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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컴퓨터는 어느 농기계보다도 쉬운 농기계입니다

하늘내린터 원장 2009. 6. 3. 17:58

컴퓨터는 어느 농기계보다도 쉬운 농기계입니다 - 송인숙님
2007-08-27 | 조회:740

질 좋은 산물을 소비자에게 다리가 되어 준 인터넷

하이텔에 가입하고 보니 오지의 부부에겐 이런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1996년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신문을 속보로 읽을 수 있었다. 신문 배달을 시켜봐야 하루 늦게 도착할 정도이던 오지에서 실시간 뉴스를 읽을 수 있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대화방을 만들어 ‘컴퓨터를 가르쳐 주세요’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자세히 컴퓨터와 응용 소프트웨어를 이야기해주던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이는 아피스 안의 농민·낙농동호회에 가입하고 나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동호회 정보는 엄청났고 전국의 도매시장 가격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컴퓨터와 전화로 홈뱅킹도 시작했다. 수수료를 줄였고 농협 나갈 시간이 줄자 기름 값도 줄었다.

1996년 당시로서 인터넷은 생산한 상품을 유통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활로였다.

시행착오와 고생의 결실로 인숙 씨는 2001년부터 토종닭을 전자상거래 하는 독자사이트(www.scfarm.pe.kr)도 만들었다. 입소문이 퍼지자 단골손님도 차츰 늘어갔다.

인숙 씨는 인터넷을 이용하고 공무원과 싸우면서 점점 농림부 사업을 꿰뚫고 농업정책을 읽고 있는 특이한 아줌마가 되었다. 친환경 농산물 허가 서류를 작성할 때는 공무원이 작성해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서류를 프린트해 들고 갔다. 처음 보는 서류에 공무원들이 어리둥절해하자 6권짜리 농림사업시행지침을 펴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 지침에 의거해 서류 작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줌마, 이 지침을 다 읽으셨어요?” 이렇게 묻는 담당자의 눈빛에 존경의 뜻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식한 농촌 아줌마에서 존경스런 송 여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청지원>의 닭들과 유기농산물은 특별한 영농기술이 아니라 농장 주인의 정성과 고집으로 자란다. 인숙 씨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가져다가 건조시켜 사료를 직접 만든다.

메주를 만들 때 부패되기 직전에 발효시키듯 음식물 쓰레기의 수분 함량을 줄인 뒤 막걸리 찌꺼기를 넣어 발효를 시키고 이 사료를 닭에게 먹인다

청지원의 순환적 생산 방법

이 사료를 먹인 닭들은 닭장에서 냄새가 하나도 안 난다. 닭 축사 옆엔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다른 양계장과는 큰 차이가 난다. 게다가 이렇게 키운 닭은 양계장에서 가둬 키운 닭과는 다르게 쫄깃쫄깃한 육질의 씹는 맛이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닭이 질기고 맛없다고 환불을 해달라는 경우도 있지만 사육 방법을 알고 육질의 이유와 맛을 알고 나면 태도가 180도 달라져 금방 단골로 변모한다.

닭의 똥은 다시 밭에 거름으로 쓰인다. 닭똥과 풀을 섞어 만든 이 거름은 유기농산물 인증을 받은 상추, 케일, 방울토마토로 열린다.

감자 한 알도 유기재배를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단순히 감자 키우는 과정뿐 아니라 씨 뿌리기 전 농장의 토양 관리가 우선이다. 적어도 10년 이상 살충제 및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고 흙에 미생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인숙 씨는 8년 정도 휴경했던 지역에 7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물론 해충의 피해는 있지만 가령 진딧물이 생기면 무당벌레가 생겨서 진딧물을 먹는 식으로 먹이 피라미드가 작동한다. 곤충과 동물들의 생태계 안에서 농장도 순환하는 것이다. 밭에 첨가하는 인공적 거름까지 생태적으로 만들었으니 이러한 꼼꼼한 의지 덕에 1999년에는 유기농 재배와 음식물 사료로 환경보호에 앞섰다는 공로로 강원도지사상까지 수상했다.

인숙 씨는 농약도 비료도 축사의 분뇨도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생명을 지키는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서 환경을 보존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초제를 쓰지 않아 밭과 앞마당은 잡풀들이 무성해 농장은 어딘지 정돈되지 않은 이미지지만 잡풀들이 맘껏 자라주는 게 오히려 기쁘기만 하다

오지에서 자녀 키우기

인터넷은 농촌에서의 정착을 도왔을 뿐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에도 큰 힘이 되었다. 자연을 벗 삼아 노는 것이 도시의 어떤 삶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은 도시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통신에서 교육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문제들을 다운 받아서 프린트 해 나눠주면 학습지처럼 문제를 풀곤 했다. 자료가 많아서 아이들의 흥미도 높았다. 친구가 적은 외로움도 컴퓨터가 달래주었다.

또래 친구도 사귀고 메일도 보내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남겨진 아이들의 메일을 슬쩍 열어보면 아이들의 묘사에는 오대산 삼산리에서의 활기차고 즐거운 삶이 꿈틀대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해주는 게 고마웠고 또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거 같아 대견했다.

척박한 땅을 일궈 삶의 터전으로

“컴퓨터는 어느 농기계보다도 쉬운 농기계입니다.”

인숙 씨는 1997년 한국농림수산정보센터에서 주최한 정보사냥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은 이후로 정보화 영농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강원도지사로부터 유기농산물 생산으로 인한 환경보존 공로상을 받았다. 더 배워서 다른 농민들에게 컴퓨터나 유기농 기술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한다.

<청지원>의 성공은 경제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송인숙 씨 가족은 아직도 대출 받아 들여온 농지에 대한 이자를 갚기 바쁘다. 하지만 송인숙 씨의 성공은 척박한 땅을 일궈 삶의 터전으로 삼은 뒤 농사의 가능성을 발견해 낸 한 인간의 성공이다. 그녀의 삶은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에게 그대로 하나의 기록이다.

“13년이 한 달 같았어요. 남은 한두 달도 열심히 살다보면 그때는 땅이 주는 수확으로 살게 될까요.”

송인숙 씨의 작은 소망이다.

송인숙님 기사 끝. / 출처 : 농촌정보문화센터

 

 

네 식구의 시골 적응기가 시작되다 - 송인숙님

국립공원 오대산 기슭, 해발 400m의 청정지역에서 방목한 닭과 오리에게 직접 개발한 발효사료를 먹이는 농원이 있다. 육질이 다르다고 소문이 자자해 1년에 키우는 7천여 마리의 닭과 오리는 다 크기가 무섭게 팔릴 정도다. 게다가 축사에서 나오는 오물은 발효를 시켜서 고스란히 채소밭의 퇴비로 활용되는데, 이 ‘순환 농장’에서 재배한 무, 고추, 파프리카 등의 채소는 아삭아삭한 맛이 끝내준단다.

시골에 남아 있던 농민들도 모두들 도시로 떠나던 1993년에 귀농했고 인터넷은커녕 TV도 잘 안 나오던 오대산에서 10여 년 전부터 피시통신을 두드렸던 오지의 아줌마는 지금은 유기농산물 인터넷 배송의 선도자가 되었고, 농민들에게 인터넷을 강의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로 모두들 농촌을 떠나던 때 농촌으로 들어가 13년이라는 시간을 땅과 씨름하다 결국 ‘땅의 여자’가 된 사람, 강원도 강릉 오대산 자락의 <청지원(구 송천농원)> 송인숙님이 그 주인공이다.

네 식구의 시골 적응기

남편과 전업주부였던 송인숙님은 다섯 살배기 아들과 4개월 된 딸을 안고 강원도 강릉 오대산 자락으로 이사를 왔다. 산자락에 고작 일곱 가구가 살던 깊은 마을,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와 도저히 물건을 보관할 수 없는 창고 하나가 네 식구를 맞았다.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 정직하게 일해 정직하게 벌고 싶은 마음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택했다.

다행히 아이가 울지 않았다. 산속의 적막이 오히려 포근한 듯 깊은 잠을 잤다. 가족이 이사한 동네는 강릉에서도 40km나 떨어진 삼산리. 옛날 거리로 꼭 백리만큼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1993년은 국내에도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었던 해, 그나마 농사짓던 사람들도 땅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요즘처럼 ‘귀농 담론’이 이야기되지도 않던 시절,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땅을 택했다.

천식을 앓고 있어 가을만 되면 고통스러운 밤이 계속되자 혼탁한 공기로 가득 찬 도시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도시 생활, 성공에 대한 미련을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골 가서 살자는 남편 고광석 씨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송인숙 씨가 두말없이 짐을 꾸린 이유였다.

아내는 곧 까만 고무신에 헌 작업복, 파마기 없는 머리와 화장 안 한 얼굴이 어울리는 영락없는 시골 아낙으로 변신했다. 다섯 살이었던 큰아이 태양이는 이사 오자마자 운동화에 흙이 묻는 게 견딜 수 없이 짜증나는 눈치였지만 며칠 만에 그런 짜증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오로지 마당에서 노는 일에 열중이었다. 달려드는 닭들에 한동안 쫓겨 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닭을 겁주려 날리던 돌팔매질도 늘고 달리기도 제법 빨라졌다. 닭도 더 이상 태양이를 쫓지 않았다. 엄마도 태양이를 보며 흙과 땅에 삶을 적응시키리라 생각했다.

13년 전, 도시 출신 이방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텃세와 편견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지에서의 하루하루는 생존을 위한 끝없는 전투였다. ‘오죽 못나서 시골로 농사나 지으러 낙향했겠냐’는 주위의 시선은 인숙 씨를 무척 힘들게 했다. 더욱이 초기에는 농부가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농사에 관한 정보나 지원이 전혀 없어 더욱 힘들었다.

쓰러져가던 집을 고치고 사료 건조장을 짓고 창고를 새로 지으려 하자 국립공원 안에 건물을 짓는 것은 불법 용도변경이라며 면 직원 남자 셋이 협박조로 찾아왔다. 농민들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아왔던 공무원들의 태도는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힘없는 도시 출신 이방인들을 공무원 말 잘 듣는 농민으로 길들이고 싶어 몇몇 공무원들은 사사건건 꼬투리 잡고 시비를 걸어왔다.

“공무원들과 싸우며 싸움닭 다 됐지요.”

시행착오와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땅보다 사람이 더 척박한 것에 분하고 외로워 이사를 결심하고 짐을 꾸렸던 어느 날, 산림청 공무원이 다가와 공무원을 고발하는 신문고가 있다는 사실을 귀띔해주고 갔다. 억울함을 써 내려간 편지 한 장에 며칠 후 감사원에서 감사들이 찾아왔다. 면사무소는 발칵 뒤집혔다. 감사들은 상황을 조사하고 즉각 시정명령을 내렸고, 억울함이 해소되자 인숙 씨 가족은 해당 공무원을 처벌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지역에서의 마찰을 해소하고 이웃으로 받아들여진 긴 싸움의 첫 승리였다. 이삿짐을 보고 감사원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 좋은 곳을 찾아내 들어오고선 왜 떠나려고 하냐며 웃었다. 문제가 해결되고 둘러보니 오대산 자락의 삼산리 만큼 좋은 동네가 있을까 싶었다.

13년의 농사 생활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은 열심히 재배한 채소를 사주는 사람이 없을 때였다. 도매시장에 내다 팔 때는 모양이 예쁘지 않고 무게가 적게 나온다는 이유로 수지를 맞출 수가 없어 언제나 적자를 면치 못했다. 두릅 값이 폭락을 해서 도매시장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어느 해엔 강릉 시내에 좌판을 깔고 팔기도 했다. 두릅이라는 간판을 하나 세워두었더니 불법간판이라고 면 직원이 뭐라 하기도 했다. 농약 한 번 비료 하나 안 주고 순전히 퇴비로만 키웠던 김장 무, 먹어 본 사람에게 배만큼 달다는 평가도 받아 자신감이 있었던 자식 같은 무를 정당한 값을 받고 팔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세상이 이상하다 싶었다.

이전에 동경해 온 농촌에서의 정직하고 전원적인 삶은 꿈 깬 지 오래. 스스로 개척하고 앞서 나가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찾아 들었다.

인숙 씨는 농촌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했고 운전학원에 등록해 면허부터 땄다. 도시에 있었으면 운전을 하려고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도시에서의 삶보다 더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자고 결심했다. 다음엔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했다. 오대산 자락이 관광지인지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식당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농사일과 병행하며 밤잠 설치며 공부해 1년 만에 합격했다.

컴퓨터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386컴퓨터를 장만하고 자판을 익혀 가계부를 작성하고 게임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 통신을 하면 다른 농가의 노하우나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시 모뎀도 달고 프로그램도 깔았다. 곧 하이텔 대화방에서 농사짓는 사람을 수소문했고 한국농림수산정보센터가 운영하는 소모임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인적 없는 깊은 산골, 이웃과의 소통조차 용이하지 않던 가족들이 PC통신을 통해 전국의 농사꾼들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송인숙님 기사 계속됩니다. / 출처 : 농촌정보문화센터

출처 : 귀농귀촌
글쓴이 : 하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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