둘러싸인 준봉(峻峰)으로 서울의 주산」 으로 명기하기도 하였다.
풍수서에서는 주산 혹은 진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예가 별로 없다. 최근에 우리 글로 발간된 풍수서에는 주산이란 용어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지만 한적(漢籍)에서의 용례(用例)는 거의 없는 듯 하고, 특히 진산이란 말은 풍수술사(風水術士)들 중에서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진산이란 용어가 풍수술어(風水術語)라기보다 일반적 의미로 쓰여진 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주산이 쓰여진 용례를 굳이 들자면 『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에 원무(元武) 즉 북쪽 현무사가 주산[註] 이라 설명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것은 한양의 산세 중 현무사가 허약하기 때문에 나온 일종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개성은 종산(宗山)인 오관산(五冠山)으로부터 대단(大斷)하여 송악산(松岳山)으로 속기(束氣)되면서 송악으로 개성의 주산을 이룬 형국(形局)이며, 이 때의 송악산은 해발 588m로 그 남쪽 즉 조안사(朝案砂)에 해당하는 여러 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위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주산이 곧 진산이 되어도 무리가 없지만, 한양은 북악산이 342m에 지나지 않아 조산, 안산에 해당되는 남산(265m), 관악산(629m), 남한산(429m) 등에 오히려 억눌리는 형태가 되므로 위치로 보아 북악산이 주산인 것은 분명하지만 진산으로서 성립될 수 없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양은 예외적으로 주산과 진산의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개성이 오관산에서 대단하여 송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송악의 산세가 크기 때문에 진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데 반하여, 삼각산은 위치상 혈후지주(穴後之主)는 아니나 북악을 대신하여 한양을 진호하는 진산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한양의 현무는 북악일 수 밖에 없다. 또 풍수상으로는 삼각산은 개성의 오관산과 같이 한양의 근조산(近朝山) 혹은 종산(宗山)으로 인식하면 혼동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항설(巷說)로는 주산이 그 전방의 조산에 대하여 신하에 대한 군주, 아내에 대한 남편, 자식에 대한 부모 등의 상징을 띠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며 남편이며 임금인 주산 북악산이 손님이며 아내이며 신하인 조산 즉 관악산보다 낮아 술법상으로는 손님 즉 외세의 간섭, 신하의 모반, 하극상 사건을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삼각산과 북악산의 진산, 주산 문제 이외에도 한양의 경우 주산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는 전도(奠都) 당시와 세종대에 몇번 더 거론되고 있다. 먼저 전도 당시의 주산 결정 및 국도(國都)의 좌향(坐向) 논의는 정도전(鄭道傳)과 무학(無學) 사이에 펼쳐진 것인데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신빙성은 의심스럽지만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학의 의견은 인왕산은 진산, 즉 현무로 하고 남산과 북악을 백호와 청룡으로 하여 도읍을 동향, 즉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하자는 것인데 대하여, 정도전은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政事)를 펼쳐야 하는 만큼 궁궐을 남향, 즉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여 백악 현무, 인왕 백호, 낙산(駱山) 청룡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무학이 한양의 세(勢)를 보며 인왕산으로 진산을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 백호를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며 난색을 표했다.
이에 무학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내 말을 생각하리라’하였다. 산수비기(山水秘記)에 의하면 도읍을 택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점차 연존(延存)의 바람이 있을 것이지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하면 150년이 지나기 전에 찬탈(簒奪)의 화가 일어날 것이오, 겨우 200년 내외에 판탕(板蕩)의 난(亂)함에 이를 것이니 잘 생각하라고 나와 있다.
산수비기는 신라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은 것으로 800년 후의 일을 맞추었으니 어찌 성승(聖僧)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기에서 소위 승려란 무학을 이름이오, 정씨 성 가진 사람이란 정도전을 일컬음이다. 고 되어 있다.
무학이 의상대사의 『산수비기』에 의하여 그와 같은 좌향(坐向)을 내세웠다고 하나 믿기 어려운 기록이라 생각된다.
실록(實錄)에 남아있는 무학의 언행은 매우 현실적이었던 듯한데, 예를 들면 태조가 한양의 지세를 물었을 때도 ‘이 땅은 사면(四面)이 높고 중앙이 평탄하여 성읍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나 중의(衆義)에 좇아서 결정하소서’ 한 점 등으로 미루어 그런 그가 정도전과 언쟁을 벌이며『산수비기』를 인용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여겨진다.
그러나 한양의 좌향이 무학의 주장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형세를 취했다면 현재의 서울과는 큰 차이를 나타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환경지각적(環境知覺的 environmental perception) 측면에서도 백성들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 중심의 핵심적 건물인 왕궁의 방향이 도시의 가로망(街路網)의 발전방향 등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기 때문이다.
도읍의 역내(域內)에서 남문 방향의 발전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서울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읍취락(都邑聚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 남문이란 주작 방향이 되며, 서울이 동향을 하여 동쪽으로 남문 기능이 배정되었다면 발전방향이 우리나라 내륙지방으로 유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권력 핵심부의 좌향 방위가 동향이 되기 때문이다.
주산 배정상의 또 다른 문제는 세종 때 풍수학인(風水學人) 최양선(崔揚善)에 의한 문제 제기이다.
그는 「경복궁의 북쪽 산은 주산이 못된다. 목멱산(木覓山-남산)에 올라보면 향교동(鄕校洞-오늘날 운니동)의 연맥(連脈)인 지금의 승문원(承文院) 기지(基址)가 바른 주산이 됨을 알 수 있다.
정도(定都)를 할 때 왜 이 곳이 아닌 백악 아래에 궁궐을 조영(造營)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주산의 혈에 인가(人家)가 있으면 자손이 쇠미(衰微)한다고 했으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터로 옮긴다면 만세(萬世)의 이(利)를 얻을 것이다.[註]」
라고 개청(啓請)하였다. 그가 주산으로 제시한 승문원 기지는 오늘날 성북동 북서쪽 북악스카이웨이 아래의 328m 고지(高地)인 것으로 추측되며 이 후 이 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찬성론의 언설(言說)은 다음과 같다.
「삼각산은 뻗어서 보현봉(普賢峰)에 이르고 보현봉은 뇌락(磊落)하여 강룡산룡(岡龍山龍)을 이루며 좌우 이협(二峽)에 나뉘어 좌협(左峽)은 기복(起伏)이 요장(遙長)하고 관란(關欄)을 이루어 안암지(安庵地 안암동)에 이르며 우협(右峽)은 달리기 반리(半里)에 백악의 성봉(星峰)을 이루고 또 반리를 달리어 인왕산의 강룡(岡龍)을 이루고 인왕산을 달리어 남으로 회전하여 주산을 조읍(朝揖)하니 이것이 가위 조대(朝對)의 바른 것이라 할수 있으며, 중앙에는 정맥(正脈)이 있어 동남으로 입도(入都)하여 달리어 2리(二里)에 이르러 용구(龍丘)를 이루니 곧 주산이 이것이오,
주산의 낙맥(落脈)은 현사(縣絲)와 같되 봉요(峰腰) 단속(斷續)의 이상(異狀)을 재기(再起)하여 소위 현무수두(玄武垂頭)의 격(格)을 이루니 좌비(左臂)는 만환(灣環)하여 혈전(穴前)에 이르고 우비(右臂)는 활과 같은 형상으로 명당에 읍(揖)하고 있다.
또 삼중의 지엽(枝葉)은 좌우로 혈을 포옹하여 산수(山水) 서로 유정(有情)하며 중앙의 명당은 스스로 정(正)히 존귀하고 국중(局中)의 제수류(諸水流)는 천심(天心)에 합하여 가위(可謂) 기취(氣聚)의 지(地)가 되니 경(經)에 兩水夾處是明堂 枝葉周回中者是란 말에 부합이 된다.」
이에 대한 반대론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백악은 삼각산으로 부터 내려와 보현봉을 이루고 또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강(平岡)을 이루어 수리(數里)에 이르면서 첨봉(尖峰)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백악이다.
그 밑에 기국(碁局)과 같은 명당을 만들어 만병(萬兵)을 세울 만하니 이야말로 전후정중(前後正中)의 정명당(正明堂)이라 할 수 있다. 주산의 북은 외협(外峽)이 삼각산의 서남에서 돌아 대일지(大一枝)를 이루고 나암사(羅巖寺) 남극(南極)에 환지(環至)하고 그 한 갈래가 또한 서남행하여 모악(지금의 안산) 서반(西畔)에 이르니 명당의 서북강(西北岡)이오 중수회환(衆水回環)의 대개이다. 또 주산의 동북은 그 일대지(一大枝)는 청량동원처(淸凉洞源剔8의 동북에서 동남으로 주회(周回)하여 대야(大野)에 이르러 멈추고 다른 일지(一枝)는 청량동원의 동남에서 벽와요(枓瓦窯)로 회지(回至)하여 대교(大郊)에 내려오고 또 한 가지는 사한동원(沙閑洞源)의 남에서 동으로 돌아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그치니 이는 곧 명당의 동남강(東南岡)이오 중수(衆水)의 대개이다.
그리고 백악 명당의 좌우로 말하면 우벽(右枓)은 주산 서반에서 나와서 서남으로 크게 회주(回周)하여 동으로 동대문 수구(水口)에 이르고 그 좌벽(左枓)은 동남으로 주회하여 또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주산 명당의 전후좌우는 균제방정(均齊方正)하여 펑탄치 아니함이 없고 또 조상정룡(祖上正龍)의 대맥(大脈)은 남방으로 직행하여 그 기운이 치성(熾盛)하기 때문에 백악, 인왕, 남산, 모악이 모두 돌기(突起)하여 봉(峰)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 설자(說者)의 소위 내맥(來脈)이란 것은 그 기운이 적은 까닭에 단지 정업원(淨業院)의 뒷면 응봉(鷹峰)을 일으켜 종묘(宗廟)의 혈을 이룰 뿐이요 다른 혈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이 봉 외에는 다시 성기(盛氣)가 없으므로 종묘로 들어간 혈도 또한 다시 봉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방기맥(傍起脈)의 둘로 말한다면 종묘의 지(地)는 이 곧 방기맥의 정맥(正脈)이라 할 수 있고 또 지금 설자들의 말하는 곳은 방기맥의 방맥(傍脈)이라 할 수 있다.
고인(古人)은 흔히 산맥의 대소(大小) 성쇠(盛衰)를 초목(草木) 지간(枝幹)의 대소 영고(榮枯)에 비하여 말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신명당(新明堂)의 지(地)는 첫째 보현봉 내맥(來脈)의 방지(傍枝)요 정맥이 아니며, 둘째 사신사(四神砂)가 불비(不備)하여 현무는 저연(低軟), 용호는 불수(不殊8, 주작은 과고(過高)하며, 세째 수류(水流)가 직거(直去) 무정(無情)하고, 네째 명당이 협소함에 대하여 백악 주산의 경복궁 좌지(坐地)는 첫째 보현봉의 정맥이오 과협(過峽)이 아니며, 둘째 현무가 특수하고 백호가 준거(?居)하여 형세에 합하며, 세째 명당이 관평(寬平)하고, 네째 고비기(古秘記)에 부합하는 점이 많으므로 현재 그대로가 옳다.」
는 황희(黃喜) 등의 주장에 의하여 일단락되었다.
이것은 우선 삼각산의 맥세(脈勢)가 한양으로 입수(入首)되기까지의 정룡(正龍)과 방룡(傍龍)이 어떤 것인가 하는 풍수적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다.
정룡이란 간룡(幹龍) 혹은 원룡(元龍)이라 하는 것으로 주산은 반드시 정룡의 맥세를 받아야 하며 방룡은 지룡(支龍)이라고도 하는데 좌우보조룡(左右補助龍)의 역할 밖에는 할 수 없다.
이 경우 비봉(碑峰)으로부터 거의 남향하여 국(局)을 이룬 북악산을 정룡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안목일 것이지만, 이 점 술법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결과만을 놓고 말할 때 북악은 북의 서방에 편재하여 있는데 반하여 328고지는 정중앙에 위치한 장점이 있다. 그런데 이것도 논란 여지가 있는 것이 중국은 모든 건물의 배치가 정확한 대칭으로 운영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정확한 대칭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는 역시 단정적으로 장점이라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현실적으로 주산을 바꾸면 이궁(移宮)의 조영(造營)이 뒤따르는 만큼 재정문제와 결부되어 복잡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또 범안(凡眼)의 안목으로는 북악이 정맥인 것으로 짐작되어 유야무야로 끝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풍수적 논의는 명분을 위한 방편으로서 거론이 되고 그 결론은 항상 풍수이론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현실적, 합리적으로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여 준다.
주산을 328고지로 옮겼을 경우를 가상할 때, 서울의 시가지는 오늘날 종로 3가 부근을 도심(civic center)으로 도성(都城)의 범위가 숭인동, 신설동, 청량리 방면까지 확장되고, 그 후의 도시 발전방향도 그에 따라 달라졌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주산을 동향 이동코자 개청했던 풍수학인 최양선(崔揚善)의 의견은 몇가지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또 이곳이 백악하(白岳下) 보다는 산세환포(山勢環抱)가 깊어 주거입지상 월동(越冬)의 편의가 나을 것이란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산을 보는 안목은 술사(術師)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어 예컨대 조선조 사격론(砂格論)의 제일인자로 추앙받는 이사(李師)의 가좌도(加佐島)에 있는 속칭 ‘제왕지혈(帝王之穴)’이라는 친산(親山)을 역시 풍수달인(風水達人)인 일이승(一耳僧)이 보고 개탄하여 말하기를 ‘以李師之才 何爲邊葬也 無他 其時 應有掩眼之兆矣’고 평했다는 것이다. 당대의 일급 술인(術人)들 사이에서도 간룡의 의견이 이렇듯 달랐다.
여기에 고려 때 김위제(金謂纖)의 오덕구(五德丘)에 관한 해석도 만일 그의 의견이 정확한 것이라면 한양은 풍수상 지극히 길지(吉地)라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오덕구는 삼각산 남쪽, 서울을 중심으로 한 오방(五方)의 오행산(五行山)이란 뜻이다.
중앙에 면악[面岳-백악(白岳)]의 모양이 원(圓)하여 토덕(土德)에 속하고, 북에 감악[紺岳 적성(積城)]이 곡(曲)하여 수덕(水德)에 속하고 남에 관악이 첨예(尖銳)하여 화덕(火德)에 속하고, 동에 남행산[南行山-양주(楊州)]이 직(直)하여 목덕(木德)에 속하고, 서에 북악[北岳-부평(富平)]이 방(方)하여 금덕(金德)에 속한 것이라 한다.
- 자료 http://blog.naver.com/jbh0127/110015116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